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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에서 문득, ‘커뮤니즘’을 봤다. 여름이었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5. 10. 17:35
근간 『내 이럴 줄 알았다』에 수록된 꼭지다. 이걸 사이버 공간에 올려 두는 소이는, 어느 예비중학 보습학원에서 초6 대상으로 한 시험지에 아래의 문장이 쓰였다 해서다. 아무리 그래도 초등학교 6학년 학생에게 읽으라고 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일본의 눈에 띄는 특징은 부유층에 속하는 사람들일수록 ‘쩨쩨하다’는 사실이다. 부유층에 속하고 권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공공재를 가로채 사유재산으로 바꿔칠’ 권리, ‘공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할 권리’를 독점적으로 부여받았다고 해석하는 셈이다. 공적인 사업에 투입될 세금을 ‘착복’*해서, 공금을 사유화하는 데 윗물 아랫물 할 것 없이 열심이었던 적은 내가 아는 한 과거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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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中抜き – 옮긴이)
세금을 거두어, 어떻게 쓸지를 정하는 사람들이, 공적 자금을 사유 재산으로 바꿔치는 행위를 ‘본무’라고 여기는 행태를 형용하는 데에 ‘쩨쩨하다’는 말 이상으로 적절한 것이 없을 성싶다. 지금 일본에서는 ‘사회적 상승을 이룩한다’는 말은 곧 ‘한층 쩨쩨해진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닌 것 같아도, 정말로 그런 것이다. 현대 일본 사전에 ‘공권력’이라는 건 ‘공권력을 사적으로 쓰고, 공공재를 사유화할 수 있는 사람’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한 신분이 되기를 목표하여 사람들이 매일 이마에 땀을 흘리며 노력하고 있는 이상, 나라가 온통 ‘쩨쩨해지는’ 게 당연하다.
나는 이제 이런 쩨쩨함에 염증이 나기 시작했다. 쪼들려도 된다. ‘쩨쩨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고 싶다.
그렇다면, 어떠한 사회가 ‘쩨쩨하지’ 않다는 말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일본이 패전하고 난 뒤 내가 보고 들은 바 있는 ‘공화적인 골목’은 그러하였다. 다른 이의 부유함을 시기하지 않고, 약한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고, 사유재산을 묵히지 않고 나눠 가지며, 공공재를 될 수 있는 한 넉넉하게 해두도록 노력하는 것. 구태여 말하니 이 정도 뿐이다. 진짜로 어른들이 그렇게 살면서, 그것이 ‘평범’한 거라고 아이들이 여긴다면, 그 사회는, 설령 물질적으로 쪼들린다 하더라도, ‘쩨쩨하’지는 않다. 나는 될 수 있으면 그러한 사회에서 살고자 한다.
‘공공재’를 영어에서는 ‘코먼(common)’*이라 한다. 본래 의미는 ‘입회지, 공유지’이다. 울 없는 숲이나 초원에서, 촌락 공동체가 코먼을 공유하고, 공동관리한다. 마을 사람은 거기서 가축을 방목한다든지, 고기를 낚는다든지, 들짐승 날짐승을 잡는다든지, 나무에서 과일을 따기도 한다. 개인의 사유재산이 궁한 마을 사람이라도, 풍요로운 코먼을 가진 공동체에 속해 있는다면, 넉넉한 생활을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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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먼. 현행 대한민국 국립국어원 외래어표기법에 따른 규범 표기 – 옮긴이)
유럽에는 중세부터 어느 나라든지 ‘코먼’과 비슷한 것이 존재했다.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의 ‘코뮌(commune)’인데, 천주교의 교구가 기본이 되는 행정 단위로서, 구성원 100명 정도 되는 작은 코뮌부터 마르세유처럼 구성원 100만 명 정도 크기를 지닌 코뮌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모두 행정 단위로서 그 지위가 동등하다. 코뮌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으며, 광장을 그사이에 두고 넘어가면 시청사가 있어서, 시의회가 열리며, 시장이 선출된다.
독일의 고대에는 ‘마르크 협동체(Markgenossenschaft)’라는 것이 있었다. 토지는 부족 공동체에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생산 방식도 강한 규제를 받으며, 토지 매매는 금지되고, 수확물은 기본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소비되며, 목재나 육류, 와인을 공동체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토지는 누구의 것도 아니며, 그로 인해 수확물이 누군가의 사유 재산이 되는 일이 없었다. 그 결과, 지배-피지배 관계는 생겨나지 않았다. 만년의 마르크스는 바람직한 ‘커뮤니즘(코뮌주의)’* 사회를 상상해 보면서, 그 구상의 소재를 게르만족의 마르크 협동체에서 따왔다는 사실을 사이토 고헤이는 『인신세의 자본론』** 속에서 논하고 있다. 나는 ‘풍요로움’이란, 사유재산이 아니라, 공공재에 관해서만 쓰여야 마땅할 형용사라고 생각한다. 가령 구성원 가운데 누군가가 천문학적인 부를 소유하고, 호화로운 소비활동을 하고 있더라도, 누구든지 접근할 수 있는 ‘코먼’이 빈약하다면, 그 집단은 ‘풍요로운 공동체’라고 불릴 수 없다. 신분이나 재산, 개인적인 능력에 관계 없이, 구성원이라면 누구든지 동등하게 ‘코먼’에 선사된 것들을 향수할 수 있을 것, 그것이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풍요로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렇게 생각한 것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유재산의 증대보다도, 구성원 전원을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로 코먼이 풍부해지는 것을 우선적으로 심려하는 태도를 ‘커뮤니즘’이라고 부르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개인적인 정의이니 일반성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고, 다만 건설적 논의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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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둘은 각각 일본어에서 ‘코뮤니즘’, ‘코뮤-은 슈기’로 발음된다 – 옮긴이)
(** 한국어판은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옮긴이)
빈부란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운운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언급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사활을 걸고 중시해야 하는 점은, 우리 사회 안에 어느 정도나 유복한 개인이 있는지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나 유복한 코먼을 공유하고 있는가에 관해서다. 유복한지 빈궁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원의 절대량이 아니다. 그 집단이 소유하는 부의 총량 가운데 어느 정도가 ‘코먼’으로 전원에게 개방되어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 정의를 따르면, 일본뿐만이 아니라 지금 전 세계는 굉장히 빈핍하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8명의 자산 총액은 세계 인구 가운데 소득이 낮은 절반에 해당하는 37억 명의 자산 총액과 동등하다. 이를 두고 ‘풍요로운 세상’이라 부르라고 한다면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다시 한 번 일본을 ‘넉넉한’ 사회로 만들려는 노력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특별히 GDP를 어떻게 끌어올린다든가 하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어떻게 다시 한번 ‘코먼’을 풍요롭게 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요즘 필자의 주위를 둘러보면, 사재를 털어 ‘모두가 쓸 수 있는 공공 마당’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곧잘 마주치게 된다. 나 자신도 10년 전쯤에 스스로 고베에 가이후칸이라는 도장을 세웠다. 무예 수련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能) 무대로도 활용하게끔 설계해 두었다. 따라서 다다미 위에 좌탁을 늘어놓고 합동 수업을 한다든가, 심포지엄을 연다든가, 영화 상영회나 나니와부시, 라쿠고, 기다유부시 등 일본 전통예능을 공연하기도 한다. 보잘것없지만서도, 이 또한 일종의 ‘코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소규모 코먼을 일본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 동시다발적이고도 자연발생적으로 손수 만들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의 활동은 그다지 귀를 쫑긋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귀에 들어오며,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상당히 넓은 네트워크가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풀뿌리 ‘커뮤니즘’은 예전의 소련이나 중국의 공산주의와는 본질적인 면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닐까 한다. 그 이유는, 이 새로운 ‘커뮤니스트’들은 부자나 권력자에 대고서 ‘공공의 이름으로 사재를 공출하거라. 공공의 이름으로 권리 제한을 받아들이거라’ 하고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공을 형성하기 위해서 우선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할 대상은 ‘네놈’도 아니고 ‘그놈들’도 아니다. 그건 바로 ‘나’다.
이렇게 마음을 굳게 먹지 않고서는 풍요로운 사회를 낳을 수 없다. 동의해 주는 사람이 아직 적지만서도, 나는 그리 확신하고 있다.
(2024-05-01 09:1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드리는 말씀】
https://ogdb.tistory.com/351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친 집중적인 독서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행위를 지원하는 것에 필요한 것은 독해력보다는 오히려 충성심이다. 지식보다는 오히려 신앙심이다.
'위대한 사상가'라는 것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독자가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처음에 받은 명함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모르겠지만 오늘도 읽는다'라는 것이 위대한 사상가에 대한 정통적인 독해 방식이다." - 『망설임의 윤리학』
1. 이 블로그에서는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 텍스트 연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 우치다 선생님 블로그의 활동은 메타-텍스트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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