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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는 도약한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3. 11. 14. 13:52
얼마 전에 교육에 관한 인터뷰를 「스바루(플레이아데스 - 옮긴이)」* 에서도 진행했다. 그때 ‘논리국어’ 과목에 대한 의견을 구술했던 것이 활자화되었으므로, 가필하여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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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바루: 집영사에서 간행하는 순문학 문예지. 1909~1913년의 원조 스바루 잡지는 소설가 모리 오가이가 지도적 위치를 점하였다. - 옮긴이)
요전날에 효고 현에서 활동하시는 국어 선생님들의 모임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집회에 오신 선생님들을 살펴보니 요즘 국어교육 현장의 화제는 아무래도 ‘문부성 학습 지도 요령’의 개정과 함께 등장한 ‘논리 국어’ 과목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논리국어란 게 대관절 무엇인가 하고 그분들은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정말로 혼란에 빠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논리 국어’의 교육 목표에 준거한 실제 시험 문제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라고 말았지요. 학생회 회의록과 학생회 규약을 보여주고, 금년도 안에 학생회 총회의 개최가 가능하겠냐고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계약서나 예규집을 읽을 수 있을 만큼의 실천적 국어 실력을 ‘논리 국어’라는 프레임으로 육성하려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목도한 시험 문제만 놓고 보면, 이는 어떤 종류의 국어 실력을 키우기보다는, 단적으로 말해 국어 교육에서 문학을 배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인 듯 보였습니다.
‘논리 국어’를 ‘문학 국어’와 분리시켜 가르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문학이란 비논리적인 것이며 무언가 심미적인, 지적 장식품 같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그런 목적을 위해서 귀중한 교육 자원을 할애할 필요는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공언하는 사람이 정치가와 기업가 사이에서는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그렇게 해도 출세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실제로, 문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채로 이렇게 사회적 성공을 거두었다. 따라서, 학교 교육에 문학은 필요 없다는 겁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문학을 배제한 뒤 이룬 스스로의 성공 체험’에 기반하여 추론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정치와 경제 어디에도 보탬이 되지 않는 것에 교육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돈을 하수구에 처박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입니다. 이렇게 지성에 관해 허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교육 정책을 기안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에 일어나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심각한 병태라고 생각합니다.
‘논리 국어’라는 발상에 제가 회의적인 이유는, ‘정답’이 이미 밝혀져 있고, 수험생은 논리적으로 소정의 단계를 따라가면 ‘술술’ 결론에 달하게 된다는 전제를 그들은 자명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마 ‘논리’가 그런 거라고 믿고 있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논리적 사고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금방 알겠지만, 논리적 사고라는 것은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종류의 ‘심연’에 직면한 뒤, 그것을 ‘목숨 걸고 뛰어넘는’ 과정인 겁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에드거 앨런 포, 아서 코난 도일을 읽고서 ‘논리적으로 사물을 생각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사물을 생각한다는 것’은 오귀스트 뒤팽이나 셜록 홈즈 ‘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이 처음부터 각인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명탐정의 추리야말로 ‘논리적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과정의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추리소설에는 ‘정답’을 미리 알고서 ‘문제를 만드는’ 탐정은 나오지 않습니다. 등장인물이 현장에 남긴 단편으로부터 추리하여, 그 귀결로서의 정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명탐정이 행하는 추리라는 건, 그 자체로는 하나 하나 사이에 관련성이 나타나기 힘든 단편적 사실을 늘어놓고, 그 단편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단일한 가설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 가설이 아무리 비상식적일지라도, 믿기 힘든 이야기일지라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이것밖에 없다’고 확신하는 명탐정은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단언합니다. 그것은 ‘논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논리의 비약’인 겁니다.
이는 학술적인 지성이 작동했던 실제 사례와 동일합니다.
칼 마르크스, 막스 베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모두 대단한 지적 달성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지적 진보에 공헌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보통 사람이 감히 따라할 수 없는 ‘논리의 비약’을 했다는 점입니다. 눈 앞에 산개해 있는 단편적인 사실을 모두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이것 하나뿐이다’라는 추리 방식에 기반하여 전대미문의 아이디어를 선보였습니다. ‘계급 투쟁’, ‘자본주의 정신’, ‘반복 강박’ 모두 ‘논리의 비약’이 빚어낸 산물입니다. 똑같은 단편들을 보여준대도 모두가 똑같은 가설에 이르는 게 아닙니다. 범용한 지성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상식이나 고정관념이 논리의 비약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외적으로 지적인 자가 예외적 존재인 이유는 그 도약력에서 나옵니다. 그들이 하는 논리적 사고란, 말하자면 이 도약을 위한 도움닫기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는 식으로 논리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사고의 속도를 높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일정 속도에 달하게 되면,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처럼, 지면을 박차고 도약합니다. 그렇게 되면, 단지 꼬치꼬치 조리를 따지고 있는 한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높이를 향해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사물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 경탄할 만한 점프에 선행하는 ‘도움닫기’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도움닫기로 속도를 높이고, 도움닫기선에서 ‘상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일상적 논리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달합니다.
하지만 범용한 지성은 논리적으로 골똘히 생각해 도달한 예상 외의 귀결을 앞에 두고서 얼어붙고 맙니다.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데도,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고 눈을 감고서 도움닫기선 앞에서 멈춰 서고 맙니다. 이야말로 ‘비논리적’입니다.
프로이트의 <쾌락 원리의 저편>은 20세기에 가장 많이 읽힌 텍스트 중의 하나입니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규명해 낸 증례 연구로부터,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로 ‘반복 강박’ 더욱이 ‘죽음 충동’이라는 경탄할 만한 아이디어를 끄집어냈습니다. 이것이 ‘도약’입니다. 프로이트 자신은 ‘사변’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래는 논리적으로 사물을 생각한다는 것의 본질적인 역동성에 대해 쓰여진 중요한 문헌이라고 생각됩니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변에 대해 말해보겠다. (...) 사변이란, 어떤 아이디어가 어떤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호기심에서 시작하여, 그 아이디어를 수미일관하게 적용할 수 있겠다는 데서 비롯한 시도이다.” (프로이트, 「쾌락 원리의 저편」, 『프로이트 저작집 6』, 이무라 츠네로 등 옮김, 인문서원, 1970년, 163쪽)
논리적으로 사물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어떤 아이디어가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는가’는, 그것이 설령 건전한 상식이나 생활 감각과 괴리되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궁구한 나머지, ‘이 전제를 따라가면 이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명제에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외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논리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실 ‘용기’ 인 겁니다.
학교 교육을 통해 우리 아이들의 논리성을 단련시켜 주기를 정말로 바란다면 ‘논리는 도약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식이나 정보, 기능 같이 정량적인 것이 아닙니다. 외려 질주감이라든가 그루브, 도약력 등 그런 역동성이 다름 아닌 지성입니다.
학생들이 중등교육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극단론입니다만,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지성을 발휘하면 매우 즐겁기 마련이다’라는 것입니다. 지성적이라는 말은 곧 ‘날아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라면 문자 그대로 이 ‘날아오르는’ 일을 매우 좋아할 겁니다.
이번에 문제가 되는 ‘논리 국어’가 보잘 것 없는 과목인 이유는, 이걸 배워서는 학생들이 지적인 고양이나 질주감을 맛볼 기회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에게 ‘용기를 가지렴’이라는, 논리적 사고를 위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할 낌새가 없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과거 사반세기 동안 문부성이 작성했던 교육 정책 관련 문서 가운데 ‘용기’라는 말이 등장하는 걸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아마도 문부성 내부에서 출세하고 싶은데 ‘용기’ 따위를 가져봤자 헛된 일이기 때문이겠죠.
고위 공무원 세계는 ‘공포심을 가질 것’ ‘겁먹을 것’ ‘윗선의 안색을 살필 것’ 에 숙달한 사람들이 출세하는 구조이므로, 그들로서는 ‘용기를 갖지 않았던 것’을 성공 체험으로써 기억에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육 부처에서도, 아이들로 하여금 ‘공포감 심어주기’에 대단히 열심입니다. 반면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에는 정말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고위 공무원들 자신의 실제 체험이 그렇게 여기게끔 하는 겁니다. ‘겁 먹는 인간이 성공한다’는 것은 그들 자신의 속일 수 없는 실제 감각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아마 선의에서 그러는 걸 겁니다. 선의의 발로에서 아이들에게 ‘겁을 먹도록 하렴’ 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겁을 먹으면 <좋은 일>이 생긴단다. 이 아저씨는 그랬는걸’ 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런 정책은 못 폅니다.
하지만 지성의 발달에 있어서는 공포심보다도 용기가 압도적으로 중요합니다. ‘용기’가 지성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스티브 잡스에 따르면 아닙니다. 그는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참으로 감동적인 연설을 했습니다. 그 영상이 지금도 유튜브에 남아있으므로 꼭 보시기 바랍니다. 그 연설에서 잡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The most important is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because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에 따르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마음과 직관은 어째서인지 당신이 정말로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마음과 직관’이 아닙니다. ‘마음과 직관에 따를 용기’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직관이 ‘이 방향으로 나아가라’ 하고 시사하고 있어도, 공포심에 사로잡혀 멈춰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뛰어 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논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논리가 요구하는 경탄할 만한 결론에 맞서서 겁먹지 않고 도약하는 것입니다.
‘논리가 요구하는 결론’을 영어에서는 corollary라고 말합니다. 일본어에는 이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대응 어휘가 없습니다. 저는 이 말을 일본의 사상가 중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사용한 예밖에는 접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는 참으로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생각이 아무리 사회상규에 반한다고 하더라도, 주위 사람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라도, ‘이것은 코로러리다’ 하고 단언할 용기를 가지는 것, 그것이 논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의 참된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019-05-18 09:2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조삼모사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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