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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와 “근로 윤리”인용 2024. 1. 17. 22:41
미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please”라고 하거나 “thank you”라고 말하는 습관을 고려해 보라. 이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기본적인 도덕으로 여겨진다. 우리 사회의 도덕적 수호자들, 예를 들어 교사와 목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예절을 강조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도 아이들이 그런 말을 까먹는다고 끊임없이 나무란다. 우리는 종종 그런 습관이 보편적이라고 단정하지만, 이누이트 사냥꾼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는 많은 예절이 그렇듯이, 그것은 한때 봉건 시대에 존경을 표하던 습관이 일반화된 것이다. 그 시대에 봉건 영주나 고관들을 대하던 방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했다는 뜻이다.
아마 모든 예절이 다 이런 식이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로 붐비는 버스 안에서 자리를 찾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시민이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자기 가방을 옆으로 옮긴다. 그러면 우리는 미소를 짓거나 고개를 까딱해 보이거나 다른 감사의 몸짓을 해 보일 것이다. 아니면 아마 “땡큐!”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몸짓은 단순히 공통적인 인간성에 대한 인정이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가 단순한 물리적 장애물이 아니라 인간 존재였다는 점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진정으로 느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식탁 건너편에 앉은 사람에게 “소금 좀 주시겠어요?”라고 부탁하거나 우편집배원이 배달증명서에 서명하는 당신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할 때엔 그런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해 의미 없는 격식임과 동시에 사회의 도덕적 토대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please”나 “thank you”를 말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로 확인된다. 심지어 “I’m sorry”라는 말이나 “I apologize”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도 그런 표현을 거부하지 않는다.
실제로, 영어의 “please”는 “if you please”나 “if it pleases you to do this”를 줄인 말이다. 대부분의 유럽 언어들에서도 똑같다(프랑스어는 “s’il vous plait”이고 스페인어는 “por favor”이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당신은 이것을 할 의무를 전혀 지지 않는다.” “소금을 나에게 건네주라. 하지만 당신이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거기에는 사회적 의무가 있다. 그 말을 따르지 않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에티켓은 예의 바른 픽션들(덜 점잖은 언어를 쓰면 ‘거짓말들’)의 교환으로 이뤄진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거기에 “please”라는 단어를 덧붙임으로써, 당신은 그것이 명령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명령이다.
영어에서 “Thank you”는 “think”에서 나온 표현이다. 원래 “I will remember what you did for me.”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다른 언어들(포르투갈어의 ‘obrigado’가 좋은 예이다)을 보면, 표준적인 표현은 영어의 “much obliged”(많은 신세를 지다)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 단어는 실제로 “I am in your debt.”라는 뜻이다. 프랑스어의 “merci”(영어의 ‘thank you’)는 더욱 생생하다. 이 단어는 “mercy”에서 비롯되었다. 자비를 간청한다고 할 때의 그 자비 말이다. 그런 표현을 씀으로써, 당신은 상징적으로 당신 자신을 당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의 권력 밑에 놓는다. 여하튼 채무자도 한 사람의 죄인이지 않는가. “You’re welcome”이라고 하든지 “It’s nothing”(프랑스어는 “de rien” , 스페인어는 “de nada”)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이 소금을 넘겨준 사람에게 당신의 상상 속 도덕 장부의 차변에 그 행위를 실제로 기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확신시키는 방법이다. “my pleasure”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때 당신은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 “아니에요. 사실은 대변에 적어둬야 할 일이에요. 차변이 아니고요. 오히려 당신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어요. 당신이 소금을 달라고 부탁함으로써 나에게 보람 있는 일을 할 기회를 주었으니까요.”
암묵적인 부채 계산법(“당신한테 신세를 졌어.” “아니야, 나한테 신세 진 건 아무것도 없어.” “당신한테 신세를 진 사람은 오히려 나야.” 이런 표현들을 보면 마치 장부에 모든 것을 세세하게 적었다가 하나씩 지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을 해독하다 보면, 이런 것들이 도덕의 본질로 여겨지지 않고 종종 ‘중산층’ 도덕의 본질로 여겨지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말로, 지금은 중산층의 정서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관습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사회의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경은 주로 계급 조직의 상위자에게 표하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우편집배원들과 빵집 요리사들이 서로를 마치 봉건 영주 대하듯 하는 것은 약간 바보스럽다고 생각한다.
반대쪽 극단에 유럽에서 “대중적인” 환경이라 불리는 지역, 말하자면 작은 마을과 가난한 지역, 그리고 적이 아니라면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전제가 통하는 곳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웨이터나 택시기사로서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손님들에게 차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모욕으로 들린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는다. 달리 말하면, 중산층 에티켓이 우리 모두가 평등한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평등을 주장하는 방식이 매우 특이하다. 한편으로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다고 강조하고(여기선 제한 구역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 앞에 나타나 “제가 도와드릴까요?”라고 말하는 쇼핑몰의 퉁명스런 보안 요원을 떠올려 보라),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기본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모든 제스처를 교환의 한 형태로 다루고 있다. 그 결과, 티브 족의 이웃들처럼, 중산층 사회도 부채의 관계가 생겼다 싶으면 그 즉시 상환함으로써 끝없이 재창조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비교적 최근의 혁신이다. “please”와 “thank you”를 입에 달고 사는 습관은 16세기와 17세기의 상업 혁명 동안에 그 혁명을 주도한 중산층 사이에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무실과 가게, 관청의 언어였다. 지난 500년 동안에 그 습관은 중산층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 습관은 또 훨씬 더 큰 철학의 한 증거이며, 그 철학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인간들은 서로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일련의 가정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정들은 지금 우리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만큼 우리의 일상에 아주 깊이 배어들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인류학자가 고쳐 쓴 경제의 역사』, 정명진 옮김, 223~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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