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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관하여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5. 9. 19:04
저는 종종 강연 요청을 받고는 합니다. 마음에 돌덩이를 얹은 듯한 기분이 어딜 가나 들더군요. 청중의 대다수가 어르신들인 겁니다. 젊은이가 눈에 띄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고지(告知)가 젊은 사람들의 마음에 확 안 와닿나 싶기도 합니다(제목부터 ‘노인대학’이라든가 ‘호헌 모임’* 이래버리면 젊은 사람들은 외면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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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일본은 4~50대만 되어도 반쯤은 정치적 무관심 내지는 우경화되어 있는 것 같다 - 옮긴이)
그러나 제가 얘기하는 것들은 젊은 사람이야말로 들어주기를 바라는 주제들입니다. 인구감소 사회 아래 살아남는 일자리란 어떤 형태인가가 그렇고, 양극화 사회 아래 어떻게 약자를 위해 서로 돕는 시스템을 구축할 것인가가 그러하며, 포스트 자본주의 시대의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는가 등등, 꼬집어 말해 보면 ‘70세 이상의 인간한테는 그다지 상관없는 이야기(그야, 좀 있으면 숟가락 놓을 테니까요)’라서, 젊은이의 미래에 절실하게 다가가는 것일 텐데도, 정작 발등에 불 떨어진 젊은이는 들으러 오지 않는군요.
환장할 지경입니다. 자기 미래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걸까요? 미래를 생각하자니, 뭔지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으니까, 될 수 있는 한 앞날은 생각하지 않겠다, 아마 그런 심산인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드림 하라스먼트*』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대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네 꿈이 뭐니?’ ‘10년 후에 넌 뭐 하고 있을 것 같니?’ 같은 유형의 질문을 받고서 갑갑증을 느끼는 현상을 분석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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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어에서 곧잘 쓰이는 ‘하라스먼트’는, 일반적인 용법으로는 ‘가스라이팅’과 거의 통하는 것 같다 – 옮긴이)
이상하죠, 그죠? ‘꿈 말하기’라는 건, 즐거운 작업이어야 할 텐데요. 그런데 그래 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미래에 관해 생각하는 데 고통을 느낍니다. 그걸 억지로 말하게 하면 어쩔 수 없이 ‘대기업에서 일한다’든가 ‘공무원이 된다’든가 ‘토익 점수를 올려 유학 가겠다’와 같이 대답합니다. 근데, 그런 건 한참이나 ‘현실적인 꿈’ 아닌가요? 그리고 ‘현실적인 꿈’은 이제 ‘꿈’이 아니라, 단순히 ‘이력서에 관한 계획’에 가까울 겁니다. 꿈이라는 건, 원래는 좀 더 분방하고, 와일드하며, 비논리적이어야 하는 것 아니었던가요? 도대체 언제부터 ‘향후 계획’이 ‘꿈’으로 바꿔치기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자아* 찾기’라는 교육 목표 역시, 젊은이들의 ‘미래를 응시하는**’ 의욕을 현저히 저하시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자아 찾기’라는 말이 등장했던 건 1997년 경입니다. ‘자아 찾기 여행을 지원하는’ 게 학교 교육의 목표로 내걸리고, 교사, 부모, 학생들 할 것 없이 이에 대해 입방아를 찧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왠지 학교가 굉장히 숨 막히는 장소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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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自分; 자기 자신 - 옮긴이)
(** 영어 stare에는 호기심에 동해 빤히 쳐다본다는 뜻이 있음 – 옮긴이)
왜냐하면 말이죠, ‘자아 찾기’이니만큼 눈에 들어오는 건 ‘자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진짜로 누구인지를 ‘먼저’ 알게끔 하는 게 우선적인 교육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여러분은 이러면 안 됩니다.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는, 어떤 걸 한 뒤밖에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작품’을 통해, 사후적으로 ‘이러한 작품을 기어이 만들어내는 경향을 가진 사람’으로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압니다. 원래 그런 겁니다. 뭔가를 만들어보기까지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아직 아무것도 만들지 않은 단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봤자, 알 수 없습니다. 움직여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작품을 만들어 보고 나서야 자신이 어떤 작품을 만드는 인간인지를 압니다. 마음을 다잡고서 ‘허이야’ 하고, 딱 고만큼만 저질러서, 미래에 몸을 던져보지 않으면, 자기가 진짜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도, 자기가 진짜로 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한테는 여러분의 미래를 바라보기를 바라는 겁니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는 거기에다가 몸을 던지는 거, 아시겠죠? (『형설시대』 3월호)
(2024-04-15 18:1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부록】
승자는 먼저 달리기 시작하면서 계산을 하지만 패자는 달리기도 전에 계산부터 먼저 하느라 바쁘다(유대경전에 나오는 말인데 정말 진리이다). - 『세이노의 가르침』 (1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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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내가 젊었을 적의 키워드는 '앙가주망'이었다. (...) 그래서 나 역시 "대시해 보라고. 가서 말하라고. 거봐 말 못 하잖아. 완전 망한거야 넌. 어딜 궁시렁대?" 같은 식으로 캠퍼스 여기저기에 상당히 말을 막 하고 다닌 지라, 수많은 동창생 여러분께는 결국 '트라우마 유발자'로 남게 된 것이다(미안해, 지금 사과해도 받아줄라나?).
<무인양품이 적응 안 되는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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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ー "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2011)연애전선 양극화에 이의 제기!
강자만이 살아남는 '미팅'이 말이 되냐!?
「컁컁」 식의 여왕벌 전략에서 몽상적 저출생 정책까지, 비혼・만혼화 시대를 낱낱이 파헤친다!
비혼, 저출생, 대침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파탄만 일으켜온 '근거 없는 낙관'을 뛰어넘어, 바람직한 사회를 모색하는 자극적인 논고!
남자를 노리는 포인트는 ‘재능'이라는 말 한마디다. “당신에게는 재능이 있군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난 알아볼 수 있어요.” 눈을 칩떠보면서 45도 비스듬한 시선에 플러스, ‘가나푱(문인 중 한 분이라고 하네요 - 인용자) 포즈’를 취하면 우선 80%의 남자는 넘어온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세상 남자의 80%는 자신에게 재능이 있고, 그것이 세상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데 분노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 한마디에 맥없이 농락당한다.
(김경원 선생 역)
난 딱히 어려운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작가,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는 음악가라는 것이 논리모순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 것이다. 당신 역시 "시끄럽고, 우선 뭔가 써보기나 하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읽어보고 나서, 어느 정도나 되는 작가인지 판정할 테니까 말이야".
근로라는 것 역시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시끄럽고, 우선 뭔가 일을 해 보라고"라는 말을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고할밖에.
(2006-12-19 mardi)✳︎
"그러니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생각만 한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계획하면 못쓴다. (...) 그렇다면 마음먹은 대로 기를 쫙쫙 펴고 실행하는 수밖에 없다." - 마쓰모토 하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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