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베 신조 정권을 총결산하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5. 20. 14:24
『자민당 실패의 본질』에 수록된 인터뷰 (2021년 8월에 행해졌다). 거의 3년쯤 전 발언이기는 하나, 자민당 정치에 내재해 있는 요소에 대한 비판점으로는 지금도 성립할 수 있으리라 본다.
ー 스가 요시히데 내각의 지지율은 하락 일변도를 이어가고 있으며, 2021년 8월 각 언론사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지율이 30%대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스가 정권의 움직임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우치다 상당히 오랫동안 국내 정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최악의 부류로 꼽을 수 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내각이 날아가 버릴 사태가 2차 아베 신조 정권 이래 몇 번이나 일어났음에도, 이렇게까지 심각했던 내각은 과거에 유례가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2021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열린 평화 기념 식전에서의 총리 연설이 상징적이었습니다. 스가 총리는 한 페이지 전체를, 그러니까 핵 폐지를 지향하는 일본의 입장을 표명하는 약 120자 되는 원고를 빼놓고 읽어버렸는데, 결과적으로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 문장을 발화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가장 놀랐던 건, 그런 ‘말이 안 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읽어나갔다는 점입니다. 보통 무심코 무의미한 문장을 발하게 되면, 찝찝함을 느끼고서 말문이 막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스가 총리는 신경이 쓰인다는 낌새 하나 보이지 않고 당당히 통째로 읽었습니다. 평소에도 보좌관이 써준 메모를 그저 읽기만 할 뿐이라서, 그날도 똑같이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미가 없는 말을 입 밖에 꺼내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 엄청나게 강력한 ‘무의미 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느꼈네요.
ー항상 성의 없이 따라 읽기만 할 뿐, 뜻을 가진 말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우치다 정치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은, 국민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힘입니다. 제대로 된 정치가라면 이제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이러이러하게 평가내리는 한편 이에 따라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 국민들에게 와닿는 표현으로 말하기를 빼놓지 않는 게 상식입니다. 꼭 웅변이 아니더라도, ‘제 기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는 진솔한 마음이 있다면, 말은 전해집니다. 하지만 스가 총리는 애초에 국민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말을 전달하는’ 것보다 ‘책잡히지 않는’ 쪽을 우선시했습니다. 이는 정치가로서 치명적인 태도입니다. 관방장관이었던 시절부터 이런 불통의 자세를 ‘철벽’이라며 추켜세우고서는 국가수반에까지 옹립한 미디어, 그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ー 언동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는, 이를테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같은 경우, 대단히 교언이라는 인상을 많은 사람에게 줬습니다.
우치다 고이즈미 총리도 종종 언어에 알맹이가 없었습니다. 그 예로 “인생은 다종다양, 회사도 각양각색(연금 가입 문제가 불거졌을 때의 발언)”이라든가, “자위대가 가서 활동하는 지역, 바로 그곳이 비전투 지역(이라크 전쟁 당시 천명한 ‘비전투 지역’의 정의에 관한 질의응답)”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경우 궤변을 농하고 있는 때에는, 면피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어서 얼굴에 양심의 가책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아베와 스가 두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거의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말이 떠내려가는 것뿐이고, 주저함이란 게 없습니다. 그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식의 웅변이라는 건, 언동을 통해 국민의 이목을 끌게 만드는 딱 그만큼의 힘이 있었습니다. 거대한 반발이 있었음에도 우정 민영화나 이라크전 가담이라는 정치적 결단이 가능했던 건,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이제는 고이즈미 총리에게 핸들을 맡겨 볼까’ 하는 국민의 지지를 결집하게 시키는 딱 그 정도로 말에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베와 스가로부터는 ‘부디 저를 지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간청하는 마음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찬반에 관한 판단을 망설이고 있는 국민의 소매를 붙잡고서,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기미가 느껴지지 않는 거지요. 아무렴 자기 지지자로부터의 박수갈채는 기대하겠지만서도, 자신의 반대자나 무당파층을 설득해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지지자를 늘리려는 그런 기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ー 아베와 스가 씨 둘 다 국민적 차원의 지지율 형성에 태만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우치다 유권자 가운데 과반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더라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거가 시행되어도, 국민의 약 5할은 투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전체의 3할 정도의 지지만 받아도 선거에서는 압승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선거 제도만 보시면, 3할을 차지하는 핵심 지지층을 간수하기만 해도 국회 의석의 6할 이상을 점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힘을 들여 국민 과반수의 지지를 모으는 것보다도, 지지층에게만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겁니다. 반면 무당파층이나 반대자는 무시하면 오히려 정권 기반은 탄탄한 반석이 됩니다. 이러한 점을 지난 9년 동안 학습한 셈입니다.
ー 말하자면, 자기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한테 환심을 사는 것밖에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거군요.
우치다 정적과 자기편으로 분단해 놓고서, 자기편한테는 공적자금을 물 쓰듯 쓰고, 공권력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뒷배를 봐줍니다. 반대자가 요망하는 것들에는 ‘무응답’으로 대응하고 아무것도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베와 스가표 네포티즘(연고주의) 정치입니다. ‘모리토모’, ‘가케학원’, ‘벚꽃모임’, ‘학술회의’ 문제 전부 다 그렇습니다.
네포티즘이라는 건 개발도상국의 독재정권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박정희, 필리핀 마르코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 등, 장기간에 걸쳐 독재적인 정권을 유지했던 나라들입니다. 이 나라들은 독재자와 그 정상배들이 공금을 사유화하고, 공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나라든 일정 시점이 되면 민주화 투쟁이 일어나는데, 이는 곧 공적인 자원은 그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국민에게 균등하게 배분되어야 마땅하다는 사고방식이며, 이것이 상식으로 자리 잡는 겁니다. 그것이 근대 민주주의입니다.
하지만 아베와 스가 정권에서는 마치 개발도상국과 같은 네포티즘 정치라는 역행이 진행되었습니다. 원래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네포티즘 정치를 지속하게 되면 사회적 공정이 저해되고, 통치 기구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깨어지며, 국제 사회 속에서의 지위 저하를 불러일으킵니다. 한마디로, 국력이 낮아집니다. 이런 점들은 누구든지 알고 있었을 터였습니다. 하지만 아베와 스가 정권은 일부러 후진국형 통치 형태를 고려했습니다.
보통은 이런 정치가 계속되면 국민은 화가 나는 나머지, 선거에서 야당에 투표해 정권교체를 도모할 것입니다만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현행 정권이 들어서 행복감을 느끼는 지지층은 자기 이익을 확보하려 투표하러 가겠지요. 그런데 어떤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정치에 자신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투표에 의미를 못 느끼게 되어 결국 투표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투표율이 50%를 하회하는 동시에, 유권자 전체의 4분의 1을 약간 넘을 정도의 지지를 굳히면 선거에 압승할 수 있다는 ‘필승 방정식’이 완성되었습니다.
ー 이 두 사람이 정권을 잡으며 실현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우치다 아베 총리의 경우는 상당히 굴절되어 있습니다. 그가 절대 내려놓을 수 없었던 꿈은 ‘대일본제국의 재건’입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미국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입니다. 미국의 ‘윤허’를 얻어 대일본제국 스타일의 통치 시스템과 이데올로기를 부활시키는 것, 그것이 아베 신조의 야망입니다. 주관적으로는, 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못다 이루었던 꿈을 계승할 작정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젊은이들 16만 5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옛 적국’이라는 점입니다. 대일본제국의 군사적 재건을 미국은 자국의 안전보장상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만 미군은 일본의 자위대를 미군의 지휘 아래 자유로이 운용하고 싶어 하며,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재고로 쌓인 무기를 자위대 공여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팔아먹고 싶습니다. 따라서 한정적으로는 일본의 군비 확충을 허가하겠지만, 미군의 통제하에서의 활동밖에는 용인되지 않는다는 조건은 물릴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아베 총리의 ‘대일본제국 재건 계획’은 ‘미국의 허락을 받아서, 미국 이외의 나라와 전쟁할 권리’를 손에 넣는다고 하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그 권리만 손에 넣는다면, 국제 사회에서 약간은 ‘위세를 떨칠’ 수 있다는 겁니다. 중국이나 한국, 북한 측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건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헌법을 개정하여, ‘미국의 허락만 받으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된다면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가 올라갈 거라고 그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이 주권 국가가 아니라 미국의 군사적 속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국제 사회를 향해 다시금 커밍아웃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속국이라오!’ 하고 큰 소리로 선언하는 셈입니다. 그렇게 하면 국제 사회가 숭경(崇敬)의 염을 품고, 이웃 나라가 두려워할 거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거니까, 그의 정신세계가 상당히 혼란스럽다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국민의 기본적인 인권을 제약하고, 반정부 인사를 철저하게 푸대접하고 탄압하는 점에 있어서 아베와 스가 정권은 지극한 열성을 보여왔으며, 또한 훌륭한 실적을 올렸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미국의 허가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자국에 이익이 되겠다 싶으면 어떠한 독재자와도 손을 잡습니다. 아시아나 중남미의 독재자들이 아무리 비민주적인 정치를 행해도, 동맹국이기만 하면, 미국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의 극우가 ‘대일본제국 재건’을 위해 국내를 아무리 비민주화한다 하더라도, 미국은 말을 아낍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미국으로부터 정치적인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대일본제국의 재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계속 일본의 통치자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미국으로부터 ‘속국의 「총독」’으로 승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자니 자국의 이익보다도 미국의 국익을 우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아베는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내셔널리스트’라는 굉장히 비틀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틀림’은 일본 국민 전원이 내면 깊은 곳에서는 서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미국에 종속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자립을 이룬다’는 ‘배배 꼬인’ 국가 전략을 전후의 일본은 선택했습니다. 그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선 철저하게 미국에 종속합니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동맹국의 신뢰를 획득합니다. 그러한 연후에 미국으로부터 어느 날 ‘지금까지 수고 많았어. 앞으로는 홀로 우뚝 서서, 자기 나라는 스스로 도맡으려무나’ 하고 독자 출점을 허락받는... 그런 시나리오를 전후의 일본인은 꿈꾸어 왔습니다. 마치 가게 종업원이 주인한테 열심히 하면 할수록 ‘자립’의 날이 가까울 것이라고 믿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기이하기는 하지만 ‘미국에 더욱더 종속적인 사람일수록, 보다 더 애국적인 사람이다’라는 도식이 전후 일본에서는 성립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틀림’은 일본인 모두가 내면 깊이 공유해 왔습니다. 이렇게 일본인이 집단으로서 품어 왔던 자기기만을 아베 총리가 뛰어난 방식으로 표현해 보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가 일부 일본인으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던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스가 총리에게는 애초에 실현하고 싶었던 환상적인 비전이 없었습니다. 그가 취임하고 나서 처음으로 내건 슬로건은 ‘스스로 돕고, 공공이 돕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민에게 ‘자기 일은 스스로 해결하라. 도움이 필요하면 주위에 부탁해라. 국가에는 될 수 있는 한 기대지 말라’고 공언부터 하면서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국민에다 대고 ‘될 수 있는 한 국가를 일 시키지 마라’고 한 겁니다. 보통 정치가가 되는 이유는 국민을 위해서 무언가 ‘바람직한 일’을 하고 싶어서라는 계기를 갖기 마련인데, 그는 특별히 실현하고자 했던 정치적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가 흥미를 보였던 건 권력자의 자리에 도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한 뒷공작이나 격노가 특기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권좌에 오르게 되자 이제 무엇이 하고 싶나 생각해 보니 ‘될 수 있는 대로 국민을 위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게 가장 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ー 1955년 이래 계속되어 온 자민당의 장기 집권과 현재의 자민당 정권을 비교해 보면, 자민당 정치의 질은 어느 정도 변질된 걸까요?
우치다 55년 체제 당시 자민당에는 비둘기파에서 매파에 이르기까지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제 소싯적 빙장께서는 자민당 중의원이셨습니다. 전전에는 일본공산당 중앙 위원이셨는데,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고문받은 경험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장인의 숙부 같은 경우 전전에는 농본 파시즘에 경도되어 있었음에도, 전후에는 사회당 국회의원을 하신 겁니다. 따라서, ‘소속 정당은 다르지만, 사적으로는 서로 잘 알고 지내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그러한 인간적인 네트워크가 기반이 되어서, 55년 체제 특유의 소위 정당별 ‘국회대책위원회’가 가동된 게 아닐까요.
자민당 내부에서조차 이데올로기적인 통일성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정권이 완전히 인기 없는 정책을 펴서 지지율이 급락한 경우에도, ‘거의 정권 교체나 다름없이’, 유권자의 시선을 돌려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 내각 시절 1960년 안보 투쟁으로 국론이 양분된 뒤에는, ‘관용과 인내’, ‘소득 배증’을 내건 이케다 하야토 내각이 등장했습니다. ‘맘에 안 드는 옆 사람과도 공존하기’로 국민 융화를 꾀했습니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 시절에는 베트남 전쟁을 둘러싸고 국론이 양분되었습니다만, 차기로 등장한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은 ‘일본열도 개조론’을 내걸고 전 국민이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게끔 하는 정책으로써 국민 융화를 꾀했습니다. 분단적인 정치가 뒤에는 융화적인 정치가가 등장해 국내의 대립을 진정시키는 겁니다. 그러한 ‘사자놀음’ 같은 교묘한 술책을 구사함으로써 자민당의 장기 집권은 유지되었던 셈입니다.
ー 다나카 가쿠에이 시절에는 ‘오대 파벌’이 서로 길항하고, ‘각복전쟁’으로 불리는 사태까지 발전했습니다.
우치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대학생 시절 ‘운동’을 과격하게 했던 남자가 있습니다.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부친의 연줄로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읍소하러 갔더니 ‘자고로 젊은이는 혁명을 하겠다는 기개 정도는 있어야지’ 라는 말과 함께 취직처를 소개받았다는 모양입니다. 그는 그길로 ‘에쓰잔카이’(다나카 가쿠에이 후원회) 청년부의 열성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확실히 눈을 부라리며 ‘배제하는’ 것보다는 ‘포용하는’ 게 정치적 비용 대비 효과가 좋습니다. 이렇듯 재주를 넘는 ‘노회한 영감들’이 옛날 자민당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ー 다양한 지지층을 자민당은 일거에 끌어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당이 스스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고 말았다는 하마평도 있습니다만.
우치다 중선거구제 아래에서는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군마 제3구’라는 동일한 선거구에서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오부치 게이조가 서로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의 격렬한 선거전을 벌였습니다. 세 명이 제각기 지방조직의 충실에 힘을 기울이며 파벌 항쟁이 격화된 결과, 자민당 전체의 체질도 덩달아 튼튼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랬던 것이, 어느 시기부터 ‘파벌 정치의 폐해’라는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인물 파벌 사이에서 밀담을 교환하며 결정하는 비민주적인 프로세스라든지 ‘정치의 검은돈’이라는 추문에 국민이 염증을 느꼈으므로 그렇게 된 것도 당연하기는 합니다. 어쨌든 그런 백래시를 통해 이번에는 ‘정당이란 무릇 상의하달이 이뤄지는 단일 대오의 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당론이 나왔습니다.
소선거구제에 따라 공천권을 쥐고 있는 당 지도부에 권력이 집중되는 면도 있습니다만, 정치가 스스로 ‘정당의 바람직한 방향’에 관해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델을 채용했던 것도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전에 자민당 정치가들이 합의 형성의 모델로 삼았던 것은 바로 ‘농촌 공동체’였습니다. 농업 종사자가 일본 전체 노동자의 50%를 넘어가던 시대에 자라난 사람들이니만큼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마치 동리 회합에서 일을 결정하는 것처럼 긴 시간을 들여 합의를 도출했습니다. 하지만 전후 세대 정치가들은 이제 더 이상 농촌식 합의 형성 시스템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알고 있는 조직이라고는 주식회사뿐입니다.
주식회사에서는 합의 형성에 수고를 들이는 일 같은 건 없습니다. CEO 한 명이 경영 방침을 정하고, 그것이 아래로 시달됩니다. 상부의 의제에 동의하는 인간이 등용되고, 반대하는 인간이 배제되는 건 주식회사의 생리입니다. CEO의 경영 판단이 옳았는지 아닌지는 ‘시장’이 판단 내립니다. 종업원이 합의하여 정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상품이라도, 출시하고 나서 대박이 나고 매상이 늘며 주가가 오른다면, 그것을 결정한 CEO는 옳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시장은 틀리지 않는다’는 게 자본주의의 기본 법칙입니다.
주식회사에서는 사전에 합의 형성을 하지 않습니다. 상부에 결정권을 부여하고, 사후에 실적을 통해 결정의 적합성 여부를 판단합니다. 어느 시기부터 정치가와 미디어가 한목소리로, 뭐라고 할까 ‘민간 기업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 운운하며 틀에 박힌 말을 꺼내게 되었습니다만, 그건 말하자면 ‘주식회사적이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줄곧 주식회사 같은 조직 이외에는 본 적 없는 사람은 ‘조직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믿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정당이나 공공기관, 학교나 병원 모두 주식회사처럼 탈바꿈하려 듭니다.
자민당 또한 어느 시기부터 ‘정당을 주식회사처럼 조직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다수파가 되었습니다. 상부에 전권을 위임하고, 또한 상부는 자신의 안건에 전부 거수해 찬성의 뜻을 표해 주는 ‘동료들’ 내지는 ‘맘에 드는 사람들’을 중용하면서, 반대 의견을 말한다든지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인간은 정치인이든 공무원이든 멀리하게 됩니다. 그렇게 9년이 지나고 보니, 위로부터 아래까지 ‘예스맨’들만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ー 당의 ‘주식회사화’는 어느 시점에 시작된 것일까요?
우치다 결정적인 계기는 거품 경제 붕괴였을 겁니다. 성장이 멈추고, ‘파이’의 확대가 멈추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파이’가 커지는 동안에는 분배 방법에 그다지 토를 다는 일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돌아가는 몫이 늘어나는 한, 분배 방법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파이’의 확대가 멈추며 축소로 돌아서면, 갑자기 분배 방법에 눈이 돌아갑니다. ‘이봐, 대체 어떤 기준으로 파이를 나누고 있는 거냐. 누군가 “과도하게 가져가는” 녀석이 있는 거 아니냐. 내 ‘몫’을 누가 빼돌리고 있는 거 아니냐고.’ 하는 식의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90년대가 끝날 무렵이었지요. ‘파이의 분배 방법’을 시끄럽게 의논하게 된 게. 그때까지는 ‘어떻게 파이를 키울 것인가’가 우선적인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 ‘어떻게 파이를 분배할 것인가’가 우선적인 화제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얘기를 하는 데 아무리 시간을 쏟아부어도 ‘파이’는 커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저 줄어들 뿐이지요. 그렇게 되고 보니 가일층 요란법석을 피우며 ‘파이의 분배 방법’을 어떻게 할 것에 관한 의논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사회적 유용성과 생산성, 그리고 상위자에 대한 충성심’을 기준으로 자원이 차등 분배되어야 한다며 교활한 녀석들이 앞장서 주장했습니다. ‘도움이 되는 자’와 ‘도움이 안 되는 자’를 차별화하여 ‘도움이 되는 자’에게 많이 분배하고, ‘도움이 안 되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해주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렵부터였어요. 생활 보장 수급자에 대한 배싱이라든가, ‘너무 많이 가져가는’ 공무원 때리기라든가, 줄 세우기라든가 평가 등을 주장하는 데 다들 난리였습니다. 어떤 시도든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파이’는 커지지 않으므로, 자기의 몫을 늘리기 위해서는, 타인의 몫을 줄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타인의 몫을 줄일 수’ 있을까 하는 그 이치를 따지는 데 모두가 몰두했습니다.
‘외국인’, ‘반일’, ‘다들 속으로는 싫어하는 그런 사람들’은 공적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하기 시작한 건, 자원의 분배 과정에서 그만 ‘타인의 몫’에 신경이 곤두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일본인이 ‘빈궁해졌기’ 때문입니다. 일본어 속담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가난하면 범용해진다(貧すれば鈍す)’는 말 그대로였습니다.
주식회사화 하자는 것 역시, 그 당시에 등장했던 ‘줄 세우기’ 추세의 한 가지 표현입니다. 주식회사에서는 능력보다도 충성심이 중시됩니다. 상위자가 명하는 것이라면 ‘무의미한 작업’이라 할지라도 잠자코 다 해내는 인간이 중용됩니다. ‘이런 일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고 직언하는 인간은 미움받고 배제됩니다. 충성심과 예스맨십을 인사 평가에서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 이것이 주식회사식 인사정책이 가지는 가장 큰 약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식회사로 변모한 자민당’ 역시 이러한 폐단을 피해 갈 수는 없었습니다.
ー 톱다운에 의거해 구성원의 의지를 통일시킴으로써, 일견 조직을 강고히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치다 주식회사에서 CEO에게 전권 위임이 허용되는 건,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경영 판단의 적절성 여부를 시장이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상부가 판단한 경영에 시장이 바로 반응합니다. 시장으로부터 ‘퇴장’을 명령받은 CEO는 잠자코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하면 바로 잘린다’는 보장이 있기에, CEO에게 잠정적으로 전권을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에 관해서도 이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느냐 하면,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비즈니스에서의 ‘시장’에 상응하는 것이 정치에서는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부 정책의 적합성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시장’ 격에는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를 꼽을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어떤 정당이 정권을 도맡고 있는 사이에 그 나라의 국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가, 국제사회에서의 외교적인 영향력에 얼마만큼 무게감이 실렸느냐, 그 나라의 지도자가 하는 말에 국제 사회는 얼마나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는가, 그 나라를 롤모델로 ‘저 나라의 성공 사례를 배우자’ 하는 나라가 얼마나 등장했는가 등…. 그러한 지표에 기반해, 정치의 성공 여부를 비로소 판정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코로나 대응의 경우를 보면, 동일한 문제에 전 세계 국가가 동시에 직면했으므로, 그 성패는 객관적 지표에 기반해 정확히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인구 대비 감염자 수, 사망자 수, 검사 수, 백신 접종률, 의료 체제 등... 그러한 것들을 비교해 보면 일본 정부의 ‘점수’는 바로 도출됩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그런 작업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 입장에서의 ‘시장’은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시장’이냐 하면, 그것은 ‘차기 선거’입니다. 다음 선거에서 이기면 정책이 ‘시장’의 승인을 얻은 것이며, 정책이 ‘옳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셈입니다. 정치가와 미디어 모두 한목소리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음 선거’에서 다수의 의석을 얻는다면, 그것은 이제까지 행했던 정책이 전부 ‘옳았다’라는 민의의 신임을 얻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아무리 실정을 거듭하더라도, 전부 잘 돌아가는 척 미디어가 선전하여 유권자가 그것을 믿고서 투표 행동을 취한다면, 모든 정책은 ‘옳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빗대어 표현하자면, 시장의 반응이 아니라, 회사 내부의 인기투표로 경영 판단의 옳고 그름이 정해지는 회사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매출이 떨어지거나 주가가 내려가도, 종업원들이 ‘경영은 대성공하고 있다’는 프로파간다를 신봉한다면, 경영자의 지위는 천하태평입니다. 따라서, 지금 정치가들은 실제로 정책을 성공시키기보다도,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우선시하게 되었습니다.
ー 일본의 코로나 대응에 관한 정부의 수많은 실책 역시 걸고넘어지는 사람 하나가 없습니다만.
우치다 톱다운 정치체제에서는 윗선이 자신의 실정을 설명해야 할 처지가 될 때 보이는 행동거지가 다들 비슷비슷합니다. ‘정부가 세운 정책은 옳았지만 「현장」의 저항 세력이 그 실시를 가로막았기 때문에 잘되지 않았다’는 요지입니다. 스탈린의 소련, 모택동의 중국 등 전 세계 독재 정권의 구실은 항상 똑같습니다. 시스템은 완벽히 제도 설계되어 있었으나, 시스템 내부에 ‘해당분자’가 있어서, 올바른 정책 실현을 저지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실패의 책임은 이러한 ‘반혁명 분자’ ‘매국노’ ‘제5열’에 있다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실정의 다음 수순으로는 ‘배신자’의 숙청이 행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시스템 그 자체는 그대로 남습니다.
현재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 정책을 보더라도, ‘후생노동성의 정책은 옳았으나 의료기관 및 국민이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으므로 잘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따라서 더욱 시스템을 상의하달적으로 재편해야 한다’가 됩니다. 헌법을 바꾸고 법률을 바꾸며 정부의 명령을 거스르는 의료기관이나 시민에게 벌을 주는 틀을 짜면 모두 잘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실패한 독재자가 반드시 채용하는 변명입니다.
ー 자민당 내부가 다양성을 잃어가는 한편으로, 야당에 대해서도 또한 ‘단일화가 안 되어있다’는 비판이 곧잘 나오고는 합니다.
우치다 정당이 단일 대오를 갖춰야만 한다고 언제 정해놓았던가요? 그런 논리로 말하자면 일본공산당이나 공명당이야말로 가장 ‘굳건한’ 태세 정비에 철저하니까 미디어는 ‘공산당, 공명당에 투표합시다’라고 사설에 내걸어야 하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말에 앞뒤가 안 맞습니다.
강령이나 규율로 각 잡혀 탄탄한 정당이 있다면, 옛날 자민당처럼 헐렁헐렁하고 느슨한 정당도 있습니다. 저는 그래도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강령도 다르고, 조직 원리도 다르며, 지향하는 사회상도 다른 그러한 정당이 나란히 병렬해 있으면서 이들이 서로 교섭한다든지, 타협한다든지, 이합집산을 반복해 나가며, 어찌 됐든 국민이 살기 좋은 사회를 실현시켜 나가는 겁니다. 그래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정당이 어떠한 조직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정답’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습니다. 미디어에서 ‘단합이 안 되어 있다’ ‘당내에 의사통일이 안 되고 있다’라고 귀 따갑게 떠드는 이유는 바로 기자들이 주식회사 말고는 다른 조직 형태를 모르는 탓으로, ‘현대적인 정당이 주식회사를 닮지 않았으니 비정상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저런 정당이 있어도 문제없습니다. 유권자는 선거 때마다 스스로 판단해서 투표합니다. 지방선거와 국정 선거에서 각기 다른 정당에 투표한다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유권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단 하나의 정당을 지지해야만 한다, 따라서 정당은 단일한 방침을 관철해야 한다는 발상은 너무나 유치합니다.
입헌민주당이 평소에 설왕설래하는 모습을 보면 도무지 믿음이 안 간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입헌민주당은 원래 ‘설왕설래하는 정당’이거든요.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장기인데 뭔가 문제가 되나 싶습니다. ‘언제나, 다종다양한 정책 판단에 있어서 옳은 정당’의 출현을 기대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어떠한 정당이라도 틀리기 마련입니다. 일을 그르친 뒤에 ‘아이고, 실수했습니다’라고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정당이라면 저는 그걸로 충분한 성실성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ー 정치 세계뿐만이 아니고, 보다 일상적인 장면에서도 자기 입장을 명확히 하라는 발상이 퍼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 가운데 특히, 다양한 분열이 생겨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치다 아군이냐 적군이냐, 정의냐 악이냐 하는 단순한 이항 대립으로밖에 정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시민적 성숙도가 낮다는 증좌(證左)인 것으로 보입니다. 코로나만 보더라도, 백신을 맞을 것이냐 맞지 않을 것이냐, 마스크를 쓸 것이냐 말 것이냐, 외출해야 되냐 등의 의논이 행해지고 있습니다만, 그런 건 본래 과학적인 문제이지, 이데올로기 차원의 문제가 아니거니와, 하물며 인격의 문제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근거에 기반하여, 과학자가 잠정적인 지견을 밝힙니다. 그렇다면 ‘이러이러한 점까지는 밝혀졌으므로, 이 정도 쯤으로 행동해 주십시오’ 하는 식의 개략적인 합의형성 정도쯤은 가능합니다. 그런데도 감염증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자신이 인터넷에서 그러모은 정보에 기반하여, ‘이렇게 하여야 한다’고 단정하는 겁니다. 이는 참으로 비과학적이고 유아적인 태도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보이는 바이러스가 불러일으키는 감염증이니만큼,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므로, 과학자의 총의에 따르겠다’는 절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ー 전후 일본의 교육 현장에서 그러한 대화의 훈련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우치다 학교에서 전부 가르치라는 건 무리한 요구입니다. 대화나 합의 형성 훈련을 학교 교육에서만 시키려 해도 역부족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사회 경험을 통해, 어떻게 대화를 존립시킬지, 어떻게 합의를 형성할지에 관한 시행착오를 쌓아나가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건 가르친다고 곧장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른들이, 실제로 대화를 통해, 견해차를 조정해 나가며, 합의를 만들어가는 실천의 현장을 몸소 보여주는 식으로 경험을 쌓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 그러한 ‘민주적인 조직’은 어지간해서는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ー 오늘 논의의 관점에서 보면, 아베와 스가 정권은 일본 사회를 남김없이 거울처럼 비추어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지라, 이를 바꾸겠다는 건 지난한 과업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우치다 맞습니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30년에 걸쳐, 일본은 정말로 쇠약해졌지요. 경제 지표만 놓고 봐도, 전 세계 주식회사 시가총액 상위 30사 목록에 30년 전에는 일본 기업이 21개 사를 점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전무합니다. 앞으로 일본은 급격한 인구감소와 함께 초고령화 국면을 맞이합니다. 급락하는 국력을 V자 회복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일본에는 아직 풍요로운 국민 자원이 남아있습니다. 온대 몬순 기후와 비옥한 토양, 질 좋은 식수원, 다양한 동물상과 식물상이 있으며, 아니면 상하수도나 교통망, 공공 기반 시설(원문 ‘라이프라인’ – 역주)로 일컬어지는 사회적 인프라, 그리고 행정, 의료, 교육 등이 아직 충분히 기능하고 있습니다. 관광자원이나 엔터테인먼트 면에서도 아직 국제 경쟁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아직 남아 있는 재고나 다름없는 자원들을 세심하고 알뜰히 다루어 나가는 게 어떨까요? 일본이 다시금 경제 대국이 될만한 여력은 이제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 대국으로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의 비전도 없습니다. ‘정온한 중소 규모 국가’로서 조용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현재 일본의 국력을 고려해 보면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 될 수 있을 겁니다.
ー 말씀하신 사회변혁은 목하 자민당 정권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우치다 글쎄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자신이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면 되는 일인걸요. 지난 30년 동안 ‘조작 미숙’을 범했다는 걸 조금이라도 인정하면 됩니다. 다종다양한 조직의 모범으로 주식회사를 삼아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본을 몰락시킨 원인이었음을 깨닫는 겁니다. ‘이제 톱다운은 그만합시다’라고 자민당 내부에서 말을 꺼내는 사람이 누가 나온다면, 저는 그 사람을 지지할 겁니다.
앞으로 일본은 오랜 기간에 걸쳐 ‘후퇴전’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인구는 점점 줄어들며, 경제도 정체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때가 와도 ‘유쾌하게 지내는’ 겁니다. 그런 때일수록 오히려 더욱, 쾌활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인상 찌푸리고 있어서는 지혜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후퇴전에 필요한 것은 ‘얼마나 손해의 폭을 줄일 것인가’ ‘얼마나 피해를 최소화할 것인가’입니다. 어떤 사람은 ‘얼마나 이길까’ ‘얼마나 벌까’를 생각할 때는 지혜가 떠올라도, ‘손해의 폭을 적게 하는’ 식의 불경기 국면의 담론에서는 지혜가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미안하지만 그런 사람은 ‘후퇴전’에 임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024-05-01 14:5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 존속의 비책 (0) 2024.05.21 무예에서의 한가운데와 칼끝이 그리는 반원형에 관해 (0) 2024.05.21 피드에서 문득, ‘커뮤니즘’을 봤다. 여름이었다. (0) 2024.05.10 미래에 관하여 (0) 2024.05.09 연재를 시작하며 드리는 말씀 (0) 2024.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