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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각오가 아니 선다면 공부를 하지 말라
    인용 2024. 4. 28. 19:17

    메이지 시대의 책을 읽다 보니 메이지인의 ‘날카롭고 위세 좋은 말’의 기세에 신체가 익숙해졌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기질이 굳센 사람으로 불합리한 것을 싫어하고 잘난 체하는 녀석을 싫어하고 근성이 비열한 자를 싫어해서 버럭 화만 내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을 깔보고 자신을 높이지 않는 점이 멋지다.

     

    내전으로 에도 전체가 난리가 났을 때도 충성을 뽐내거나 시류에 편승하려 하지 않고 세속에 구애됨 없이 훌훌 유연하게 지냈다.

     

    유키치는 에도가 불바다가 될 위기에도 자신이 운영하는 학당 게이오의숙이 비좁다며 보수 공사를 했다. 에도 어디에도 이런 시국에 보수 공사를 하는 집은 없었다. 목수도 미장이도 일이 없어서 곤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노임은 헐값이었지만 아주 기뻐하였다.

     

    친구가 찾아와서 이럴 때 공사라니 그만두라고 충고하자 유키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가 않아. 지금 내가 건물을 새로 지으니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작년에 공사를 했다면 어땠을까? 바야흐로 전쟁이 일어나서 피난할 때 그 집을 짊어지고 갈 수는 없지. 지금 전쟁이 일어나면 불에 탈 수도 있고, 타지 않을 수도 있어. 설령 불타더라도 작년에 집이 불탔다고 생각하면 후회는 없다. 조금도 아깝지 않아.”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소동이 벌어진 와중에 유키치가 당당하게 건물을 지으니 이웃들은 성에서 일하며 정세에 밝은 후쿠자와가 저리도 태평하니 여기는 안전할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유키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도망갈 준비는 했다. 탄환이 날아오면 집 정원에 구덩이를 팔지 흙벽으로 만든 광 마루 밑에 숨을지 고민한 끝에 기슈(나가노 현)의 저택 정원에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여기가 좋겠다. 일을 그르쳐 전투가 걷잡을 수 없어지면 이리로 도망치자”고 결심하고 짐 나르는 거룻배를 대여섯 대 빌려서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일가가 배를 타고 기슈 저택으로 도망가려고 빈틈없이 준비했다. 전쟁이 뭐 대단한 일이냐고 배짱을 부리면서도 도망갈 준비는 확실히 해 둔 합리성은 후쿠자와 유키치다운 멋이다.

     

    정작 전투가 시작되자 그는 별로 당황하는 일도 없이 태연하게 학당을 운영했다.

     

    18685월 우에노에서 큰 전쟁이 시작되자 그 전후로 에도에서 연극이며 만담, 온갖 구경거리, 요리집이 모두 휴업한 통에 도시 전체가 캄캄했다. 한치 앞도 모르게 혼란했지만 나는 전쟁이 일어난 그날도 가르침의 과업을 그만두지 않았다. 우에노에서는 계속 철포를 쏘고 있다. 하지만 우에노와 신센자는 2리나 떨어져 있으니 철포가 날아올 우려도 없고, 그때 나는 영어 원서로 경제 강의를 했다.”

     

    보신전쟁 때도 유키치는 태연하게 학당을 계속한다. 도쿠가와의 학교는 당연히 문을 닫았다. 유신 정부는 전쟁이 바빠서 학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일본에서 적어도 책을 읽고 있는 곳은 오로지 게이오의숙뿐이다.”

     

    전란 속에서 수업을 하는 초연함과 거기서 경제, 요컨대 상업의 뼈대를 강의하는 ‘리얼리스트’의 모순 속에서 나는 후쿠자와가 체현한 양질의 무사적 사고방식을 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유키치가 양이가(攘夷家)들로부터 서양 학문을 강의하는 인간으로 간주되어 암살 대상이 된 시기에 한 번도 야간 외출을 하지 않았던 신중함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략 유신 전 1861-1862년부터 유신 후 1873-1874년까지 12, 13년 동안이 가장 뒤숭숭하고 위험해서 그동안 나는 도쿄에서 밤에는 결코 외출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여행해야 할 때는 이름을 위조하고 짐에도 후쿠자와라고 쓰지 않았다. 남몰래 돌아다니는 꼴이 도망자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고, 도둑이 도망 다니는 형국이라 정말로 유쾌하지 않았다.”

     

    실제로 유키치의 친구인 데즈카 리쓰조와 도조 레이조는 양학자라는 이유로 조슈인에게 살해당하고 국학자 하나와 다다토미는 신하의 도리를 어겼다고 하여 암살당했다. 양학자이면서 공공연한 개국자인 유키치도 여러 번 간발의 차이로 암살자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던 상황인지라 당연한 경계였다.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키치는 이아이에 소양이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좋아해서 오사카에서 오가타주쿠를 경영할 때도 열심히 수련했다. 그러나 막부 말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갑자기 용맹한 사람들처럼 행동하자 싫증이 나서 덜컥 그만두고 만다. “이아이 검은 완전히 깊숙한 곳에 넣어 버리고 칼 같은 것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고 뺀 적도 없고 빼는 방법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지냈다.

     

    막부 말기 흉흉한 시절, 학자들까지 호신용 장도를 차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유키치는 칼을 대부분 팔아 치운다. 몸에 차고 다니는 두 자루의 검중 장도는 검집만 장도지 내용물은 단검이었고, 단검은 가쓰오부시를 깎는 칼이었다.

     

    그 무렵 친구인 다카바타케 고로를 찾아가니까 방에 장검이 장식되어 있었다. 유키치는 “바보 같은 짓이니 이런 것을 장식하지 말라”고, 자네는 그것을 뽑을 수 없다고 말한다. 다카바타케가 당연히 뽑지 않을 거라고 대답하자 유키치는 마당에 나가서 4척이나 되는 장검으로 이아이 자세를 보여 주고 나서 “뽑을 수 있는 자는 이미 칼을 팔아버렸는데 뽑지 못하는 자가 장식해 두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하고 쓴소리를 했다.

     

    (pp. 60~64)

     

    ‘비인정’(非人情)이라는 말이 나쓰메 소세키의 조어라는 사실이 침상에서 떠올랐다.

     

    소설 『풀베개』는 ‘비인정’이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철학적 고찰을 담은 내용이다.

     

    책머리의 잘 알려진 문장을 인용하겠다.

     

    “괴로워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떠들어 대기도 하고 울어 대기도 하는 것은 인간 세상에 으레 있는 일이다. 나도 30년간 줄곧 그렇게 해 와서 이제 아주 신물이 난다. 신물이 나는데도 또 연극이나 소설로 같은 자극을 되풀이해서는 큰일이다. 내가 바라는 시는 그런 세속적인 인정을 고무하는 것이 아니다. 속된 생각을 버리고 잠시라도 속세를 떠난 마음이 될 수 있는 시다. 아무리 걸작이라도 인정을 벗어난 연극은 없고, 시비를 초월한 소설은 드물 것이다. 어디까지나 속세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그것들의 특색이다. 특히 서양의 시는 인간사가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른바 순수한 시가도 그 지경을 해탈할 줄 모른다. 어디까지나 동정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정의라든가 자유라든가 속세의 상점에 있는 것만으로 일을 처리한다. 아무리 시적이라 해도 땅 위를 뛰어다니고 돈 계산을 잊어버릴 틈이 없다. 셸리가 종달새 소리를 듣고 탄식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기쁘게도 동양의 시가에는 이를 해탈한 것이 있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꺾노라니

    한가로이 남산이 들어오네.

     

    단지 이것만으로도 숨 막히는 세상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한 광경이 나타난다. 울타리 너머로 이웃집 처자가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고 남산에 친구가 봉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가로이 속세를 벗어나 이해득실의 땀을 씻어낸 마음이 될 수 있다.

     

    獨坐幽篁里

    彈琴復長嘯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

     

    홀로 그윽한 대숲에 앉아

    거문고 타다 다시 길게 휘파람 부네

    깊은 숲이라 남들은 알지 못하고

    밝은 달만 찾아와 서로를 비추네

     

    단 스무 글자 안에 족히 별천지를 만들어 놓고 있다. 이 천지의 공덕은 『호토토기스』나 『곤지키야샤』의 공덕이 아니다. 기선, 기차, 권리, 의무, 도덕, 예의로 기진맥진한 뒤 모든 것을 망각하고 푹 잠든 것 같은 공덕이다.”

     

    이런 문장을 국어 교과서에 실어서 중학생에게 읽도록 하는 것이 너무하지 않은가 싶지만, 중학생 때 이 글을 읽고 ‘속세의 상점’이라는 한 단어에 무심결에 가슴이 찌르르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한시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 글의 영향일 것이다. 『풀베개』의 화자인 ‘나’는 그림 도구를 챙겨서 비트적비트적 산속 온천에 간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잠시 이 여행 중에 일어난 일과 여행 중에 만난 사람을 노의 구조와 그 배우의 연기로 가정해 보면 어떨까. 완전히 인정을 버릴 수야 없겠지만, 원래가 시적으로 이루어진 여행이니 비인정을 하는 김에 되도록 절약하여 거기까지는 이르고 싶다. (……) 나도 앞으로 만나는 사람을, 농사꾼이든 장사꾼이든 면서기든 할아범이든 할멈이든 모두 대자연의 점경(點景)으로 그려진 것이라 가정하고 보려고 한다. 하긴 그림 속의 인물과 달리 그들은 각자 멋대로 행동할 것이다. 보통의 소설가들처럼 멋대로 된 행동의 근본을 캐고 들어 심리작용에 간섭하거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따지고 들어서는 속된 일이 된다. 움직여도 상관없다. 그림 속의 인간이 움직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소세키의 비인정은 말을 바꾸면 ‘미적 생활’을 의미하는데 그때의 ‘미적’을 ‘속세의 상점’의 잣대로 재어서는 속되게 된다. 여기서 ‘미적’은 ‘초연’이라는 의미이다. 소세키는 『풀베개』를 쓰기 전에 『초사』를 탐독하였다고 한다. 그래서『풀베개』에 넘쳐흐르는 무수한 한시적 어구 중 많은 것이 『초사』에서 유래했다. 소세키는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메이지 시대 일본의 풍경을 기술하기 위해 기원전 4세기 문인의 어법을 먼저 배웠다. 이 ‘거리감’이 아마도 소세키의 ‘미적’인 것의 진수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논문을 쓰기 전에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파라락 넘기면서 읽는 것이 습관이라고 어딘가에 썼다. 이러한 ‘책 고르기’ 센스에 나는 깊은 공감을 느낀다. 마르크스의 전 저작 중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 가장 (소세키적 의미에서) ‘비인정’스러운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조국인 독일의 계급투쟁을 뜨겁게 논한 게 아니라 영국 대영도서관의 어스레한 열람실에서 이웃 나라 프랑스의 계급투쟁에 대해 쿨한 분석을 하면서 마르크스는 마르크스가 되었다. 도버 해협 저편에서 서로를 죽이는 프랑스인들을 “그림 속의 인간이 움직였다고 생각하면 된다”라고 비인정으로 꿰뚫어 보았을 때 마르크스의 정치적 이론이 완성되었다.

     

    소세키가 『초사』를 읽고 레비스트로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읽었다니 비인정은 아무래도 문체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비인정’을 완벽하게 알려면 ‘비인정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데 ‘비인정’이란 필경 ‘거리감’을 의미하니까 가까이 있는 동시대인의 ‘비인정 책’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먼 이국의 이미 죽은 자의 책 중에서 찾는 것이 이치일 것이다.

     

    (pp. 123~128)

     

    국운이 강성하고 평화와 번영을 윤택하게 누릴 때는 그런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국운이 쇠퇴하고 중앙정부의 힘이 저하하고 국민적인 통합이 붕괴될 때는 ‘국가 따위 어차피 사적인 환상이기 때문에’와 같은 ‘올바른 냉소주의’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럴 때는 ‘잘못된 허리띠 졸라매기’가 요구된다.

     

    “시대의 추세가 바뀌면 나라는 때로는 번영하고 때로는 쇠퇴한다. 나라의 운이 쇠약할 때는 “더 이상 멈춰 세울 수가 없다”, “멸망이 확실해졌다”고 해도 혹여 만에 하나 다시 한 번 국운이 회복하는 것은 아닌가…… 기대하고 실제로 나라가 망할 때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다가 마지막에야 역시 무리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이것은 자연스러운 인정 과정이다. 국운이 쇠퇴하고 미약해져서 적국에 더 이상 승산이 없더라도 사력을 다해서 싸운다. “이제 100퍼센트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 비로소 강화 교섭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나라와 함께 망하는 것이 국민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다. 이것을 속되게 말하면 ‘허리띠 졸라매기’(오기 부리기)이다. 강대국과 대치하였을 때 약소국의 백성이 취할 길은 이것밖에 없다. 오기라도 부리지 않으면 약소국에는 서야 할 발판이 없다. 단순히 전쟁의 승패뿐 아니라 평시 외교에서도 약소국의 국민은 ‘허리띠 졸라매기’의 한 수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 그 방법으로 겨우 나라의 체면을 지키는 것이다.”

     

    입국(立國)은 사정(私情)이다. 허리띠 졸라매기는 더욱 개인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없이는 쇠퇴하는 국가를 지탱할 수 없다.

     

    ‘허리띠 졸라매기’는 사사로운 정에 유래하는 것이라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어리석은 행위는 없다. 그러나 세계를 돌아보면 ‘국가’라는 형태를 유지하려고 하면 어딘가에서 허리띠를 졸라맬 수 밖에 없다.

     

    사사로운 일을 공공의 일로 바꾸는 것은 사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다.

     

    후쿠자와는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후쿠자와가 이런 말을 했을 때의 문맥을 놓쳐서는 안 된다. 후쿠자와는 일반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논고에는 수신인이 있다. 이 글의 수신인은 일반 국민이 아니다. 가쓰 가이슈와 에노모토 다케아키라는 두 신료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서신이다.

     

    후쿠자와는 걸출한 두 인물이 막부의 신하이면서 은혜를 잊고 신정부로 옮겨 탄 것을 비난하며 이 글을 썼다. 가쓰 가이슈와 에노모토 다케아키 같은 인간은 ‘냉소적인 정론’을 말해서는 안 된다. ‘무모한 허리띠 졸라매기’를 보여서 백년국민의 모범이 될 의무가 있다.

     

    롤 모델이 없으면 공동체는 지속하지 못한다고 후쿠자와는 말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신들은 할 수 있다. 인간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 허리띠 졸라매기를 하는 사람은 결코 그런 말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 허리띠 졸라매기를 하는 것은 ‘우리’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만 허리띠를 졸라매서 그걸로 어떻게든 된다면 다른 이들은 마음 편히 지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외일지 모르겠지만 허리띠 졸라매기의 동력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상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pp. 208~213)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에는 데키주쿠에서 난학(네덜란드학)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 쓰여 있습니다. 데키주쿠는 오가타 코안이 운영하던 작은 사숙이었는데, 그곳에서 수천 명의 청년들이 기숙생활을 하면서 좁은 곳에 빽빽이 모여 미친 듯이 공부했습니다. 어느 날 후쿠자와 유키치가 감기에 걸려서 너무 몸 상태가 나빴는데 자려고 베개를 찾으니 베개가 없었습니다. 왜 베개가 없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최근 1년 반 동안 한 번도 베개를 베고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일 공부하다가 기절하듯이 책상에 엎드려서 잠을 잤기 때문에 누워서 자 본 적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맹렬한 기세로 공부했는데, 그렇다고 당시 네덜란드어에 대해 사회적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맹렬하게 공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도 시대라면 난학자는 아직 다이묘라든지 막부의 관료로 등용될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오사카에서는 난학자 구인은 말 그대로 제로였습니다. 즉 데키주쿠의 학생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취직’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은 채로 공부에만 열중했습니다. 난학을 공부하면 임관이 보장된다든지 돈이 된다든지 하는, 노력과 보상 사이의 상관관계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니, 상관이 없으니까 공부를 한 겁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고학(苦學)을 하느냐고 물어도 대답할 말이 없다. 명예를 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난학 서생이라고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할 뿐인지라 이미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있었다. 오로지 밤낮으로 고생하며 어려운 원서를 읽고 좋아할 뿐 정말로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당시 서생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었다. 그 즐거움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것이다. 서양의 새로운 문명이 기록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일본 전국에서 우리밖에 없다, 우리 동료들만 가능한 일이다 하면서, 가난하고 고생스럽게 조의조식(粗衣粗食), 언뜻 보기에는 볼품없이 초라한 서생이지만, 왕성한 지식과 고고한 사상만큼은 왕족귀인을 눈 아래로 내려다 볼 정도였다. 그저 어려운 것은 즐거운 것이라며 고중유락(苦中有樂), 고즉락(苦卽樂)의 경지였던 듯하다. 말하자면 이 약이 어떤 병에 잘 듣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외에 이렇게 쓴 약을 먹는 자는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어떤 병인지 묻지도 않고 그저 쓰기만 하면 무작정 먹겠다는 혈기였던 것이다.”

     

    얼마나 기세등등한 이야기입니까? 그리고 이 광기 어린 서생의 공부하는 모습을 서술한 문장을 후쿠자와 유키치는 다음과 같이 매조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당시 오가타 서생들은 십중팔구 목적도 없이 고학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목적이 없는 덕분에 오히려 에도의 서생들보다 공부를 잘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서생들 역시 학문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면 오히려 학업에 지장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별 생각 없이 책만 보는 것은 가장 좋지 않다. (……) 하지만 또한 방금 말했듯이 항상 자신의 앞날만 걱정하여, 어떻게 하면 입신출세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수중에 돈이 들어올까, 어떻게 하면 멋진 집에 살면서 호의호식할 수 있을까 하는 것만 염두에 두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면학하는 중에는 그저 조용히 지내는 것이 최상일 것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저는 이 문장을 읽고 꽤 뭉클했습니다. 공부에 대한 동기가 아무것도 없을 때도 ‘이렇게 어려운 네덜란드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일본에 나밖에 없다’는 ‘어찌 보면 별 동기도 될 것 같지 않은 동기’에 매달려서 맹렬히 공부한 후쿠자와 유키치. 정말로 다기지다고 생각합니다. 배움의 동기를 높게 유지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사용하는 자세. 최종적으로 그가 채택한 것은 영리 영달도 아니고, 지적 우월도 아니고, 자신의 뇌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사실 그 자체였습니다. 그 ‘아카데믹 하이’만은 틀림없이 지금 여기서 확실히 신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 쾌감뿐입니다. 이것만큼은 다른 모든 것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자신의 지성이 최고속으로 운전하고 있을 때의 온몸을 관통해서 떨리는 듯한 쾌감, 이것만큼은 돈이 궁색해도, 장래의 직장이 없어도, 장절한 공부를 한 자만이 지금 여기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지성의 신체성’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자는 것과 같이 공부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정신 상태까지 어떻게 하면 자신을 몰아넣을 수 있을까? 그 방도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의 현장’에 있는 사람의 이른바 ‘예()’가 아닐까요?

     

    (pp. 90~95)

     

    오사카에는 가이토쿠도라는 다섯 명의 선착장 상인들이 사재를 털어 만든 유명한 사숙이 있습니다. 작은 집에서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기숙을 하다 보니 공간이 좁아서 다들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오사카의 여름은 너무 더워서 석양이 비치는 방에서 네덜란드어를 윤독할 때는 전원 다 발가벗고 윤독을 했다고 합니다.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인데요,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에 그런 묘사가 있습니다.

     

    (이상 『배움엔 끝이 없다』 pp. 245)

     

     

    점점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데 이 사람의 군학(軍學) 스승은 야마다 모헤이라는 양반으로 “언젠가 남자가 남근이 있는 탓에 여색에 빠져서 뜻을 세우지 못한다면 남근을 잘라버려라”고 말하는 과격한 사람이었다 보니 파격적인 문하생이 배출되는 것도 납득할 수 있다.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pp.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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