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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생이 하신 질문 시리즈 「학지에 대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3. 6. 21:08
두 번째 질문으로, 우치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학자로 지내며 창조하신 ‘학지(學知)’*가 있다면 가르쳐 주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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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사전에서는 불교 용어 삼지三知의 일환으로 설명하고 있음. - 옮긴이)
자, 이게 마지막 질문이군요. 이 또한 일본의 언론매체로부터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질문입니다. 얼마 없는 기회이니만큼, 성심껏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오랜 기간에 걸쳐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분야는, 20세기 프랑스 문학・철학 연구, 그리고 무도(武道)인 아이키도(合気道; 합기도) 이렇게 두 영역입니다. 이렇게 두 개 갖고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는 훈련을 해왔습니다.
프랑스 문학・철학에 관한 업적으로는 에마뉘엘 레비나스 3부작(『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레비나스 타자를 말하다』, 『레비나스 시간론』)과 『전ー철학적』에 수록된 여러 학술 논문이 있습니다. 『사가판 유대문화론』도 장기간에 걸친 사상사 연구의 성과이므로, 학술적 업적에 기산해도 좋을 것입니다. 조교 시절부터 썼던 학술 논문은 그 대다수가 훗날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개중에는 상을 받은 것도 있으므로, 학자로서는 참으로 복된 인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프랑스 문학・철학 연구자로서 그 평가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해 ‘낮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제가 대중매체에 출연하는 경우 붙는 호칭은 거개가 ‘사상가・무도가’입니다. ‘번역가’로 소개하겠다는 경우도 있고, ‘평론가’나 ‘철학자’라는 칭호를 다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문학자’라는 호칭으로 언론에 등장*한 적은 과거에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째서 일본 미디어는 저를 ‘불문학자’로서 인정해 주지 않는 걸까요?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는 미디어 측에 하나의 암묵적 합의가 존재해서라고 봅니다. 저는 ‘사상가’나 ‘평론가’일 수는 있지만, ‘학자’가 아니라는 합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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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세를 풍미한 불문학자 고바야시 히데오, 그 밖에 불문학과 관련 깊은 오에 겐자부로 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베트남전 반대 등을 내세운 프랑스 등지의 68혁명과 일본의 학생운동은 그 시기가 거의 중첩된다. - 옮긴이)
어째서 저를 학자로 쳐주지 않는 걸까요?
제가 친구로 두고 있는 연구자로부터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불문학 학회 뒤에 으레 열리는 친목회에서 신진 연구자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어쩌다가 제 얘기가 화젯거리로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는 때에, 40대 연구자들이 입을 모아 ‘우치다는 밉상스럽다’고 쓴소리를 했다는군요. 친구가 이 말을 듣고 흥미가 동해 ‘대체 왜?’라고 물으니, ‘자기 전공도 아니면서 주제넘게 입을 지나치게 놀린다’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런 비평은, 제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평어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도시, 한 가지 전문 영역에 자신을 한정시키지 않고서는,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것이냐. 그들의 말본새에는 ‘분노’에 가까운 뭔가가 느껴집니다.
저는 아무래도 ‘규칙 위반’을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이 규칙이란 건, 그 젊은 사람들로서는, 연구자・학자로 살겠다고 선택한 시점에서 받아들인 철칙입니다. 그걸 못 받아들이겠다면 학계에 발붙일 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규칙 위반’을 저지르면서도 한술 더 떠 대학에서 교사 노릇도 하고, 연구서를 쓰고 있습니다. 우치다의 사례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이며, 본래 학자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활동 방향이다, 하는 암묵간의 합의가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제 활동 방식이 학계에 대한 존중심을 결여하고 있는 탓에 이를 정죄하고 있는 거라면, 그들의 ‘분노’도 이해가 갑니다.
그럼, 제가 범하고 있다는 ‘규칙 위반’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가 연구 대상을 놓고서 ‘일망 부감적(一望俯瞰的)’인 가설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못하는, 바로 그게 아닐까 합니다.
학술 논문의 마당에서는, 주어로 ‘우리(We/Nous)’를 쓰는 게 보통입니다. 이는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게 개인이 아닌, 어떤 종류의 ‘집단적인 지성의 작용’ 같은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추상적이고, 투명하며, 여하한 주관성으로부터도 이탈해 있는, 물론 신체 또한 갖지 않는 ‘우리’가 연구의 주체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체도 없으며, 개인사도 갖지 않는 ‘우리’는 저 위에서부터, 자기 자신이 하는 연구의 논정[論程]*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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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치다 선생이 지어낸 말 - 옮긴이)
이것이 학술 논문을 쓸 때의 기본적인 예절입니다. 박 선생도 연구자이니만큼 학술계의 이러한 관행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만큼 논문의 ‘서문’에서, ‘우리’는, 앞으로 자신이 행할 연구의 전체적인 행로를 조감적으로 바라보고, 논정[論程]을 모조리 요약하며, 결론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예시(豫示)할 수 있는 자로서 등장합니다. 논술이 시작되기 이전의 시점에서, 논문의 결론까지 앞서 알고 있는 자가 ‘우리’입니다. 그러한 관상적(觀想的)*인 ‘우리’를 주체로 비껴보지 않고서는 학술 논문을 쓸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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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상: 철학・종교 일반・불교에서. 순수한 이성 활동으로 진리·실재(實在)를 인식하는 일. 신(神)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일. 사물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여 관찰하는 것. - 옮긴이)
저도 일정 시기까지는 그러한 스타일로 써 왔습니다. 서론을 쓰는 시점에서 결론까지 일찌감치 내다보는 ‘투명한 지(知)’의 이름을 내걸고 논문을 써왔던 것입니다. 『전ー철학적』을 읽으시면서, 아마도 박 선생은 ‘우치다 선생께서 8~90년대에 논문 쓰실 때의 서술 방식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구나…’ 하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셨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읽어도 그렇게 느껴지는걸요. 그건 바로 당대의 논건을 ‘관상적 주체’의 관점에서 썼기 때문입니다. ‘이 토픽과 관련하여 필요한 학술 정보를 우리는 상공에서 부감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이미 숙지한 연후에 쓰고 있는 것처럼 쓰는’ 게 학술 논문을 쓸 때의 기본적인 매너입니다.
그리하여 학회에서 발표를 하는 인간에 대고서 ‘당신은 이미 …이 이 논건에 대해 다루었던 논문을 읽어본 적이 없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상대방은 그걸 치명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합니다. 이 물음에 ‘모릅니다’라고 대답하는 건, 아카데믹한 기준에서 ‘패배를 자인하는 꼴’을 의미합니다.
저는 학회에서 그러한 광경을 한두 번 마주친 게 아닙니다. ‘...을 읽었는가?’ ‘어째서 ...을 언급하지 않는가?’라는 투로 지식의 결여를 하나라도 지적하면 발표자에게 치명상을 안길 수 있다는 게 ‘학계의 룰’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느 시기부터는 이런 행동거지에 깊은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논정[論程] 전체를 저 높은 데서 한 눈에 내려다보고 있다고 ‘설정’해 놓는 게, 그렇게까지 필수적인 것일까 했던 겁니다. 망라적인 자세로 연구하라는 게 그리도 본질적이라는 말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지간히 독창적이고 생산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는 했으되, 이에 대해 연구하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읽었어야 했을 기초적인 문헌 독해를 빠트렸으므로, 여기엔 학술적 가치가 없다’ 하는 추론은 잘못된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학문이란 ‘집단적인 영위’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지식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옛다’하고 그걸 보전해 준다면, 그 사람의 연구 가운데 가치가 있는 몫은 ‘가치 있는 몫’으로 곧장 건져낼 수 있게 됩니다.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는 것보다는, 그러는 게 훨씬 생산적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실속 있는 연구’ 축으로 평가하는 건, 그 사람이 그 연구를 함으로써 반론이든, 옹호론이든, 해석이든, 조술(祖述)이든 간에 많은 사람이 ‘그 주제에 관해 언급하는’ 연구 같은 겁니다. 집단적인 지의 활동에 트리거* 작용을 하는 연구입니다. 집합적인 지적 퍼포먼스를 향상케 하는 사람을 저는 ‘지성적인 사람’으로 여깁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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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은 일본어 解発. 생물학에서, 解発因을 릴리서 releaser라고도 함. 어떤 요인 즉 울음소리나 몸짓 등이 같은 종류의 개체 사이에 특정한 반응, 이를테면 경계음-도피 행동 등을 유발함을 이름. - 옮긴이)
젊은 학자들이 제 태도를 ‘규칙 위반’이라고 느꼈던 건, 단순히 제가 이래저래 전공 이외의 것에 참견하고 다녀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제가 ‘우리’라는 익명적 지의 주체로서 이야기하기를 관두었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개인사를 가진, 신체를 가진, 그래서 고유한 무지나 편견, 감정에 갇혀 있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내버리고서, ‘나’라는 일인칭 단수형으로 서술합니다. 그게 아마도 ‘규칙 위반’으로 판정내려진 게 아닐까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지나 편견이 가미된 말이 허용된다면,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지 않나?’라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진짜로 그런 식입니다. 제가 어떠한 것일지라도 무절조(無節操)하게 참견한다는 것인즉, ‘뭐든지 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커다란 주어로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고유명에 따라 이야기하고, 그렇게 꺼낸 말에 질 책임은 자기 스스로의 몫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딱히 진리의 이름을 내세우고서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필자의 개인적 의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 결기는 제가 학자들의 집합적인 작업을 깊이 신뢰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술적 공헌’에 보탬이 된다면, 그건 집합적인 지적생산 과정에서 ‘나 이외의 다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작업’을 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라도 잘하는 것을 다른 누구보다도 잘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제 할 일을 합니다. 그건, 제가 ‘다른 연구자들’의 성실한 작업 태도에 의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단편적일 수가 있는 것은, 저의 단편적인 지(知)라 할지라도, ‘다른 연구자’들이 집대성한 집합적 학지에 그걸 보태둔다면, 그 나름의 유용성을 띨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이것저것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야구에서 수비를 맡을 때, 한 명이 던지고 받고 수비하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만약 우익수라면, 오른쪽 외야만 잘 지키면 됩니다. 혼자서 구장 전체를 쏘다닌다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른쪽 외야에서 올려다보는 해 질 녘 하늘의 빛깔이며, 불어오는 바람의 찬 공기며, 관객들의 함성이며, 풍겨오는 감자칩의 냄새며, 뜬공을 잡을 때 부딪혔던 펜스의 감촉을 여실히 경험해 두는 겁니다. 그것을 경기 때 오른쪽 외야를 지키지 않았던 모든 선수를 위해, 그것을 경기 때 구장에 있지 않았던 모든 사람을 위해 기억하고, 기술하는 게, 훨씬 유용하지 않겠습니까? 어느날부터는 제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제 작업은 아주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 눈을 통한 문헌이나 사료는, 제가 직감적으로 입수했을 따름인지라, 정말이지 체계적이지도 망라적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되지 않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 고유의 단편성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책을 읽지 않았던 건, 제 나름의 무의식적인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제 단편성은 저만의 것이거니와, 제 무지 역시 저만의 것인즉, 그 단편성과 무지에는 제 고유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의 이름으로 각인되어 있는 무수한 ‘단편성과 무지’의 총합으로서 집합적인 학지는 성립합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구논문을 쓸 적에, ‘커다란 주어’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서부터 저는 굉장히 자유로워진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우리’적인 학술 주체를 저자랍시고 모사했다면, 레비나스 3부작은 쓰지 못했을 겁니다. 하기야는 설령 ‘리투아니아의 역사와 지정학을 이해하고, 러시아어와 독일어와 히브리어를 습득하며, 불같은 랍비 아래에서 탈무드 변증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레비나스를 말할 권리가 없다’는 사람이 출현한다면, 혹은 ‘애초에 자기 자신이 반유대적 박해도 전쟁도 포로 생활도 홀로코스트도 경험하지 않은 인간은 레비나스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사람이 출현한다면, 저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잠자코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자’라는 포지션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우리’라는 조감적・관상적인 주체로 쓰기를 포기하고서, 저는 연구 대상에 관해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좀 더 알고 싶다’ 하는 욕망을 추진력으로 하여 쓰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는 손으로 더듬어가며 깜깜한 어둠 속을 나아가는 것과도 같은 연구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서론에서 전체를 예시하는 법은 없으며, 어떤 결론에 이르기 위한 과부족 없는 재료를 마련하는 법 또한 없습니다. 직감에 이끌려 쓰는 사이, 길이 술술 통하는 때도 있고, 막다른 골목에 부닥치는 바람에 분기점까지 다시 돌아와 다른 길을 가야 하는 때도 있으며, 똑같은 이야기를 자꾸자꾸 반복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한 눈에 내려다 보면서 쓰는 학술 논문에서 용납되는 사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젠가부터 아무리 모양새가 안 나더라도, ‘정직하게 쓰기’를 최우선시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제가 쓰는 것들은 모조리 ‘기나긴 조각’이 되었습니다. 실로 개인적인 지견을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럼에도, 집합적인 학지의 ‘소재’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며 쓰고 있습니다.
학자의 야심이란 ‘최후의, 결정판 연구 논문’을 쓰는 데 있다고는 제가 생각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그 논문을 딱 써버리니 이제 아무도 그 논건에 대해 얘기하지 않게 되는…. 그런 걸 쓰는 게 학자의 영광이라고는 제가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그 논문을 써줌으로써 ‘저요 저요’ 하고 그 논건에 대해 말을 꺼내는 사람이 속속 등장하는…. 그런 결과로 이어지기를 학자는 학수고대해야 하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학문을 저처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일본 학술계에서 예외적 소수입니다. 학술 연구는 집단적 영위이며, 모든 연구자들은 과거의 사람들도,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도 포함해 ‘연구자 집단’이라는 다세포 생물을 형성하고 있는데, 자신이 그 가운데 세포 하나라는 사고방식이, 그다지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박 선생이 하신 질문은 ‘우치다가 학자로서 창안해 낸 학지가 무엇인가?’였습니다. 제 대답은 ‘그런 건 없습니다’ 입니다.
저는 ‘학지란 집합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집합적인 학지의 소재로써 활용될지도 모르는 조각을 레비나스와 관련해, 카뮈와 관련해, 혹은 무도와 관련해, 영화와 관련해, 스스로 만들어 왔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자신의 ‘벽돌’을 손수 만들어 나가기로 다짐했습니다. 그것을 후세의 누군가가 주워 들며 ‘어라 이 벽돌 건물 자재로 써도 손색없겠는데’라고 여겨준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겠습니다.
(2024-01-28 11:3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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