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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고는 ... 즐거운 표정으로 아니라고 말한다.
    인용 2024. 4. 11. 21:28

    방황을 하다 보니 그는 군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군대는 그를 한국으로 보냈다. 그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거기에는 단편적 영상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배의 뱃머리에서 보았던 성벽의 영상이다. 안개 낀 항구를 가로질러 보이던 성벽, 마치 천국으로 향하는 문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던 그 성벽의 영상이 그의 기억에 단편으로 남아 있다. 이 영상을 그는 소중하게 여기고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머리에 떠올리곤 했던 것이 틀림없다. 비록 다른 어떤 것과도 연결이 되어 있지 않지만, 그 영상에 대한 기억은 너무도 강렬한 것이어서 나 자신도 수없이 이를 머릿속에 떠올리곤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전환점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보낸 그의 편지들을 보면, 그가 이전에 썼던 것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 역시 동일한 전환점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편지들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지 넘쳐흐르는 감성이다. 그는 그가 본 사물들을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하게 묘사하는 글을 몇 장이고 계속해서 써내려가고 있다. 시장, 미닫이 유리창이 있는 가게, 기와지붕, 도로, 초가집 등등 모든 것에 대한 기록이 편지에 담겨 있다. 때로는 더할 수 없는 열광으로 가득 차 있고, 때로는 우울한 마음이, 때로는 분노가, 때로는 익살이 담긴 그의 편지들을 보면, 그를 가두고 있다고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우리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찾은 사람 또는 짐승과도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이면 모든 것을 몽땅 시각적 이미지로 계속해서 흡수하면서 열에 들뜬 듯 온 지방을 돌아다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그는 한국인 노무자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약간의 영어를 말할 줄 알지만 좀더 많이 배워서 통역관으로 자격을 얻고자 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는 근무 시간 후에는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으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은 장거리 주말 등산 자리에 그를 초청했다. 등산을 함께 다니면서 그들은 그에게 자신들이 사는 집과 친구들을 보여주기도 했고, 또 이질적인 문화의 생활 방식과 생각을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아름다운 언덕의 기슭에 있는 오솔길 길가에 앉아, 그는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오솔길 아래쪽에 있는 계단식 논에는 벼가 자랄 대로 자라 누런빛을 띠고 있다. 그의 한국인 친구들은 그와 함께 앉아 해안에서 저 멀리 떨어진 섬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가져온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또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표의 문자 및 표의 문자와 세계 사이의 관계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들이 현재 공부하고 있는 스물여섯 개의 기호로 묘사할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가에 대해 그가 말한다. 그의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고는, 도시락 통에 가져온 음식을 먹으면서 즐거운 표정으로 아니라고 말한다.

     

    긍정을 뜻하는 고개의 끄덕임과 아니라는 부정의 말 때문에 혼란스러워 그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그러자 긍정을 뜻하는 고개의 끄덕임과 아니라는 부정의 말이 그들한테서 다시 한 번 나온다. 이것이 당시 정황과 관련하여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단편의 전부다. 하지만 장벽에 대한 기억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기억이 수없이 되풀이하여 그의 머리를 스치곤 한다.

     

     

    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장경렬 옮김, 2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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