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선생이 하신 질문 시리즈 「책의 미래에 대하여」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3. 12. 18:14
우치다 선생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책의 미래’에 대해서 좀 여쭙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text-based’ 발명품 가운데 ‘책’에 필적하는 것은 아마 없을 겁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도구들엔, 기실 고안자가 몸으로 느꼈던 감각이 여러모로 지문처럼 새겨져 있듯이, 종이책의 물성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이건, 인간의 신체 실감에 토대를 두고 진화해 온 ‘완전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옵니다만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면 영화나 유튜브 등을 필두로, 이런저런 콘텐츠가 ‘책’의 지위를 찬탈하려 드는 듯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종이책’은 망해가고 있다고, 사양산업이라고들 떠들어댑니다.
이런 빡빡한 상황 속에서, 이제 ‘책의 미래’가 어떻게 풀려나갈지, 선생님의 고견을 청해 듣고자 합니다.
저는 책이라는 실체는 사라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단연코 이건 인류의 위대한 발명입니다. 정보매체로서 이것에 비견할 존재는 없을 겁니다.
정보를 검색하는 방식에는 랜덤 액세스(random access)와 시퀜셜 액세스(sequential access) 이렇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저 좋을 데로 석화처럼 액세스가 가능한 게 ‘랜덤’, 처음부터 순서대로 ‘여깄다’ 나올 때까지 검색하는 게 ‘시퀜셜’이지요. 종이책은 랜덤 액세스와 시퀜셜 액세스 모두 가능한 매체입니다. 처음부터 페이지를 넘기면서 맨 끝까지 읽어도 되거니와, 읽고 싶은 대목을 파라락 펼쳐서 그 부분만 읽어도 그만입니다.
특히 종이책은 랜덤 액세스에 강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명확한 쪽수가 기억이 안 나도, ‘북향 서가 윗 시렁에 있는 붉은 장정 책인데, 한가운데 쯤에, 모서리가 접혀 있으며, 하도 많이 읽은 탓에 손때가 묻어 있는 지점’ 하는 식의 ‘어바웃’한 검색이 종이책의 경우는 가능합니다.
만약, 제 장서ー1만 권 가까이 되는ー를 전부 전자책으로 만든다면, 서재는 널찍널찍해져 상쾌할 것이며, 책을 찾느라 고생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근데 ‘편리하구먼~’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평상시에만 한정될 뿐이지, ‘어떤 재해가 일어난 때’에는 제아무리 전자책이라도 써먹을 데가 없는 거랍니다.
제가 ‘책은 엄청나다’라는 마음을 품게 된 계기는 1995년 지진 때였습니다. 공동 주택이 기울어질 정도의 재난 상황이었습니다. 가구는 거의 다 쓰러졌으니, 당연히 책장도 넘어갔습니다. 철제 책장은 흐물흐물 엿가락처럼 휘어져 더 이상 책장의 역할을 다할 수 없었습니다(전부 버렸어요). 하지만 책은 무사했습니다. 표지가 상한 건 있었지만, 제본이 흩어졌다든가 망가져서 읽지 못하게 된 책은 수천 권의 장서 가운데 한 권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거개가 ‘꽂혀 있었던 그대로 마루에 떨어져 있었던’ 덕분에, 찾던 책은 곧장 찾을 수 있었으며, 새로운 책장을 들이고 나서도 원상 복귀하는 작업 역시 간단했습니다.
대학에 있는 연구실의 책장은 붙박이였으므로, 책장은 그대로였지만 책만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몇 시간 만에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었습니다.
저희 집은 다행히도 곧장 전기가 들어와서* 불을 켤 수 있었습니다. 설령 전기가 안 들어온다 해도, 책이란 건 낮이 되면 창밖이 훤하니까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게 만약 전자책이었다면, 전지가 다 되는 시점부터 ‘이제 안녕’입니다.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읽기가 불가능합니다. 만약 오랜 시간에 걸쳐 정전이 이어진다면, 인프라가 부활할 때까지 몇 주 동안, 몇 개월, ‘책 없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저같이 ‘활자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간한테 그건 정말 고통스럽기 마련입니다.
ー
(1월 17일 새벽 5시 47분 – 옮긴이)
그때 종이책이라는 건 참말이지 ‘위기 내성이 강하구나’ 라는 점을 절절히 느꼈습니다. 홍수가 나서 책이 흠뻑 젖는다 하더라도 겉만 말려 두면,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불이 나서 타버리면 별도리가 없지만, 그 밖의 자연재해에 종이책은 강합니다.
편리함이라는 측면에서만 말하자면, 전자책은 의문의 여지 없이 편합니다. 저도 지하철에서는 책을 읽자면 전자책을 고릅니다. 중증 활자 중독인데요. 예전에는 여행 갈 때, 도중에 읽을 책이 사라지면 큰일나겠다 싶어 ‘예비로 마련해두는 책’을 두세 권 가방에 넣고서 여행을 다녔습니다. 디지털 방식은 휴대전화로도 읽을 수 있으므로, 이제는 짐도 훨씬 가벼워졌습니다. 이 점은 참 좋습니다. 그럼에도, 혹시나 충전기를 놓고 오면 전지가 닳은 시점에서 더는 읽기가 불가능해집니다.
전자책은 일상적인 상황에 최적화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말인즉 ‘비상시에는 쓸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자연재해, 전쟁, 테러나 내란 같은 일은,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는 때에 ‘책을 읽을 수 없는 상태’가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는 상황을, 저는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인간은 결국 종이책을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전자책은 손수 만들 수 없지만, 종이책만은 비슷한 모양만 갖추면 스스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백지 위에다가 연필 아니면 펜으로 문자를 써서, 그것을 철하면 ‘책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진짜 읽을 게 아무것도 없어진다면, 저는 아마 스스로 책을 쓸 겁니다. 그리고, 그걸 읽겠습니다. 다른 이로 하여금 읽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종이책의 가장 큰 강점 아니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중학생 시절에 저는 ‘가리방’을 긁어서, 그러니까 자가 출판 용도인 조악한 인쇄기를 써서 문예 회지를 만들고서는, 친구들에게 배부하였습니다. 내가 읽고 싶지만 아무도 써주지 않는, 어디에서도 팔지 않는 그런 책은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그런 마음, 돌이켜보면, 13살쯤부터 주욱, 제 기본자세였습니다.
대학생 때에는 정치적인 소책자(팸플릿)를 엄청스레 써댔습니다. 요것도 ‘가리방’으로 찍어낸 겁니다(다시 말씀드리지만 정전이 되어도 문제없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무척이나 긴 글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대학을 나오고 10년쯤 지난 뒤, 친구 히라카와 가쓰미네 집에 놀러 간 일이 있습니다. 그가 옷장 속에서 누레진 종이 묶음을 꺼내오더니, ‘이거 네가 쓴 거지?’라고 제게 물었습니다.
읽어보니 거기에는 1972년쯤에 도쿄대 고마바 학내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을 분석해 놓았는데, 이를 통해 앞으로 어떠한 정치적 조류를 창출해야 하겠는가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일이었으므로 거기에 쓰여진 내용의 의미를 이제는 퍼뜩 알아먹을 수는 없었는데, 열 줄 정도 읽어보니 ‘이거 내가 쓴 거다’ 하는 점은 알 수 있었습니다. 모모(某某) 위원회라는 이름만 식별할 수 있었지, 개인 이름은 쓰여져 있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습니다. 기껏해야 100부 정도밖에 찍지 않았음에도, 이게 사람 손을 건너 건너, 와세다대 캠퍼스에 있던 히라카와의 손에 들어갔던 겁니다.
종이의 힘이란, 상당히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유인물은 곧장 휴지통에 버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읽어봤더니 ‘어 이거 재밌네’ 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거 한번 읽어봐’라는 말과 함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손수 건네져서, 도쿄 안을 20킬로 정도 돌아다녀 히라카와군에게 닿았습니다.
그런 일은 아마 전자책이나 인터넷상에 쓰여진 것에서는 별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10년도 전에 쓰여진 인터넷 텍스트를 누군가가 소중히 보존해 두어서, 친구에게 보여주는 일 같은 건, 아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종이가 되어놓으면 그러는 법이에요.
대학 시절 히라카와와 문예 회지 ‘성풍화제(聖風化祭)’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 과월호를 얼마 전에 친구가 들고 왔습니다. '서가를 정리하는데 이게 나왔어'라고 하더군요. 50년 전에 냈던 동인지입니다. 이게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종이책의 보존 능력이 엄청난 점에 탄복했습니다.
문자로 읽는 매체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부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대다수 사람이 '편리성'과 '가격'만으로 그 매체의 우열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체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은, '풍설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과 '누구라도 의향이 있다면 손수 만들 수 있을 것' 이 두 가지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점에서 종이책을 넘는 미디어를 인류는 아직 발명해 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2024-01-30 16:13)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처음 듣는 이야기』 서문 (0) 2024.03.24 (제목 없음) (0) 2024.03.14 박 선생이 하신 질문 시리즈 「학지에 대해」 (0) 2024.03.06 "유신은 한다"? "유신은 필요 없다"! (0) 2024.03.05 노토반도 재난 초기대응 지연에 관해 (0) 2024.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