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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에 대해서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4. 10. 13:24
도덕 교육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연수 모임에 초청받았다. 연단에 서기 앞서 ‘경개’*를 보내달라고 하기에, 아래와 같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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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梗槪: 전체의 내용을 요점만 간추린 줄거리. - 옮긴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도록 하겠다. ‘도덕’이란 ‘사람으로서’ 만사를 어떻게 적절히 대처해 나갈지에 관한 ‘행동지’와도 같다. 말하자면 도덕을 교과서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닌 듯하다. 물론 ‘행동지’ 역시, 대개 말과 글을 경유해 들어온다. 그런데, 이 말과 글이라는 게 학생들의 머리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신체에 스며들게 된다.
어찌하여 어떤 행동은 적절하고, 어떤 행동은 부적절한가에 관한 기준을 학생들은 모른다. 모르므로 연소자*인 것이다. 말로 설명해도 못 알아먹는다. 머리로 못 알아먹는 것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는 신체에 스며들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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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ども: 일본어 ‘고도모’는 우치다 선생 사상체계의 중요 개념인데, 본래 라캉의 언명이고, 또한 저자의 레비나스 해석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 단어임. 현대 한국어에서 ‘학생生徒’이 갖는 함의는, 적이 광범하다고 생각합니다. - 옮긴이)
학생들에게도 학생들 나름의 고집이 있고,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 기준이 있으며, 호오가 있다. 그런 것들을 일단 ‘서랍’에 넣어두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이 신체에 깃들지 못한다.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을 개방’시키고 싶다면, ‘자기방어 시스템을 해제하더라도, 우리 친구한테는 불이익 가는 게 없어’라고 보증해 주지 않는 한 말짱 허사다.
지난날 한번 자신을 개방하여, 타자의 말과 글을 몸에 받아들여 보았으나, 그때 특단의 고통이나 불안을 느끼지 못했던 학생은 향후에도 ‘자신을 개방’하는 데에 그렇게까지 버티고 서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 당시 ‘자신을 개방했던’ 까닭으로, 어떤 종류의 상처를 입은 학생은, 시간이 지나서도 ‘자신을 개방하는’ 데에 공포를 느끼게 된다.
‘배운다’는 것은 곧 ‘자신을 개방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을 개방하는 것, 자기한테 달라붙어 있는 ‘억단(臆斷; doxa)’이라는 낡은 외투를 벗어 던지는 것처럼 훌훌 털어버리는 것, 그것이 ‘자기 쇄신’이다. 이를 학교 교육을 통해 학생에게 힘써 가르쳐야 한다.
타자의 말과 글에 방위적으로 굴지 않는 기제를 ‘무방비, 천진함(innocence)’이라고 부른다.
필자가 경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바는,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크나큰 공헌을 다하는 사람은, ‘이노센트한 어른’들이라는 점이다. 다 컸음에도 연소자처럼 유연함과 무구함을 잃지 않으며 환한 얼굴로 주위 사람들을 부드럽게 해주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결코 적을 만들지 않는 사람들, 그러한 어른들은, 집단을 살아가게 하는 ‘선함’을 탄생시키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어떻게 아이들이 그러한 ‘이노센스’를 머금은 채로 성장토록 할 수 있겠는가? 교육에 종사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이를 숙려해야만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찌 됐든 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학생들에게 학교에 머무르고 있는 한 ‘무방비해도 괜찮다’라고 확약하는 일이다. ‘친구가 아무리 무르다고 해도, 상처 받기 쉬운 상태가 되어도, 아무도 친구를 해치지 않아. 그러니 주눅이 들지 말고 자기방어의 껍질을 깨부수며 자기 마음의 문을 열어보는 거야.’ 교사가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메시지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하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아이들은 모른다. 따라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상대에게 말을 거는 일이 꼭 필요하다.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우리가 몸의 기운을 띄워 대화를 시도하는 말과 글은 학생들의 신체에 스며들어 갈 것이 틀림없다. 신체에 스며들기만 하면,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혹은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 말과 글만은 살아 숨 쉰다. ‘이해할 수 있는 말’과 ‘함께 살아가는 말’은 다르다.
만약 도덕이라는 것이 우리 아이들의 윤리적 성숙을 목표하는 교과라면(그러기를 바란다만), 이때 교사가 꼭 해야 하는 일은 학생들에게 ‘자신을 열어젖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윽박지른다 해도 이득을 유도한다 해도 심사하겠다고 겁준다 해도 가르칠 수 없다.
성장으로 이르는 계단에 이어지는 문의 손잡이는 안쪽에 밖에는 달려 있지 않다. 바깥에서 문을 열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이 안쪽에서부터 문을 열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내면에 ‘이 사람의 이야기를 좀 더 명확한 음성으로 듣고 싶다’는 바람이 싹틀 때까지, 우리가 한결같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우리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수밖에 없다.
(2024-03-05 10:4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주요 저서 『스승은 있다』 『교사를 춤추게 하라』 『배움에는 끝이 없다』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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