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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3. 14. 21:15

    Q: 예전에 답장해 주셨던 ‘남의 기분을 펴주는 것’에 관한 내용에서, ‘구조 신호를 들어줄 것만 같은 관대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도 그런 분들에게 몇 번이나 응석을 부렸는지...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치다 선생님도 그렇고, 정말 엄청나게 신세를 졌던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어요.

     

    구조 신호를 받아들이게 되는 분들은, ‘기어코 소리를 들어주니까’, 그 사람들에게만 구조 신호가 가게 되고, 결국 눈코 뜰 새가 없게 되어버리지 않나… 해서요.

     

    제가 좀 과장되게 표현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분위기를 밝게 해주는 사람이나 구김살 없는 사람은 있죠, ‘쟤는 문제 없어 보이니까, 이 정도 쯤(혹은 이런 종류의) 일을 맡겨도 해낼 수 있겠지’ 하는 식의 발상으로 말미암아, 일에 슬금슬금 허덕이게 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일이 휭휭 날아들어도, 척척 해내는 사람이니 문제가 없다고들 여기는 건데요. 일이 너무 많아지게 되면, 더는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적잖게 있지 않나 합니다.

     

    결국, 구조 신호를 받았던 사람이, 너덜너덜해지는 그런 경우 말예요.

     

    아니면, ‘멀쩡한 인간에게 일을 맡겨버리자’ 하는 식의 현장에서는, 모두 피부 감각으로 ‘기운찬 모습을 보여주면 일이 늘어나 버린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일에 채이지 않으려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다든지, 뭔가 떫은 것처럼 하곤 합니다. (그러니만큼 ‘기운차 보이는 인간’에게 몰아주면서, 일점 집중적으로 돌아가게 되는걸요….)

     

    원래 가지고 있던 생명력을 그런 식으로 애써 덜어내는 건, 내면적인 자해 행위에 가깝다고 개인적으로는 느끼고 있습니다.

     

    근데, 일감을 늘린다든지 싫은 일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런 본말전도적인 태도를 취하고 맙니다.

     

    그러는 게 왠지 좋지 않다고는 생각하지만, 자신의 수용 한계치라든가, 시간같은 게 각자마다 한계가 있으니만큼, 어떻게 해야 좋을까? …,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치다 선생님 곁에는 끊임없이 업무가 들어오고, 끊임없이 구조 신호가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제 인생 상담 역시, 그런 구조 신호 가운데 하나겠지요.) 일거리를 처리하고 구조신호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상상하자면, 마치 천수관음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여러 개의 손으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다수의 ‘도와달라’는 신호에 손을 뻗고 있는 그런…. , 물론 훨씬 다양한 업무나 구조 신호에 대처하고 계시므로, 극히 일부의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우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조 신호’를, 구체적인 생활의 현장에서 상상해보자니, 업무 현장이 떠올라 문득 써 보게 된 것인데요, 구조 신호를 캐치하면서, 자신의 ‘캐파’와의 타협을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치다 선생님의 비기, 라고나 할까, 마법을 알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A: 상당히 절실한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다른 이로부터 구조 신호를 청취하는 사람한테는 물밀듯이 ‘도와달라’는 지원 요청이 모여드는데, 이로 인해 수용 능력을 초과하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는 참으로 지금의 제 상황 같습니다.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잠깐만 도와주십시오’ 라는 말을 듣습니다. ‘부탁을 받으면 거절은 안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점차로 일거리가 늘어납니다.

     

    부탁을 받으면 ‘척척’ 해내는 것 역시, 일종의 ‘증여’입니다. 이에 ‘부탁한 측’에는 ‘반대 급부 의무’가 생겨납니다(이건 예전에 제가 한 ‘증여’ 이야기에서 들으셨겠지요). 이 ‘반대 급부 의무’를 게을리하게 되면 그 사람의 신상에는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것, 이런 믿음은 널리 퍼져 있습니다. 따라서, 보통은 반대 급부 의무를 다하게 됩니다. 이때의 답례는 ‘뭔가 나의 부담을 경감시켜 주는’ 형식을 취하는 게 ‘보통’입니다.

     

    ‘나의 부담을 경감시켜 준다’ 함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대신 해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저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귀찮은 일’을 대신 해주고 있습니다. ‘개풍관’ 도장 청소, IT 환경 관리, 이런저런 연중 행사의 기획이나 실행, 인간관계 고민 상담, 일감 소개, 상품이나 서비스의 ‘마르셰적 교환’ 모두, 제가 잠시 한눈 판 사이에 모두가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한테 온 구조 신호는 ‘나를 수신인으로’ 하고 있으며,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만큼 기본적으로는 ‘예’ 하고 답장을 보내기로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제 일거리는 늘어날 겁니다. 그럼에도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는, 뭐라고 말할까, 그 일들을 하고 있으면, 스스로 조금씩 넉넉해져간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선물’을 하면, 조금씩이나마 자신이 넉넉해집니다. 다만, 저를 살찌우는 ‘부’는 제가 남한테 준 것하고는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닙니다. 아주 다른 종류의 ‘부’입니다.

     

     

    저는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상호 지원 공동체를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공동체에 귀속해 있지 않고서 개별적인 개체로 존재해서는 인간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공동체를 제도적으로 설계하는 데 기본이 되는 규칙은 ‘가장 약한 사람이 자존감을 가지고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공동체에는 ‘프리 라이더(무임승차자 - 역주)’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프리 라이더’라는 말은 ‘공동체의 자원을 분배받을 만큼 분배받으면서도, 자기가 가진 몫은 하나도 꺼내놓지 않는 사람’을 이릅니다.

     

    ‘프리 라이더를 없애는 게 좋다’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프리 라이더 근절하기’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믿고 있으며, ‘생활 보호 수급자’를 못살게 군다든지, 미등록[undocumented] 재류 외국인을 ‘돌아가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다수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게 단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는, ‘표준적인 개체’가 아니라, ‘가장 약한 개체’를 기본으로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가장 약한 개체일지라도 쾌적하게 살아가게끔 제도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공동체를 강인(强靭)케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프리 라이더’가 초래하는 손실이란 건, 총합이 밝혀져 있습니다.

     

    기업 같은 경우, ‘급여만큼의 일을 하지 않는’ 정도입니다. 측정 가능하며, 실제로는 푼돈에 가깝습니다.

     

    기초수급 부정수령을 볼 때, 그 비중은 금액 기준으로 0.38%입니다.

     

    이걸 싹 없애기 위해 제도를 건드리는 게 훨씬 비용이 더 많이 듭니다.

     

    일본육영회의 장학금은, 반환을 아니하는 연체자가 5% 존재한다는 이유로, 2005년에 폐지가 되었습니다. 95%의 장학생은 착실하게 반환했음에도, ‘장학생은 잠재적인 도둑놈이다’라는 말을 꺼낸 사람이 등장했고, ‘옳소 옳소’ 하고 화답하는 사람이 나와버리고서는, 제도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일본의 대학생들은 재학 중에도 공부할 시간을 깎아가며 필사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졸업 후에도 장학금을 반환하느라고 자기가 원하는 직업에도 취업하지 못하고, 결혼도 못하며, 아이도 안 가지게 되는 그런 식으로 일본 전체가 돈에 쪼들리게 되었으며, 학술적 생산력도 격감했습니다.

     

    ‘프리 라이더’가 건진 얼마 안 되는 금전을 탈환하려고 한 탓에, 시스템 전체가 기울어버린 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보다는 장학금의 반환 의무 그 자체를 무로 하는 게, 일본 사회 전체로서는 훨씬 커다란 ‘부’를 쌓았을 터였습니다.

     

     

    어떤 조직이든 10% 정도의 ‘프리 라이더’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할당된 몫 만큼 일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줄이려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10% 정도의 ‘오버 어치버(over achiever)’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할당된 몫을 넘는 이익을 집단에 가져다주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오버 어치브먼트는 때때로 그들에게 분배되는 ‘부’의 몇 배, 몇십 배에도 달합니다.

     

    그렇게 된 이상, ‘프리 라이더를 제로로 하는’ 제도 개혁에 몰두할 틈이 있다면, ‘오버 어치버에게 그들이 기분 좋게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을 정비하는’ 게, 비용 대비 효과는 압도적으로 좋습니다.

     

    ‘프리 라이더를 조직의 정식 구성원으로 웃으며 맞아들이고, 오버 어치버에게는 그들 맘껏 하게 두는’ 모습의, ‘멤버 전 인원이 기분 좋게 지내는’ 조직을 설계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머릿속에서 주물럭 주물럭거려 나온 결론이 아니고, 경험에서 얻어진 지견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는 환경 조성’입니다.

     

    물론,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해 오는 사람 모두가 오버 어치버는 아닙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7%의 오버 어치버가 집단 내에 있으면, 집단은 어찌어찌 기분 좋게 존속할 수 있습니다. 15%나 있다면, 이는 굉장한 생산력입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버 어치버가 집단을 위해 이뤄놓은 것을 ‘헛되이 흘려버리지 않고 제대로 기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원문 とりこぼし: 스모나 장기 등에서, 당연히 이겨야 될 승부에서 진 것. - 옮긴이)

     

     

    오버 어치버의 ‘가치’는, 그 사람 한 명이 얼마나 많은 언더 어치버를 부양할 수 있는가로 고량[考量]됩니다.

     

    그렇지 않나요? 옛날부터 말예요.

     

    수많은 가족을 부양하고, 모두에게 제대로 된 옷을 입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로부터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너는 잘도 그런 먹을 입들을 묵묵히 보살피고 있는구나. 그런 것들은 버려두고서, 혼자서 호화롭게 살면 되지 않는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저는 제가 속한 공동체에서 오버 어치버를 자임하고자 합니다. 어떠한 공동체에도 반드시 다소의 ‘프리 라이더’나 ‘언더 어치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냐면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각자의 ‘역할’이라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구성원이 자존감을 가지고서, 유쾌하게 지낼 수 있는 ‘마당[場]’을 만드는 것이 스스로에게 부여된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조 신호가 여기저기서 온다는 것은, ‘너는 애초에 오버 어치버이므로, 자신의 책무를 다하라’는 통지인 것이라서, 이에 대해서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 그렇군요’ 하고 수신하는 게 좋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대가 받아들인 구조신호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남들로부터 ‘도와줘’라는 말을 들었단 것은, 굉장히 ‘바람직한 일’ 입니다. 그것만큼은 기억해 두도록 하십시오.

     

    그때 그대가 한 노력에 대한 ‘보답’은, 다른 때에, 정말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증여가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해 그 정도는 믿어도 괜찮습니다.

     

    (2024-02-07 17:51)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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