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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데라코야 연구 발표회’ 오리엔테이션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4. 9. 14:36
이번 학기 주제는 ‘세상은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까’입니다.
비슷한 주제를 과거에도 내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관심 가는 사안에 관해,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까’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미래 예측의 정확도는, 문제로 두고 있는 사상(事象)의 전단(前段)을 얼마만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놓고 볼 때, 만일 그로부터 1년 전에서부터 일어났던 일밖에는 알지 못한다면, 1년 뒤나 5년 뒤에 무엇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50년 전이나 1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다시말해 전단(前段)을 포함한 ‘문맥’을 이해한다면, 그것이 선택할 만한 경로*는 어느 정도 전망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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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脈」を知れば、それが選択しうる道筋はある程度…: 옮긴이의 겸손한 의견으로는, 미래는 단선적이 아닌, 여러 갈래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임.)
미래 예측을 하는 이유는 ‘적중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뒤늦게 허점을 찔리고서 대경실색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자지구 사태는 정전으로 마무리될 수 있겠는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귀추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중국의 인구 감소와 경기 침체는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줄 것인가, 튀르키예는 제국의 판세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프리카는 중국의 ‘세력권’에 들 것인가, EU와 NATO는 해체 수순을 밟을 것인가 등등…. 모두 숙고해볼 만한 논건들입니다. 하지만 신문의 해설기사나 텔레비전 뉴스 해설자의 논평 정도만 접해서는 ‘문맥’을 발견하는 일이 어지간히도 지난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에는 물론 일본도 포함됩니다.
일본의 ‘앞날’을 예측하는 경우 (분야를 막론하고서) 마찬가지로 당연히 시리어스한 문제가 일어나기에 이르기까지의 ‘전사(前史)’를 충분히 조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이 주제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글은 ‘세미나 발표란 무엇인가’에 관한 조금 일반적인 내용입니다.
데라코야 세미나는 어엿한 ‘학술 발표회’이므로, 발표자는 ‘모노그래프(monograph)’를 제시해야 합니다. 논점을 한 가지로 한정 짓는 것.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해 청강생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며, 그 논점에 관한 개인적 의견을 표현하는 것.
그간 세미나 발표를 쭉 보다 보니, 마지막에 든 ‘개인적 의견’이라는 영역을 매듭짓는 데 있어서 어째 다들 부실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경우의 ‘개인적 의견’이란, 특별히 엄청 오리지널한 의견을 말하라는 게 아닙니다. ‘내가 말하지 않는 한 어쩌면 아무도 말하지 않을 내용’입니다. 필사적으로 생각을 짜내려고 하지 않아도, 이는 나타나게 됩니다. 평소에만 놓고 봐도, 딱 이렇게 하자고 마음을 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샌가 하고 있는 그런 작업입니다.
자기가 고른 테마에 관해 이래저래 조사한다든지, 생각해 보고 있자니 ‘확 떠오르는 것(아마 자기 말고는 그 누구도 거의 떠올리지 못할 것)’이 ‘개인적 의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여러분 가운데에는 ‘객관적인 사실 적시에만 그치고서, 개인적 의견을 표출하지 않는 것’이 지적으로 자제적[抑制的]인 태도이며, 또한 ‘바람직’하다고 오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건 단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기 말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을 법한 것’만이 학술적인 ‘선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학술이란 집단적 사업입니다.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꾸준히 쌓아 올린 ‘벽돌’로 엔들리스하게 건물을 세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커다란 돌을 가져다 오는 사람도 있고, 돌과 돌 사이의 ‘틈새’에 꼭 들어맞는 작은 돌을 갖고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돌의 크고 작음은 부차적 논건입니다. 자기밖에는 할 수 없는 선사를 하는 것, 그게 바로 학술적 영위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만의 ‘작은 돌’을 찾아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성의 활성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수많은 현인들이 한목소리로 말해왔습니다. 바로 ‘일견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사상(事象) 사이의 관계성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어떤 언명을 접했을 때, ‘문득 어떤 뭔가가 떠오른 나머지 「이렇다 함은, 저런 것이겠군」 하고 마음먹는 것’. 그것이 인간 지성의 작용입니다.
That reminds me of a story ‘그러고 보니, 이런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것이 인간 지성의 본질이라고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정신과 자연』에서 거론하고 있습니다. (베이트슨 자신이 지성의 본질을 직접 운운한 건 아니지만, 아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조사를 하다 보니까, 무언가가 머릿속을 ‘히트’ 한 나머지, ‘그러고 보면…’ 하고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떠오르는 것. 이게 지성의 활동입니다. 그때 떠올린 ‘이야깃거리’가 ‘개인적 의견’입니다.
문제는 주어에 해당하는 that입니다. 이것이 매우 묘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이 that은 ‘이제까지 전단(全段)에서 밝혀진 것 가운데 무언가’이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인조차 모릅니다). 그래도 맞아떨어집니다. 아니, 그게 맞습니다.
어떤 주제에 관해 조사해 보겠다고 이제 마음먹습니다.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보는 가운데, 문득 ‘이러이러함은, 결국 저러저러한 것이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발표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이 기폭제가 되어 그런 내용을 떠올리게 되었는가를 본인조차 좀체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아무도 말하지 않을 법한 것’이며, 실제로 다른 사람으로는 대신하기 어려운 여러분의 ‘오리지널한 지견’입니다.
돌아오는 계절에도 데라코야 세미나에서 재미있게 해나가 봅시다.
(2024-02-27 17:50)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주요 저서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사가판 유대문화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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