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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인용 2024. 1. 4. 23:09

    나는 (...) 물에 빠진 젊은이들을 다소 안타깝게 생각한다. 구명보트에 아직 자리가 있으면 흔쾌히 태워 줄 마음도 있다. 그런데 차가운 물속에 손을 담그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표류자에게 등을 돌리고 보트 안에서 연회를 한다. 산해진미를 만끽하면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물에 빠진 쪽도 즐거워 보인다는 생각에 그냥 놔둬도 가까이 올 것이다. 태워 달라고 하면 태워 준다. 그런데 “딴마음이 있는 거죠?” 같은 무례한 말을 하는 녀석은 그대로 바다로 밀어 버린다.

     

    (...) 사실 우리가 탄 보트가 그렇게 안전한지 아닌지 우리도 잘 모르기 때문에 꼭 태워 달라고 부탁하는 녀석 이외에는 무리해서 권유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

     

    제가 가르치는 일이 본질적으로 ‘오지랖 넓은 일’이라는 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낀 것은 한 사건 때문입니다. 1980년대 중반에 제가 다니고 있던 합기도 지유가오카 도장이 상점가의 재개발로 없어지게 되어 다른 수련장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때까지 1주일 내내 사용했던 도장이 없어졌기 때문에 제자들도 역할 분담을 해서 요일별로 각자 도장을 확보하기로 했습니다. “우치다 군은 목요일에 사용할 만한 도장을 찾아 줘”라는 말을 듣고 사방팔방으로 손을 써서 집 근처의 중학교 체육관을 목요일 6시부터 8시까지 빌릴 수 있었습니다. 거기가 저의 도장인 셈이죠. 처음에는 지유가오카 도장의 동료가 와 주었는데, 역에서 꽤 먼 데다 평일 저녁 시간이다 보니 점점 수련생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결국 그곳에 수련하러 온 사람은 근처에 살고 있던 몇 명의 중학생들과 아주머니들 5~6명 정도였습니다. 시작하고 나서 반년 정도 지나서 사람 수가 가장 적어졌을 무렵, 태풍이 온 적이 있었습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일단 도장에 가 보았습니다. 경비를 하시는 분이 “이런 날에도 수련을 하나요?”라고 묻기에 “합니다”라고 말하고 열쇠를 받아서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 다다미를 꺼내 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것입니다. 태풍이니까요. 올 리가 없지요. 그런데 수련 시작 시간이 되어도 아무도 오지 않는 겁니다. 오지 않지요. 바깥에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고, 추운 체육관 한가운데에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한 시간, 그렇게 앉아 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나에게 배우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혼자서 가르치겠다며 체육관을 빌려 놓고 일을 마친 후 흠뻑 젖은 몰골을 하고 달려와 혼자서 다다미를 깔고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아무러 배우러 오지 않는다. 그때 ‘나는 바보가 아닐까’라고 혼자서 다다미 위에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천천히 목욕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면서 만화를 보는 게 나았을 뻔했는데 아무 이득도 없는 짓을 하고 있다니, 그렇게 순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체육관 철문이 삐걱 열리면서 최근에 합기도에 입문한 근처에 사는 중학생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앗, 선생님 와 계셨군요. 태풍이라서 설마 수련은 없겠지 생각했는데, 그래도 한번 가 보자 생각하고 왔어요”라고 말했고, 저는 “물론 수련한다”라고 대답하고 그 아이와 둘이서 한 시간 정도 수련을 했습니다.

     

    이때 제 안에서 뭔가 터져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를 좀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 중학생을 상대로 수련을 하면서 가르친다는 것은 역시 꽤 ‘오지랖이 넓은 일’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죠. 누구도 “가르쳐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르치고 싶다”라고 말하고 시작한 이상, 가르치는 사람은 이 위험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와 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다다미를 깔고 준비체조를 하고 호흡법도 하고 언제라도 수련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한다. 그것이 가르치고 싶다고 말한 사람의 책임지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그때 교육이라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때 제가 27~28세 무렵이었는데, 그것이 제 가르침의 기본 방침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

     

    메시아는 부재다. 이는 ‘빈자리를 두는’ 형태로밖에 유대인들 현실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파스카는 하느님이 유대인들을 이집트 땅에서, 노예 상태에서 구출한 역사적 사건을 축하하는 의례인데, 이때 가족 식탁에는 빈자리가 하나 마련된다. 그 자리는 메시아를 예고하는 예언자 엘리야를 위한 자리다. 과거 한 번도 엘리야가 도래한 적이 없었던 사실로부터 귀납적으로 추리하면, 이 자리가 기다리는 사람을 맞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이 빈자리를 수천 년에 걸쳐 계속 지켜왔다. 파스카 의례에 관해 로베르 아롱은 다음과 같이 마음에 파고드는 말을 남겼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메시아의 전조가 오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오는지 안 오는지가 아니다. 그의 도래는 몇 날 몇 시라는 방식으로 나타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반드시 언젠가 온다는, 그리고 그날에 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전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 우치다 타츠루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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