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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오르그 그루드지에프 (2)
    인용 2023. 10. 13. 11:19

    (이하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게오르그 그루드지에프 (1)

    게오르그 그루드지에프 (3)

     

    그루드지에프가 가르치는 바로는 의식에는 네 가지 상태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제 1의 상태는 수면이다. 제 2의 상태는 보통의 부르주아 생활 태도인데, 이것은 '눈뜨지 않은 의식'이라고 비꼬아 부르고 있다. 제3은 자각의 상태(이것에 관해서는 곧 설명하겠다)며, 제4는 '객관 의식'의 상태다.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제3의 '자각'이다. '아웃사이더'가 이 상태를 체험하고 있는 실례는 앞에서 수없이 보아왔으며, 그 좋은 예는 마리아와 같은 자리에 있었을 때의 '황야의 이리'며, '혼잡한 런던의 상점'에 앉아 있는 예츠다.

    이 자각에 관하여 우스뺀스끼는 매우 명석한 해설을 붙이고 있다. 보통때에는 무엇인가 모양을 보는 경우, 주의는 외부로 향해져서 "본인으로부터 대상으로"라고 하는 방향을 취한다. 또 생각이나 회상에 열중해 있는 경우에는 내부로 주의가 향해진다. 그러나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동시에 외부와 내부에 주의가 향하는 적이 있으며, 그럴 때 사람은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진정 여기에 있는가"라고 자문한다. 이것은 자기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강렬히 의식한 상태다. (문학에서 볼 수 있는 그 좋은 예는 똘스또이의 <코자크>라는 소설에서 오레닌이 처음으로 산을 보았을 때의 완전한 '자각' 상태리라.) '자각'의 순간은 생각지도 않았던 새로운 환경,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들 속에 들어간 경우, 예를 들면 여행하고 있을 때와 같은 때에 찾아오는 경우도 있고, 감정이 고양됐을 때, 위험에 직면했을 때 등에도 찾아온다고 우스뺀스끼는 말한다.

    의식적인 수련에 의하여 자각을 얻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시험삼아 자기의 손목시계에 눈을 주고 지금이 몇 시인가 보는 데에 주의를 집중하는 한편, 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의식해보려고 노력해보라. 그 사이에 시계와 자기를 동시에 의식하는 순간이 틀림없이 찾아올 것이다. 그렇지만 이 상태는 몇 초도 계속되지 않는다. 바라보고 있는 자기만을 의식하든지, 시계의 눈금에만 신경을 쓰든지 어느 쪽이다. 시계와 자기를 동시에 바라보는 이 자각의 순간이 그루드지에프가 말하는 제3의 상태다. (단지 청년 시절의 니체처럼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다분히 연극적인 사람은 상황 밖에 자기를 두고서 상황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다.) 즉 '아웃사이더'류로 말하면 우리들은 자신 그 자체와 자기의 개성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며, 개성을 창유리에 비유하면 우리는 개성의 유리창에 꽉 붙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로부터 떨어진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없다. '자각'이라는 것은 일보 물러서서 '자신(창유리)'과 '본인'이라는 전혀 별개의 외계를 동시에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각을 추구하여 의식적으로 수련을 쌓은 결과로서 이상하게 강렬한 감정이 생기는 것에 대해 우스뺀스끼는 말하고 있는데, 분명히 그는 이제까지 아웃사이더가 간과하고 있던 해결법을 하나 발견했다.

    [언젠가 나는 렙스끼 거리를 향해 리타이니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자각하는 것에 주의를 집중할 수 없었다. 마음이 심란하고 1분마다 주의의 방향을 잊어버리고 또 곧 그것을 다시 생각해내어 또 잊어버린다. 최후로 나는 자신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적어도 다음과 같이 되기까지는 "나는 자각한 자다" 하는 것에 주의를 집중하려고 결심하여 왼쪽으로 꺾어갔다. 그리하여 점점 정신의 집중을 중단함이 없이 다음 거리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나는 자각을 계속하면서 다시 렙스끼 거리 쪽으로 접어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이러한 노력을 다한 후에 오는 평온과 자신에 충만한 불가사의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렙스끼 거리 쪽으로 접어든 곳에 나의 담배를 특제하여 주는 담뱃집이 있었으므로 자각을 계속하면서 한번 그곳에 가서 담배를 주문하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 나는 다프리체스까야 거리에서 혼미로부터 깨어났다. 그것은 조금 전의 장소에서 꽤 떨어진 곳이었다. 차에서 인쇄소로 가는 도중에 정신을 차렸는데, 그때의 기분은 실로 신선하였다. 의식을 되찾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곧 모든 것을 생각해냈다. 렙스끼 거리를 향해 걷고 있었다는 것, 자각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 담배 일을 생각했다는 것, 그리하여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갑자기 깊은 잠 속에 빠져버리는 것처럼 생각되었다는 것ー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렇게 잠에 깊이 빠졌어도 나는 틀림없이 일관된 동작을 행하고 있었다. 담뱃집을 나오자 그 길로 리타이니 거리에 있는 나의 집으로 가서 인쇄소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다프리체스까야 거리를 차를 타고 가는 사이에 퍼뜩 잊었던 것을 깨달았을 때와 같은 불안을 느꼈다. 그리하여 자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데에 퍼뜩 마음이 쓰였다.
    ー 우스뺀스끼, <기적을 찾아서>]


    "지구라는 혹성에 사는 자를 구원하는 데에는 무언가 새로운 기관을 그들의 체내에 이식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타인의 죽음은 물론, 자기의 죽음도 불가피하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느끼게 되도록 하는 기관을 심어주지 않으면 허사다"고 말했다. 여기에서도 계고는 종교적인 색채를 띤다. "너의 궁극적인 문제를 자각하라"고 하는데…… 그러나 "존재가 찾아들 길 없는 허구의 집"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하지 않은가를 지금의 우리들은 잘 안다. 문제되는 것은 존재다. 인간은 더 살고 더 커다란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한정의 원리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무엇에건 일정한 시간, 일정한 기한이 있다"고 그루드지에프는 우스뺀스끼에게 말하고 있다. "어떤 가능성도 어떤 일정 시간 내에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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