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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자를 쓸 수 없는 학생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4. 5. 16:24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학생들이 글자 쓰기를 버거워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교과서를 노트에 필사만 해 오라는 숙제를 매번 내고 있건만, 해 오는 학생은 절반 이하다. 수업 중에 칠판에 적힌 내용을 노트에 베끼도록 하는 지시에도 학생들은 따르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저 ‘게으름 피우느라 이러나’ 싶었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반드시 그렇다고만은 할 수는 없겠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소설 『코』를 쓴 저자를 묻는 시험 문제에 ‘니콜라이 고골(ゴーゴリ)’이라고 답을 쓴 학생이 있었다. 고골도 똑같은 이름의 단편을 썼기는 했지만, 교과서에서 읽었던 글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것이었다. 어째서 일부러 고골이라고 썼느냐고 학생에게 물었더니, ‘한자로 답을 쓰는 게 성가셔서’라는 식으로 대답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내는 제출물의 글자를 알아먹을 수 없는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대학 교원들로부터도 듣는다. 학번까지는 읽을 수 있으나, (일본 인명으로서 한자로 쓰여진 - 옮긴이) 이름을 도통 알아볼 수 없어 난처하며, 서술 난에 쓰인 글자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읽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무엇을 썼는지 학생 자신에게 물어보면, 자기도 읽지 못하겠노라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어떻게 보면 글자를 쓰는 동작 그 자체에 신체적인 고통을 느끼는 학생들이 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문자를 쓰는 행위에는 상당히 정밀하고 섬세한 신체 운용이 요구된다. 붓으로 쓴다고 해 보자. 붓대는 검지와 중지에 걸고 엄지에 힘을 주는데, 팔꿈치를 들고 붓끝을 곧장 세운다. 이를 ‘현완직필(懸腕直筆)’이라 한다. 왕년의 서예 시간에 그렇게들 배웠을 것이다. 이 자세를 취하면 몸의 축(體軸)이 통한다.

     

    무도가로서 말씀드리건대, 몸의 축(體軸)이 통하지 않으면 손발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문자를 쓰기 위해서는 우선 신체의 구조를 갖추는 것이 순서이다. 간과하기는 쉬우나 매우 시급한 상황인데, 바로 당금의 학생들 신체의 구조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므로, 다음 주에 마저 하기로 한다.

     

     

    지난주에 이어 ‘글자를 쓸 수 없는 학생들’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에 관해 무도적 입장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붓으로 글자를 쓸 때는 상당히 정밀하게 신체를 운용해야 한다. 달필은 가로로 선을 하나 그을 때조차, 속도나 깊이, 농담을 세세하게 변화시키며 붓을 놀릴 수 있다.

     

    에도 시대 마지막 참수를 맡았던 야마다 아사에몬 8*는 목을 베는 찰나의 순간에 열반경을 읊었노라고 만년에 술회했다. 오른손 검지를 내릴 때 ‘제행무상’, 중지를 내릴 때 ‘시생멸법’, 약지를 내릴 때 ‘생멸멸이’, 새끼손가락을 내릴 때 ‘적멸위락’. 다름 아닌 이것으로 머리가 뎅겅 떨어졌다는 것이다. 한순간의 동작을 416자로 분절했다는 얘기가 된다. 칼로 베는 때의 본질이 힘에 있는 것이 아닌, 동작의 정밀함과 다분할에 있다는 점을 널리 알려주는 일화이다.

    (* 무가가 집권한 중세 일본의 사형 집행인의 위상은 조선과는 적잖이 다른 것으로 보임. - 옮긴이)

     

    고도로 정밀한 신체 운용은 사는 데 있어 필수적인 능력이다. 만약 불가능하다면 부엌칼로 대파를 썰지도 못하고, 바늘귀에 실을 꿸 수도 없으며, 글자도 쓸 수 없다. 하지만 미루어 보건대 이런 기초적인 ‘삶의 능력’이 오늘날의 학생들에게는 빈약한 것 같다.

     

    글자를 못 쓴다면, 키보드를 두들기면 된다. 그깟 대파는 미리 썰려 나온 것을 사면 되며, 그깟 양말에 구멍이 나면 번잡하게 깁기보다 새로 사면 된다. 그렇게 하면 될 법하다. 하지만, 신체의 구조가 무너지고, 세밀한 동작이 불가능한 학생들을 제도적으로 배출해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어른들은 가지는 게 바람직하다.

     

    글자를 쓴다고 함은, 괘를 긋거나, 혹은 원고지 칸에 맞추어 복잡한 도형을 올바르게 배열하는 것이다. 자간을 조절할 필요도 있다. 아마도 옛사람은 학동들이 글자 연습을 통해 신체의 정밀한 운용 능력을 익혀가며, 또한 삶의 힘을 제고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학동들에게 ‘잠자코 한자를 습자하거라’라고 명령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딱딱한 교습법을 교육과정에 필수로 채택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필자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다.

     

    (2024-02-27 11:2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주요 저서 『스승은 있다』 『혼자서 못 사는 것도 재주』 『사가판 유대문화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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