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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신기한 사람이었다.인용 2023. 10. 11. 13:31
「괜찮은 어른」 (조진주 『언젠가 반짝일 수 있을까』 111~125쪽)
중학교부터 석사까지, 켄터 선생님과 9년을 공부하며 크게 혼난 적이 딱 두 번 있다. 한 번은 카페에서 예의 있게 돈을 건네지 않아서였고, 다른 한 번은 클래스에 있는 다른 친구를 시기하고 질투해서였다. 한국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혼난’ 것도 아니었다. 선생님이 무섭지 않았고 모욕감을 느끼지도 않았으니까.
다만 혼나는 주에는 레슨을 받지 못했다. 선생님은 레슨 시간에 레슨을 하는 대신,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 차분하고 진지하게 말해줬다. 나의 말도 안 되는 변론도 충분히 들어줬다. 난 선생님에게 변명하며 스스로 모순을 느꼈고, 내 행동을 부끄러워했다. 선생님은 강압하는 게 아니라 안정적인 대화를 통해 내 생각을 스스로 바꾸게 했다.
선생님은 신기한 사람이었다. 요가를 하고, 육류를 먹지 않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이자, 유기 동물을 임시 보호하며, 무려 2000년 즈음부터 당시엔 없다시피 했던 전기자동차에 NOPEC(No Opec, 산유국조합 거부)이라 쓰인 주문제작 번호판을 달고 운전했다. 선생님 유머에는 풍자(sarcasm)가 있었지만 늘 유쾌했고, 어린 내가 농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엉뚱한 소리를 하면 환하게 웃으며 안아주곤 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내게 이런 선생님은 그야말로 신박한 인간이었다. 엄마는 선생님을 ‘이상주의자’라고 했다. 엄마의 말은 ‘현실 감각이 없다’는 말과 동일하게 들렸다.
선생님은 따라가기 힘든 롤 모델이기도 했다.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고, 레슨 시간에 10분 이상 늦지 않으며, 그 누구도 편애하지 않았다. 항상 기분 좋은 나무 냄새가 은은하게 나고 권위적이지 않으며 부드럽지만 그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는, 내면이 견고한 사람이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을 때도, 자신 안에 있는 신념과 진실을 지켜내고야 마는 사람.
나는 그런 선생님을 이상적인 인간으로 여기게 됐다. 어쩌면 선생님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 즉 지식과 문화는 아무도 훔쳐가거나 빼앗을 수 없다’는 유대교적 인식을 깊숙이 심어줬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처럼 내적 가치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됐으니까.
(…)
실기시험을 공결 처리 받기 위해 음악제 콩쿠르에 ‘국제 콩쿠르’라는 명목으로 참가했다. 당시 한국에서 내게 레슨을 해주던 선생님은, 아스펜에 ‘폴 켄터’라는 선생님이 있고 아주 좋은 분이라며 기회가 되면 레슨을 받아보라고 했다. 음악제 내의 담당 선생님은 정말 좋은 분이었지만 첫 4주만 있었기 때문에 콩쿠르 준비 막바지에는 자리를 비웠고, 답답해진 엄마와 나는 ‘폴 켄터’라는 사람을 한번 찾아가보기로 했다.
켄터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맛없기로 유명한 구내식당에서 학생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여름 남방과 몸에 맞지 않는 큰 바지를 입고 버켄스탁 샌들을 신고 있는 선생님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
무서울 게 없던 중학교 1학년에게 그게 완곡한 거절로 들렸을 리가 없다. 나는 선생님의 “알겠다”는 말을 “그래! 지금! 당장! 보자!”로 알아들었고, 연습실을 지키고 있던 엄마에게 돌아가 “지금 선생님을 볼 수 있게 됐어!”라며 악기를 싸들고 선생님 레슨실을 물어 물어 찾아갔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미 레슨을 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헷갈렸지만(‘어, 선생님이 지금 바로 보자고 했는데 왜 다른 애 레슨을 하고 있지? 이상하네’라고 생각했다) 그 앞에 서서 레슨이 끝날 때까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입술과 주먹을 앙다문 채 기다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아마 ‘쟤 대체 왜 저러지?’라는 생각을 하며 무섭기도 했을 것 같다. 만약 어떤 애가 날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면 무서워서 레슨실 밖으로 못 나왔을 것 같다.
(…)
그때 나는 내 나이와 수준에서는 너무 어려운 쇼스타코비치 협주곡을 연주해야 하는 사정이 있었다. 아스펜국제음악제 내의 콩쿠르에 참가해야만 공결 처리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연주해보는 20세기 곡을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슨을 시작하자 그 난해한 곡이 난생처음 이해되기 시작했다. 음악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경험한 나는 척추 신경이 바짝 서는 희열을 느꼈다. 그 순간 ‘바로 이거다’라고 느꼈다. 이 사람이었다. 이후에는 그런 짜릿한 감각을 느껴본 적이 없다. 나는 선생님과 어떻게든 공부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유학을 가게 해달라며 아빠를 졸랐다. 그렇게 클리블랜드에서 선생님과 도합 9년을 공부하게 됐다.
언젠가 친척들까지 모인 가족 모임에서 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내가 ‘작은 주택 지하에 나만의 도서관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자 친척 어른 중 한 명이 모두 그렇게 살기 바라지만 그런 얼토당토않은 꿈을 꾸는 건 비현실적이니 기준을 낮추라며 역정을 동반한 맨스플레인을 시전했다. 당시 투병 중이던 아빠는 아빠답지 않게 버럭 화를 냈다. 네가 뭔데 얘 미래에 대해 된다, 안 된다 같은 말을 하냐고. 네가 못한다고 내 딸도 못할 줄 아냐고. 그딴 소리 할 거면 다시는 보지 말자며 소리친 아빠 덕에 가족 모임은 이상한 분위기로 끝나버렸다. 친척들은 아빠가 아파서 예민해졌다고 말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좀 혼란스러웠다. 내 꿈이 왜 그렇게까지 논란이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동안 고민하다 선생님한테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며 내가 뭘 잘못한 건지 궁금하다고 했다. 선생님은 곰곰이 생각하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그들이 꿈꾸지 못한 걸 꿈꿨기 때문이야. 보통 사람들은 커다란 집, 좋은 차, 높은 연봉 같은 걸 바라지.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훨씬 더 아름답고 고귀한 거야.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공간과 지식의 영유를 꿈꾸는 거지. 그건 아무나 바랄 수 있는 게 아니야.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네 내면의 아름다움이거든. 어떤 사람들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걸 꿈꾸는 사람을 보면 화를 내. 너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너를 보호한 거지. 앞으로도 계속 그러실 거고 말이야.”
(…)
선생님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믿어주고 보호하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어릴 때는 내 꿈을 지켜줬고, 지금은 내 기준을 지켜준다. 그는 예술이라는 명분으로 망나니짓을 정당화하는 걸 혐오하는 사람이다. 선생님은 내게 사람으로서 지켜야 하는 선을 분명히 알려줬다. 예술가로서의 내 감각과 본능을 100퍼센트 신뢰하며 내가 하려는 일과 가려는 길에 대해 안 된다는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선생님의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보들레르의 시를 읊었고, 학교가 정한 틀과 경계선을 최대한으로 밀어내며 내게 의미 있는 길을 걸어갈 준비를 했다. 졸업 연주에 게스트 아티스트를 세우기도 했고, 탱고와 프랑스 음악을 같이 연주하기도 했다. 같은 클래스 친구들도 졸업 무대에서 학교의 제지 없이 바흐 전곡 연주나 행위 예술을 함께하는 연주 등 실험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다.
(…)
선생님은 (…) 오랫동안 초인적인 양의 일을 해 왔다. 미국 음악대학은 학생 수와 수업의 양이 곧 돈으로 직결되니 그걸 협상 역량으로 이용하신 것이다. 재능 있는 학생들을 학교로 데려오고 조금 능력이 떨어지는 학생이라도 그의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며 매주 35~40시간을 수업에 몰두했다. 이어지는 연습과 연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레슨의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잠은 언제 자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선생님의 정신으로 세상을 보는 건 때로는 수고스러운 일이다. 무엇도 쉽지 않다. 세상에는 옳지 않은 일이 참 많아서 일일이 다 상대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은 차고도 넘치며, 가끔 그 손해가 너무 커 타협하게 될 때는 스스로에 대한 경멸감이 나를 짓눌렀다. 나이가 들며 얼마나 양보하고, 얼마나 쟁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조금씩 생기고 있지만, 예전에는 이런 상황에 대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이 유일했다. 나는 선생님이 텍사스의 다른 학교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종종 전화를 걸어 귀찮게 했다.
강의를 하고, 비영리 단체를 시작하면서 선생님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선생님은 “우리가 하는 일은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음악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야. 사람을 가르치는 거야”라는 말로 자신의 동료가 된 나를 축하해줬다. 단순히 아이들이 좋은 사람이 되도록 이끌라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지식을 담고 있는 인간이라는 큰 그림을 봐야 좋은 선생이자 연구자가 될 수 있다는 당부의 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심각하게 말을 못 알아듣는 학생 때문에 조언을 구했을 때, 선생님은 말했다. “별거 없어. 그저 포기만 하지 마.”
선생님은 늘 이랬다. 자신의 ‘해답’을 먼저 제시하는 대신, 내게 끊임없이 질문하거나 수수께끼 같은 말로 대화를 끝내고는 했다. 선생님의 레슨도 그랬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개념이나 질문을 던진다. 나는 일주일 내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생각하다 지금껏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테크닉이나 해석법을 찾곤 했다. 선생님의 깊이 있는 질문에 답하려면 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롤 모델이 소크라테스인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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