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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를 시작하며 드리는 말씀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5. 9. 15:13

    독자 여러분, 처음 뵙겠습니다. 우치다 다쓰루라고 합니다. 이번 달부터 『형설시대』에 글을 싣게 되었습니다. 십 대 연령층에 직접 말을 붙이는 건 어쨌든 평소에는 못하는 귀중한 기회이므로,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귀중한 기회’로 여기는지, 첫 시간에 써놓고자 합니다.

     

    저는 문장을 쓸 때는 받는 이에 해당하는 ‘상정 독자’에 관해선 될 수 있는 한 높은 해상도를 가진 이미지를 마음에 담아두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글월이 전해지도록’ 씁니다. 여기서 주의하실 점은 ‘글월이 전해진다’는 것과 ‘이해받는’ 것은 다른 차원의 사건이라는 겁니다. ‘이해가 잘되는 말’이라도 전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도 전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받는 이’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편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뜻깊은 내용이 쓰인 우편물이라 할지라도, 겉봉에 받는 이가 쓰여 있지 않으면, 누구도 읽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말로 놀라운 일인데, 그 메시지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게 자기한테 온 건지 아닌지의 여부를, 불쑥하는 순간에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아브라함 앞에 ‘주님(Adonai; The LORD; 하느님 - 옮긴이)’이 나타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님’은 초월적인* 존재이므로, 인간의 모습 같은 걸 하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구름 기둥, 번개, 불붙은 떨기나무 같은 그런 놀랄 만한 표상을 통해 출현합니다. 당연히, 인어(人語) 또한 구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잘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이 ‘아, 「주님」이 내려와 내게 말을 걸었다’라고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경탄해 마지않을 모습을 한 무언가로부터, 인어(人語)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굉음(아마도)이 전해졌을 뿐이니까요.

    (* 원문 この世ならざる: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 세상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전생에서 왔거나 내세까지 있는. 히브리어 “JHWH”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 – 옮긴이)

     

    하지만, 아브라함은 ‘주님’으로부터 ‘너는 네가 태어난 고향과 친척과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메시지를 똑바로 수신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요?

     

    이건 제 개인적인 견해로서, 그리스도교가 공인한 정통 교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수신했던 건 ‘주님’이 발한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이건 자신에게 온 메시지다’라는 사실이었다고 저는 생각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잡음이 낀 라디오 방송을 수신하는 것과 같은 경험입니다. 자기가 가진 라디오가 어떤 전파를 딱 수신했습니다. 이제 어떡하지? 일단은 재조정해 봅니다. 라디오를 손에 들고 걸어 다니며, 조금이라도 음질이 선명해질 만한 장소를 찾아다니는 거지요. ‘주님’이 아브라함한테 전한 언어는 ‘조율하라’는 명령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파동을 신체에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세를 바꾼다든지 삶의 방식을 바꾼다면, 그렇게 한다면 보다 선명하게 수신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기한테 온 어떤 메시지를 수신했다 싶은 그 인간은 탐색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면 메시지가 좀 더 깨끗이 들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직감적으로요. 이 직감은 온갖 커뮤니케이션의 근원에 존재하는 요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만 한 나이 때에 정말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여남은이나마 ‘조율하면 잘 들릴 것 같은 책’과 만났습니다. 무엇이 쓰여 있는지 전혀 종잡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여기가 아닌 다른 장소에 가서,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따른다면 알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실제로 그러하였습니다. 따라서, 이걸 여태껏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이 지금 당장 이해해 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수신인인지 아닌지’는 당장 음미해 보십시오. (『형설시대』 1월호)

     

    (2024-04-15 18:16)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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