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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Three-Body Problem
    인용 2024. 4. 21. 11:46

    빛과 어둠이 하나가 됩니다. - 미야자키 하야오

     

     

    구르지예프가 쓴 《삶이란 오직 ‘내가 나’일 때만 진정한 것이 된다》에는 고비 사막의 남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옝기사르(Yangihissar) 현 근처에서 요양하던 중에 그에게 찾아온 계시(epiphany)의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그가 머물던 곳은 한 방향으로는 비옥하고, 다른 방향으로는 생명을 앗아가는 완전한 불모지인 독특한 장소였다. 구르지예프는 이 장소에 관해 “천국과 지옥이 정말로 존재해서 각기 어떤 힘을 방사(放射)한다면, 그 두 원천 사이의 공간을 채운 공기는 바로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구르지예프에 의하면 공기는 ‘두 번째 양식’(second food)이었고, 그가 가 있던 장소의 공기는 ‘천국과 지옥의 두 힘 사이에서 변용된 상태였던’ 탓에 당시 음울한 명상에 빠져 있던 그의 내부에 특수한 성질을 가진 ‘자기 추론’(self-reasoning)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구르지예프는 사막의 오아시스 근처에서 야영하고 있었다. 황무지의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이곳에서 ‘가공할 만한 정적’과, 가축과 사람들이 내는 떠들썩한 소음으로 가득 찬 ‘온갖 형태의 삶들’ 사이에 끼어 있었던 구르지예프는 스스로의 내면에서 ‘유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중대한 능력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실수와 실책을 거듭하며 진리를 탐구하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새롭고 객관적인 명징함을 통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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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우주의 비유(universal analogy)를 써보면 어떨까?’

     

    이 분야에 대해서 그는 이미 숙고를 거듭해왔고, ‘세계의 창조와 세계의 유지’에 관해서 알아낼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샅샅이 조사해 보지 않았는가. 세계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었고, 무엇이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가에 관해서 말이다. 결국 이것은 우주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고, 어떤 에너지들이 그 물질적 형태를 지속적으로 재창조하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였다.

     

    그렇다면, 바로 그런 우주에 도움을 요청해도 좋지 않을까? “위에서 그러하듯이, 아래도 그렇노라”(As above, so below)라는 유명한 격언도 있지 않은가. 인간은 글자 그대로 소우주다.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어졌다. 신이 정말로 인간처럼 생겼고, 두 발로 걷는 영장류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신은 존재의 최고점이며, 우주의 정점에 해당하는 존재다.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우리도 각자의 내우주(內宇宙)에서는 신이다. “신과 나 자신의 차이는 오직 규모의 차이에 불과하며… 나 자신의 규모에서 나는 모종의 신적 존재일 필요가 있다.”

     

    구르지예프는 ‘자기 기억하기’를 성립시키기 위해 어떤 요인을 도입함으로써 의식적이고,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객관적인 ‘양심’의 인도를 받는 선택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각성한 존재가 될 필요가 있었다. 신은 인간이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비유적인 의미에서) ‘악마’라는 형태의 인자를 창조했다. 신화에 의하면 신은 세계에 그 자신의 천사 중 한 명인 루시퍼ー무슬림 전승에서는 이블리스(Iblis)라고 불리는ー를 이식했다. 루시퍼가 ‘유혹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아래를 향해 밀어붙이는 힘을 제공하면, 인간은 이 ‘악마’의 도전에 저항하기 위해 위를 향해 올라가는 힘을 제공할 테니 말이다. 악마와 인간이 제공하는 이 두 반대되는 극()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으로 제3의 힘이 나타나고, 신은 이 특정 에너지를 이용해서 우주(cosmos)의 조화를 유지한다.

     

    구르지예프는 내우주의 신으로서 그 자신도 ‘악마’를, 의식적으로 싸워야 하는 ‘유혹자’를 임명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그도 그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인자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저열한 충동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저항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노력하면, 이 상호작용을 통한 대립에서 발생한 정제된 에너지는 그를 깎아지른 듯한 내면의 길 위로 계속 밀어올려줄 것이다.

     

    그래서 구르지예프는 “내가 알고 있는 마음의 한 상태에서, 나 자신의 본질 앞에서” 서약했다. 《삶이란 오직 ‘내가 나’일 때만 진정한 것이 된다》에 의하면, 그는 “내게 주어진 이 ‘속성’을 절대로 쓰지 않음으로써 나의 악덕 대부분을 완전히 끊겠다”고 맹세했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면서, 이 소중한 ‘속성’에 대한 나의 이 결의는 언제나 나를 상기시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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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르지예프는 사막의 오아시스 근처의 공기를 “연옥 같다(purgatorial)”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맞는 말이다. 그 공기는 그의 내부에 있는 불순함을 제거해주었던 데다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던 그는 일종의 연옥 같은 장소에 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 그런 환경이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 묘사는 상징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구르지예프의 철학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비주의의 ‘영적 연금술’에서도 진정한 진보는 중간에 위치한 장소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유혹을, 충동을, 부정적인 반응을 의식적으로 감수하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단지 느끼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이럴 경우 ‘예’와 ‘아니오’ 사이에서 일종의 마찰이 발생하고, 이 마찰로부터 생겨나는 에너지 내지는 ‘질료(substance)’는 진정한 존재를 창조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서로 반발하는 내적인 힘들ー하나는 상대적으로 높은 차원(천국)에서, 다른 하나는 낮은 차원(지옥)에서 흘러나오는ー의 상호 침투를 의식적으로 조장함으로써, 구르지예프가 말했듯이 “고차와 저차를 융합시켜서 중간을 현실화하는 행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 ‘대결’은 (여기서 대결이란 실제로는 적절한 분극화로부터 발생하는 일종의 협력 내지는 혼합을 의미한다) 구르지예프가 원하던 ‘충격’을 제공할 수 있고, 이 ‘충격’을 통해 그는 수행자가 영적인 성장의 옥타브를 따라 상승할 때 맞닥뜨리기 마련인 ‘간극’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구르지예프는 이 맹세를 “나 자신의 본질(essence) 앞에서” 했다고 고백했다. 바꿔 말해서, 그의 맹세는 자기 존재의 가장 깊고 실존적인 측면을 향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이 맹세를 한 뒤에 그는 다시 에너지를 얻고 “환생했다”라고 술회했다. 이것은 “다시 태어났다”는 언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받은 계시에 관한 일화는 최상에 가까운, 상대적으로 높은 존재의 각성 상태에서 도달한 고매한 목적을 의식적으로 유지한다는 행위와 굴곡으로 점철된 일상의 삶에서 우리가 보이는 실제 행동 사이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구르지예프 철학의 토대를 이루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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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훗날 구르지예프는 인생에서 세 번째가 되는 유탄을 맞고 부상한 후 요양을 하기 위해 같은 지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에 앞서 그는 티베트로 돌아갔다. (…) 제임스 무어의 전기에 의하면, 영허즈번드가 반란 진압을 명목으로 위대한 라마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구르지예프는 혐오와 경멸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구르지예프가 필생의 목표였던 진리 탐구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목표를 설정한 것은 이때였다. 그는 인류의 호전적인 성질을 이해함으로써 전쟁이라는 집단 폭력을 유발하는 ‘집단 최면’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구르지예프는 맹세했다.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수준까지 인류 전체를 각성시키겠노라고.

     

     

    구르지예프에게 총을 쏜 장본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전형적이면서도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총탄을 쏜 것은 ‘국가라는 정신병’에 걸린 러시아인들일 수도 있고, ‘혁명이라는 정신병’에 걸린 혁명가들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구르지예프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에서 올바른 진영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는 서로를 죽이려는 광인들과 십자 포화에 휘말려 희생당하는 죄없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구르지예프가 세 번이나 유탄을 맞고 부상했다는 사실을 기이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측면에서는 딱히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인간의 에너지가 용솟음치고 해방되는 장소들로 자연스럽게 이끌렸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그는 집단 암시라는 끔찍한 상태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연구할 수 있었지만, 전쟁이나 사회적 소요가 발생한 지역에서 총탄이 오고 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인류의 백주몽에 희생된 이들의 상징으로 스스로를 간주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좀더 실제적인 효과를 논하자면, 세 번의 부상은 구르지예프의 건강과 결의를 시험하는 도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전쟁’이라는 현상 자체가 그를 두려워하고, 죽이려는 듯한 느낌이랄까.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그는 죽지 않았고, 단념하지도 않았으므로, 그의 의지와 영적 존재력은 부상을 입고 가까스로 회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증대했다고 보는 쪽이 타당하다.

     

    회복과 요양을 하기 위해 옝기사르 현에 머물던 구르지예프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수피 공동체에서 2년을 더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얻은 깨달음을 통합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ー 존 셜리, 『인간이라는 기계에 관하여』, 김상훈 옮김, 정신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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