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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환상의 파시즘 - 무라카미 류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10. 12. 13:31
무라카미 류의 초창기 걸작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을 최근에 다시 읽어보았다. 1984년부터 86년까지 잡지에 연재된 소설이었으므로, 40년 전쯤 당시 시점에서의 ‘가까운 일본의 미래’가 묘사되어 있다. 작가의 상상이 빗나간 면도 있지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중한 부분도 있다.
다국적 산업이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고, 일본이 미국의 속국으로서 그 엄청난 수탈의 대상이 되며, 통화정책의 실책으로 중소기업이 속속 파산하고, 거리에는 실업자로 가득하며, 사회적 불안이 한계에 이를 정도로 치솟는 등의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이 소설은 마치 며칠 전에 쓰여진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필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점은, 언론으로부터 ‘파시스트’로 불리며 미국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주인공 스즈하라 토우지의 사상이, 현대에 불거진 ‘가속주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가속주의의 의미는, 차세대[post] 자본주의를 전망하는 차원에서의 사상인데, 미국에서 발흥한 이 특수한 의미의 가속주의는 실리콘밸리의 젊은 기업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다.
자본주의는 이미 한계에 봉착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 옹호나 정치적 올바름, 환경 보호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간섭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어느정도는 ‘좀비화(원문 耐えやすい; bearable – 옮긴이)’되었고, 그렇기에 오히려 연명하고 있다. 그보다는 자본주의를 한꺼번에 끝장내는 게 낫다. 이를 위해 사회복지 제도나 국민개보험제도를 폐지하고, 의료 및 교육을 상품화하여 돈이 없는 인간은 거기에 접근할 수 없게 한다. 그렇게 해서 약한 개체를 도태시키고, 살아남을 능력이 있는 강한 인간들만으로 이루어진, 포스트 자본주의 하의 신세계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냉혹하고도 비정한 사고방식이다.
소설 속 스즈하라 토우지는 위와 같은 맥락의 사상을 그야말로 판박이로 주장한다.
“중요한 건, 인간이 원래 동물이었음에도 이제는 너무나 동물로부터 벗어나 버렸다는 것뿐이다. 인간은 한낱 동물이다. (...) 나는 인간을 동물로 환원시키겠다.” “미래는 행복으로 가득해야 한다는 망상이 노예들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일본을 철저히 파괴해야 한다” 고 스즈하라는 중얼거린다.
이와 같은 파괴적인 이데올로기에 많은 일본 국민은 박수 갈채를 보내며 그의 지배를 간청하게 되는데, 이런 소설 속 전개에 위화감을 느낄 현대 일본인 독자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적지 않은 수의 일본인들은 이미 ‘인권 및 정치적 올바름’을 비웃으며, 약한 개체는 나가 죽으라고 거드럭거리는 정치가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강자’라고 믿고 있기에 그러는 걸까, 아니면 절망 끝에 ‘나 혼자 죽을 수는 없다’며 모두 망하기를 빌기에 그러는 걸까. 모르겠다.
(일본 농업 신문 논점 9월호 / 9월 14일)
(2023-09-25 08:4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아이키도(合氣道)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 <조삼모사화하는 세상>, <저잣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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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무라카미 류의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 번역본은 2023년 현재, 절판되어 있습니다.
80년대에 번역출간되었으므로, 접근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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