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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학만 죽어라 파고든 너도 결국 실업자니까.” (소설가 김진명)
    인용 2024. 4. 11. 22:00

    “인문학만 죽어라 파고든 너도 결국 실업자니까.”

     

    형연은 은하수의 날 선 비난에도 신경 하나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대신 인문학 공부는 돈이나 지위 같은 다른 힘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힘을 가져다 줘. 바로 내면의 힘이지. 눈에 바로 보이지는 않지만 가지면 가질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자신감이 차오르며 삶이 떳떳하고 행복해져. 나는 돈을 많이 안 벌겠다, 조금 벌고 그 대신 검소하게 살겠다, 그리고 남는 시간과 열정을 더 의미 있는 일에 쏟겠다고 생각하는 거지.”

     

    “좋게 들리기는 한다만 그게 그리 쉽게 될까?”

     

    “불안하지. 하지만 인문학이 깊어지면 불안이 인간의 존재조건임을 알게 돼. 인간이란 어차피 불안에 시달리며 살게 되어 있다는 말이야. 그래서 당황하거나 극단적으로 반응하지 않아. 오히려 실패와 푸대접을 즐기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소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자아의 품위를 간직하며 어려움의 한복판에서 오히려 상대를 위해 베풀기도 해. 일을 할 때도 과정의 진실에 천착하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에 덜 좌우돼.”

     

    (…)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모두가 싫어하겠지. 어째서 안정을 깨느냐고. 조용히 살아갈 수는 없겠냐고.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삶을 살아야만 해. 누군가는 계속 돌을 던져야만 해.”

     

    ✳︎

     

    형연은 이상한 학생이었다. 둘은 함께 한 학기 내내 모의재판을 진행하는 실습 위주 강의를 함께 들었는데, 언제나 날카로운 논리를 펼쳐 박수를 받는 은하수와는 달리 그는 재판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은하수가 봤을 때 그의 변론은 법의 논리와 한참 멀어져 있었다. 때로는 작은 범죄에 너무나 강한 엄벌을 주장했으며 또 흉악한 범죄에 한없이 너그러운 변론을 하기도 했다. 전혀 기준점이 없는 뒤죽박죽이었다.

     

    (…)

     

    이것이 옳다, 무슨 소리냐 저것이 옳다며 모두가 신이 나 떠들었지만, 형연은 언제나 말이 없었다. 학생들이 너의 생각이 어떠냐고 물을 때마다 자기는 잘 모르니까 듣고만 있겠다고 했던 그의 모습에 은하수는 적이 실망했었다. 법 공부야 그렇다 쳐도 신념도 없고 자기 의견도 말하지 못하는 모습이 답답하고 한심했다.

     

    마침내 북한에 도착해 대장정의 막을 내릴 때, 대장정에 참가한 학생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사진에 잘 나올 수 있을까 고민했다. 신문 기자들이 대거 촬영을 나왔다는 사실에 여학생들은 땀범벅이 된 와중에도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돈했고 남학생들은 서로 각자 앞에 서겠다며 자리싸움을 했다. 그 어수선하고 떠들썩한 사이, 슬그머니 움직인 형연은 일렬로 늘어서 기계적으로 박수를 쳐대던 북한 주민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적잖이 당황한 북한 주민 한 명을 덥석 껴안았다.

     

    ✳︎

     

    “그렇지. 나도 나이를 꽤 먹고서야 느끼던 부분이야. 단지 머리에 든 게 많다거나 말주변이 좋다고 대단한 게 아니더군. 말로 내뱉은 걸 지킬 수 있는 진짜 힘이 필요해.”

     

    대통령은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경직되지 않은 시선을 갖고 세상의 일을 여러 각도로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

     

    “인구 소멸, 너무나 익숙한 말입니다. 너무나 흔히 보이고 너무나 흔히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통령님, 저는 이 말을 진심으로 생각해 본 날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비어가고 있습니다. 학교도, 회사도, 한국이 점점 없어지고 있습니다. (…) 그런데 어째서 아무것도 안 하십니까? 정권을 잡고 있는 동안 효력을 거둘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대통령님의 업적으로 남지 않기 때문입니까? 바로 그렇게 모든 정권이 외면했기에 이런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대통령님 탓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통령님의 책임입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일이야말로 바로 대통령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 어쩌면 어떤 공치사도 만류도 없는 이 담담한 악수야말로 대통령의 배려일지 모른다 생각하여 은하수는 대통령의 손을 잡았다.

     

    “김은하수 행정관.”

     

    그리고 다음 순간 대통령은 힘주어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예상치 못한 물음을 던져왔다.

     

    “인구 문제, 혹시 따로 생각한 해답이 있나?”


    기미히토 법사는 보기 드물게 크게 깨우친 선승이었다. 본시 승려의 아들인 그는 젊은 시절 일상 및 민속과 결합한 일본불교를 떠나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끝에 한국에 들어와 송광사를 거쳐 해인사에 정착해 수도에 몰입했다.

     

    그는 8년 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공력을 쌓았다. 하루 땅콩 여섯 알과 솔잎만 먹고 살아 입술과 혀가 녹색으로 변했으며,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아 몸에서 소리가 사라지기도 했다.

     

    천둥과 번개가 온 하늘을 떨어 울리던 날 새벽 무렵에 그는 가야산 계곡 어느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감정과 욕망의 흐름으로부터 헤어났으며 무의식 깊은 곳으로부터 일어나는 본능조차 잠재웠다. 그리하여 더위도 추위도 느끼지 않으며 천 길 낭떠러지 앞에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단계에 올라섰고 그 절정의 순간에 벽력처럼 토해낸 한마디가 ‘무()’였다.

     

    . 수행하는 모든 이들이 여기에 이르고자 평생을 바치고는 했다. 아무것도 없으니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아 순수한 정신세계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단계. 하늘도 없고 땅도 없고 우주도 없는 그야말로 세상 모든 것이 없어지는 단계였다.

     

     

    해인사의 많은 승려들이 8년간의 장좌불와(長坐不臥) 수련을 거쳐 마침내 열반에 이른 기미히토를 스승으로 여기고 가르침을 청했지만, 뜻밖에도 그는 열반에 든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스스로 파계승이 되고 말았다. 노상 술을 퍼마시고 심지어 혼례를 올리겠다며 색시를 찾아다니던 그는 어느 날 바위에 누워있다가 눈앞을 지나가는 수도승을 불러 세웠다.

     

    “어찌 부르셨는지요?”

     

    “너는 왜 도를 닦느냐?”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기미히토는 바위에서 내려와 땅에서 나무 막대를 주워 들더니 허공에 대고 이리저리 휘둘렀다. 글자를 쓰는 것 같기도 그림을 그리는 것 같기도 한 동작이었다.

     

    “깨달음이란 아무것도 아니야. 밥만 안 먹으면 다다를 수 있어. 나는 번쩍하는 순간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부처? 그건 같잖은 착각이었어. 나는 부처는커녕 그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야. 왜 못 따라가는지 아나?”

     

    “저는 아예 깨달음에 다가가지도 못했으니…….”

     

    “부처는 부처의 시대에 도를 이루었기 때문에 부처야. 만약 부처가 지금 시대에 태어났어도 황야에서 수십일 굶고 부처가 되었을까? 절대 안 돼. 워낙 난 양반이니 뭐 다른 길을 찾아도 찾았겠지. 지금 세상에 다 비우고 다 버리고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그럼 도를 닦지 말아야 할까요?”

     

    기미히토는 손에 든 나무 막대를 높이 들고는 수도승의 머리통을 세게 내리쳤다. 어찌나 아팠는지 수도승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스승님!”

     

    “고놈 머리통이 얼마나 깨끗한지 목탁보다 더 깨끗한 소리가 나는구나.”

     

    “…….”

     

    “이놈아, 밥이나 처먹고 똥이나 싸면서 살아. 그러다가 심심하면 남이나 돕든지. 부처나 예수나 결국 남을 위해 살라는 거잖아. 뭘 깨치려 들고 그래. 그러니까 설익은 놈들이 헛짓거리나 해대고 그러는 거야. 다 헛것이야. 나쁜 일 안 하고 남 돕고 같이 잘 사는 게 열반이야.”

     

    이렇듯 기미히토는 끊임없이 자신을 세속으로 던지며 알 수 없는 말만 해대고 괴상한 짓을 일삼더니 어느 날 쪽지 한 장 남겨 놓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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