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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에게서 배운 커뮤니케이션의 진수 / ‘같잖은 합리주의’로부터의 탈각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3. 10. 21. 15:51
귀신으로부터 배운 커뮤니케이션의 진수
우치다 동지나 하지 때에, 죽은 자의 세상이라고나 할까, 그런 초월적인,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과, 인간이 사는 세속 사이의 경계선이 조금 낮아져서, 무언가가 찾아옵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이란, 이 세상의 도량형으로는 재어서 알 수 없으며, 추측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어떠한 귀신일지라도, 단 하나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인류는 고대에 발견했습니다. 그건 ‘귀신은 공경하되 이를 멀리 할 것’ 즉 ‘존경하는’,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샤쿠 “논어”에 나오는 말이지요.
우치다 이 귀신이라는 존재를 포용한다든가, 이해한다든가 하는 시도는 통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는 건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통하는 것이 리스펙트입니다.
말하자면, 경계선 너머에서 도래하는 거니까요. 도래했을 때에, ‘그들이 여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이란 건 말이죠, 우리 살아 있는 인간들의 가치관이나 판단기준으로는 고량(考量)할 수 없는 것이 등장했으니만큼, 모두가 획 하고 물러서서 거리를 두어 그 예의를 행하는, 그 예의만은 아무튼지 간에 통합니다. 이게 뭐라고 할까, 제가 말씀드리는데요, 정말로 엄청난 지혜라고 생각하거든요.
결국 그런 귀신 종류라는 것과는 커뮤니케이션이란 게 불가능한 겁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애초에 불가능했을, 외부에서 찾아온 것에 대해서도, 딱 한 가지, 인간 측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건 경의를 표하는 겁니다. 이것만큼은, 이 경의만큼은 아무리 귀신이라 할지라도 귀신이 그것에 감응합니다. 그 이외의 것에는 감응하지 않습니다. 이 얘기는 아마도, 고대인의 종교적인 신체적 실제 감각으로부터 온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여러가지 것들을 해 보아도 잘 안 되었는데, 이 리스펙트만큼은 전해졌습니다. 그것이 종교 의례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근데 있잖아요? 산 사람들끼리의 인간관계도 이거랑 똑같아요. 예를 들면 사랑은 잘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잖아요. 마음 깊숙이 넘쳐 흐르는 사랑을 갖고 있어도 상대방은 아주 둔감해하는 사례가 많이 있죠? 하지만 경의는, 이를테면 제가 샤쿠 선생에게 경의를 표하면, 샤쿠 선생은 그 사실을 반드시 알게 되는 겁니다.
샤쿠 예. 아마 그럴 겁니다.
우치다 이를테면 한 반에 50명 정도 있다고 치죠. 잘 모르는 아이들끼리 어수선하게 섞여 있는 경우에도, 경의라는 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딱 티가 납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경의는 퓨어 합니다. 인간적인 이해타산같은 걸 떠나서, 이 사람과는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하겠다 하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도 안 되고, 너무 깔보아도 안된다 하는, 그런 거리감에 관해서 매우 센서티브해져 있는 상태는 남들이 금방 알아차립니다. 솨아 하고 들어와도 무례한 자식이 되는 거고, 그렇다고 또 멀찍이 떨어져서 돌아서는 것도 너무 무정하니까요.
하지만 꽤 적절한 간격을 어떻게든 두려는 사람 같은 경우는,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나와는 적절한 관계를 두려고 한다’라는 걸요.
샤쿠 맞습니다.
우치다 그래서 사랑은 좀체 전해지지 않지만, 경의만큼은 전해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보다 경의가 우선’ 한다 하면, 과연 인간 자신들끼리의 경험을 귀신에게 투영한 것일까요, 아니면 귀신 종류와의 교섭의 경험, 즉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일까요? 저는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나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귀신과 만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지혜를 얻었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지 않겠어요?
(미시마 출판사: 귀신과 만남으로써, 인류는 비로소 경의를 발견해냈다는 이야기인데요. 이번에 저희 미시마 출판이 낸 책에서도, 아이들의 종교적 감성을 함양하는 첫걸음은, ‘무서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전개되어 있습니다. 이에 내용 일부를 소개해드립니다.)
우치다 아이들의 종교성을 함양해가는 데에 태고적부터 활용되었던 제일가는 것은, 아마 공포담일 거라고 보거든요. 무서운 이야기. 예로부터, 이야기꾼 역할을 맡은 아저씨가 아이들을 모닥불 주위에 앉혀놓고 다양한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아이들에게 하느님 얘기를 해도 이해하기가 꽤 어려울 것이므로, 우선 무서운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샤쿠 맞습니다. 저 어렸을 때에도 낮에 공원 아이들을 모아놓고서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아저씨가 있었어요……. 그 사람 지금 생각해 보면 직업은 뭐였는지 궁금해지기는 하네요. 이게 보통 재담꾼이 아니라서요. 다 듣고 나면 그날 밤부터 화장실은 못 갑니다.
우치다 가장 무서운 공포담은 공포를 부여한 실태가 무엇이었는지를 결국 알 수 없는 이야기이지요. (중략)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인식을 초월한 <가공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 ‘그것이 도래하면 여러 재액이 일어난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작법을 익힌다면 일시적으로 그 재액을 되가져 가 주시기를 기원하는 것만큼은 가능하다’. 그것이 공포담의 기본적인 구성입니다. 이는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초보적인 종교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혹은 게임이라는 모습을 통해, 공포담은 마찬가지의 설화 형식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것들 역시 발생적으로는 결국 ‘종교적인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겁니다.
- 『일본 종교의 ‘쿠세’ (日本宗教のクセ)』 220~221쪽
(옮긴이: ‘쿠세’에는 ➀ 유별난 점 ② 내세울 만한 점 ③ 중생 구제 등 다양한 의미가 있다.)
‘같잖은 합리주의’로부터의 탈각
샤쿠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대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짜여진’, 그러한 선인의 지혜를 이어받아, 똑같은 순서를 통해 접한다는 것이 점점 예의라는 것으로써 정비되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므로 오봉(お盆; 양력 8월 15일 - 옮긴이) 절기 때에도 순서를 상당히 중요시하는 지방이 있습니다. 우선 묘역에 가서 ‘무카에비(迎え火; 선조를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바깥에 나가 피워올리는 불 - 옮긴이)’를 피웁니다. 또한 오이로 말을 조각하는 한편, 가지를 갖고서 소를 조각하기도 합니다. 어서 오셨으면 하니 올 때는 말을, 다시 가실 때는 천천히 가시라는 의미에서 소를 만드는 까닭입니다. 흥미로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선은 ‘오가라(麻幹)’를 태웁니다.
우치다 ‘오가라(麻幹)’가 무엇인가요?
샤쿠 ‘오가라(麻幹)’란, 삼의 줄기를 벗겨낸 것입니다. 실을 뽑고 난 줄기를 태우는 거랍니다. 삼은 본래 일본에서는 중요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奈良)였는지 어딘지에서는 ‘스리바시(吊り橋)’를 불단 앞에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치다 ‘스리바시(외다리 - 옮긴이)’로 찾아온다는 걸까요?
샤쿠 어째서 혼령님에게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외다리 효과’* 같은 걸 노리는 걸지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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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거리는 다리와 같이 긴장되는 상황에서 상대와 단둘이 있게 되면 사랑에 빠진 것과 같은 효과가 일어난다는 연애 속설 – 옮긴이)
우치다 두근거리네요 (웃음)
샤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웃음). 아무튼 이렇게 다종다양한 사례가 있는 겁니다. 순서와 관련해서는 오늘날에도 엄밀하게 지키는 분들이 있는 반면, 점차 점차 간략화된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오봉 행사의 복잡한 순서를 윗세대로부터 확실히 이어받는 것 역시, 이에(家)* 제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던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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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로부터 자손으로 이어지는 혈연에 의해 결속된 가계. 이러한 형태로 보존되어 전해지는 전통, 기예, 재산 등을 포함한다. 1945년 이전까지는 민법상 가장의 권한이 강화된 호주제가 존재했다. 현재의 일본 호적제도나 사회관습에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 - 옮긴이)
우치다 그렇지요. 가독(家督; 옛 민법상의 호주의 법적 지위 - 옮긴이)을 잇는 자에게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것 같은게 있었겠지요.
샤쿠 예. 그리고 또한 일본의 오봉에는 좀 흥미로운 데가 있는데, ‘아귀 보시[施餓鬼]’란 게 있잖습니까. 불교 종단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만, 아귀도에 떨어진 사람을 위해 공양하는 겁니다. 많은 지역의 사찰에서는 아귀 보시를 위한 ‘소토바(卒塔婆; 위가 탑처럼 뾰족하고 갸름한 나무 판자 - 옮긴이)’ 를 배부하는데, 그걸 댁에 가져들 가셨다가 나중에 묘비 뒤에 꽂습니다. 성묘하러 가 보면 때때로 주위에 이런 ‘소토바’가 많이 세워져 있는데, 그것은 아귀 보시를 위한 것입니다. 즉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귀도에 떨어진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공양합니다. 말하자면 결코 자기 근연의 선조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다른 세계에 가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또한 오봉의 풍경입니다. 이것이 일본 민중의 생명관이지요. 흥미롭습니다.
우치다 죽은 이에 대해, 살아 있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 형식을 갖춰 전해진다는 말씀이군요. 종교적 영성의 가장 기본이 바로 그런 겁니다. ‘공양 공양 하는데 상대는 이미 죽어서 알지도 못하잖아 멍청아’ 하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꼴사나운 합리주의자들 말예요. 그럼에도 종교의 출발점이란, 죽은 이한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죽은 이에게서도 메세지가 돌아온다는 믿음에 있을 겁니다. 현실 세계에 있는 인간에 비하면 많이 희미하기는 하지만, 시그널을 발신한다든가 수신하는 일은 가능하고, 죽은 이가 되었든 귀신이 되었든 그것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말이죠, 종교성의 가장 핵심 되는 부분은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샤쿠 이 책 <일본 종교의 ‘쿠세’>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뤄지는 테마라든가 함의되어 있는 메시지가 바로 ‘우리 모두 종교적 성숙을 지향하자’ 인 걸요. 매번 그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읽어 보시면 바로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오만한 합리주의는 커뮤니케이션의 회로를 스스로 끊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기가 다루는 범위밖에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은 이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조금만 자기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가다듬으면, 무럭 무럭 솟아오르게 됩니다.
(미시마 출판사: 일본 종교의 큰 특이사항이기도 하거니와, 죽은 이와 교신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가지 모습이기도 한 ‘성묘’에 대한 내용이, 이 책의 제 3장 ‘성묘의 신불 습합론’에서도 등장합니다. 성묘의 미래는 공동체의 미래이기도 하다는 말씀의 일부를, 여기에 인용하여 소개드립니다.)
우치다 성묘라는 것은 세계 각지마다 존재 양상이 전부 다릅니다. ‘죽은 이를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란, 자신들 공동체의 계속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라는 이야기와 통하므로, 여러분도 제각기 고생을 하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아직 인류는 그 정답을 발견해내지 못했습니다.
샤쿠 지금 일본에서는 망자 의례를 주로 불교가 담당하고 있습니다만, 향후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지난 15년 정도 쯤 변화를 해 왔던 망자 의례입니다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해 급거 변화가 가속되었습니다. 과연 현대인은 앞으로 어떻게 망자 의례를 행해 나갈 것인가. 귀추를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 『일본 종교의 ‘쿠세’ (日本宗教のクセ)』 149쪽
출처: https://www.mishimaga.com/books/tokushu/005519.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 La miseria y el esplendo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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