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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에서의 한가운데와 칼끝이 그리는 반원형에 관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5. 21. 15:52
‘무도의 현대적 의의’라는 제목으로 어떤 시에 위치한 체육협회에서 강연했다. 청중의 대다수는 각종 경기종목 단체의 임원분들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 힘차게 손을 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말씀하신 내용 가운데 등장했던 「정중선」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었다.
자기 나름의 해답을 이미 알고 있어서 필자의 지견이 옳은지 그른지를 음미한답시고 심사하는 듯한 물음이 아니었다. 정말로 알고 싶다는 태도를 그 진지한 시선에서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분은 수련을 통해 ‘정중선(正中線)’에 관한 실감나는 신체 감각을 갖고는 있지만, 지도에 임하면서는 그 실감을 어지간해서 말로 전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정중선이라는 것은 단순히 자신과 상대의 중심[中心]을 맺는 공간적인 자리매김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팔락팔락하는 무게감[目付]이나 무게 중심[重心], 오장육부의 위치, 기에 관한 민감성 등 무수한 요소에 따라 정중은 생성하고, 변화한다. 그리고 정중과 기예[技]의 ‘하스지’*가 서로 들어맞으면 강대한 힘이 발휘되고, 엇갈리면 힘이 감쇄된다. 아마도 전설적인 명인과 달인은 미크론 단위로 정중을 감지하여, 거기에 ‘하스지’를 맞출 수 있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도로 깊게 벤 흔적이 있는 투구는 일본 각지에 지금도 남아있다. 이것은 인간의 근력만 갖고서는 어떠한 속도로 휘두른다 하더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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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刃筋: 검도에서 죽도를 휘둘러 맞을 때까지 그 칼날이 그리는 궤도 – 옮긴이)
다다 히로시 선생님은 검을 휘두르는 수련을 하기에 앞서 반드시 시현류의 창시자 도고 시게카타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신다. 시게카타는 와키자시*를 잡고 섬광과도 같이 눈앞에 있는 바둑판을 두 동강 내고, 심지어 다다미 바닥부터 마루의 장선(長線)까지 베었다고 전해진다.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달인들은 아마도 초인적인 정밀함으로 정중과 하스지를 맞춤으로써 자신의 신체를 거대한 에너지가 ‘지나는 길’로 닦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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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일본 무사가 함께 차고 다니던 큰 칼과 작은 칼 가운데, 작은 칼 – 옮긴이)
수련을 해 보면 그 에너지의 성쇠에 관한 동정이란 게 어떻게든 체감이 된다. 하지만, 정중의 물리적인 역량을 측정할 수 있는 계기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이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어휘도 아직 부족하다. 그러한 이야기를 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마 질문자에게도 전해졌으리라고 본다. (『월간무도』 2024년 5월호)
(2024-05-08 09:4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공공의 복리' 또는 '치국평천하'를 목표로 하는 공공성이 강한 장소에는 위험 인물에 대한 심리적 허들이 존재한다. (…) 공간 내에서 자신의 위치도 제대로 파악 (…) 그 수행은 '어떻게 타자의 신체에 동기화하는가, 어떻게 호흡을 맞추는가, 어떻게 근육과 관절의 유연함을 갖추는가, 어떻게 내장감각을 일치시키는가'같은 일련의 기술적인 물음을 둘러싸고 진행한다. 그러한 물음은 '타자와 깊고 매끄럽게 커뮤니케이션하는 회로를 어떻게 존립시키는가'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https://ogdb.tistory.com/432
작년 여름 처음으로 가츠라 니요 씨의 무대를 보았다. 제목은 <긴지츠 무스코近日息子>. 말씨의 선연함과 등줄기의 뻗음이 인상적이었다. 필자는 무도가이므로, 신체의 심지가 쑥 통하는 신체를 보면 뭔가 모르게 기뻐진다. 니요 씨는 말랐지만, 체간이 강하다. 검이나 곤봉을 휘둘러도 딱 모양새가 나올 것이다. 구조가 안정되어 있으면 일탈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문학, 무도, 예능, 건축 등에 있어서 모두 원리가 같다. 골조의 구조가 확실히 되어 있으면 ‘까불까불하는’ 것이 가능하다. 니요 씨의 라쿠고는 그러한 ‘가벼움’과 ‘질주감’이 최대의 매력이다. https://ogdb.tistory.com/290
우치다 (…) 자신이 태어나기 전과 자신이 죽은 후의 시공을 관통하는 한 개의 선이 있어서, 자신이 어느 거대한 것의 일개 구성 요소이며, 자신의 앞에도 뒤에도 ‘무엇인가’가 있고, 자신도 거기에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무도는 수련하기 전에 우선 합장을 하지요. 합장이란, 우주를 관통하는 한 개의 선과 체축을 맞추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모든 동작의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축과 지금 자신의 한정적인 시간 그리고 자신의 공간을 잘 맞춰서, 그게 딸깍 하고 맞는 순간에 절대적인 자기 긍정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앞으로 5분 뒤에 죽는다 할지라도, 결코 그것과는 상관 없이 자신은 커다란 생명 가운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사고 얼라이먼트가 겹쳐지는 순간은 기분이 좋습니다. 다시금 거기에 이르고 싶을 정도입니다.
우치다 하지만, 상당히 어려워요. 갑자기 합장해보라고 해도 무리입니다. 그것만으로 체축이 감지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뒤꿈치와 정수리를 맞춰놓고 그것을 관통하는 자신의 체축을 느낀다, 하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몇 년이 걸리니까요. https://ogdb.tistory.com/161
오길비: 저자와 독자를, 일본어와 한국어를 잇닿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운이 좋은 축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다른 해석자들에게도 귀를 기울이게 되는데, 한마디로 ‘자아를 최대한 다스려라’라는 말이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과연 번역(및 여타 일상다반사)을 통해 얼마나 괄목상대하게 될 수 있을지, 귀추를 주목해 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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