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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합(習合)과 음악 - 창작과 상상에 관한 대화’ 우치다 타츠루 X 고토 마사후미 대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3. 6. 23. 15:09
(후회되는 일은 안 시켜드리겠으니, 먼저 재생 버튼을 누르고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도우조💁.)
<일본 습합(習合)론>의 착상점은, 음악에 있다!
우치다 일본 열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이라서, 중국 대륙이나 한반도를 경유해 여러가지 제도 문물이 들어옵니다. 하지만, 열도의 동쪽은 태평양인지라, 더 나아갈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바깥에서 들어온 것은 열도에 그치고, 열도에 축적되어, 뒤섞였습니다. 그렇게 일본의 독자적인 하이브리드 문화가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가토 슈이치의 잡종문화론입니다. <잡종문화론>은 원리론이므로, 저는 제가 쓴 <일본 습합(習合)론>을 통해, 외래의 제도문물과 토착의 그것이 ‘척 들러붙’으므로 하여,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새로운 것이 태어난 사례를 여러가지 들며, 구체적으로 논해보았습니다.
이를테면 ‘기미가요’는 영국인 군악대장 펜턴이 외교 프로토콜상 ‘국가(國歌)’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꺼내, ‘사쓰마비와(옛 일본의 예악 - 옮긴이)’에 속하는 ‘호라이산(蓬莱山)’의 가사에 선율을 붙여, 독일인 에케르트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개작(改作)하여 만들어진 곡입니다. 일본의 선율이 아닌, 구태여 서양의 선율에 일본 고래(古來)의 가사를 실은 것을 ‘국가(國歌)’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정말이지 습합(習合)적이어서, 이런 것이야말로 ‘일본스러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몇 년 전에 프랑스에서 일본의 60~90년대 팝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나왔습니다. 그에 관해 올리비에 람 씨라는 평론가가 <리베라시옹>지(紙)에 ‘1970년대 초두에 일본 팝은 동시대 전 세계 팝의 ‘폴 포지션(pole position)’을 제패했다(그러나 일본 바깥의 사람은 아무도 그것을 몰랐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일본 팝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핫피이엔도’ (호소노 하루오미, 마쓰모토 다카시, 오타키 에이이치, 스즈키 시게루로 결성된 일본의 록밴드) 를 꼽았습니다.
핫피이엔도(해피 엔드)는 록의 선율과 리듬에 일본어의 음운과 일본의 서정을 실은 ‘일본어에 기초한 락’을 목표로 했던 밴드였습니다만, 그들이 한 ‘습합(習合)’의 시도가, 동시대에 있어서는 팝 뮤직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첨단적이었다는 람 씨의 평가는 저로서는 몹시 기뻤습니다.
오타키 씨 자신도 일본의 민중음악은, 메이지 시대부터 줄곧 외래의 것이 일본 전래의 것과 ‘척 들러붙어’ 만들어졌다는 점을 NHK 라디오의 ‘일본 팝스 전기’에 출연해 지적했는데요, 핫피이엔도의 음악도 ‘버펄로 스프링필드’의 음에 마쓰모토 타카시 씨가 쓴 일본어 시를 ‘척 들러붙게’ 한 점에서, 일본의 전통적인 문화 섭취의 모습을 충실히 답습한 것이었다고 오타키 씨는 방송의 끝부분에서 요약했습니다.
제 ‘습합(習合)론’의 골격이 되는 아이디어는, 사실 오타키 씨의 ‘NHK 일본 팝스 전기’에서 나왔습니다. 오타키 씨가 구사한 음악사의 방법을 제가 조금 확장해보았습니다. 따라서, <일본 습합(習合)론>은 ‘음악으로부터 인스파이어된 서책’ 인 겁니다.
고토 과연 그렇군요. 제 두 번째 솔로 앨범은, 일본어와 영어가 혼재된 앨범이었는데요, 그걸 우치다 선생님께 보내드렸을 때, ‘이 앨범의 구성은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록 앨범은 아니지 않느냐’ 하고 메일을 보내주셨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때, ‘문체’ 얘기도 나왔던 것입니다만, 메일에는 ‘나다운 문체를 추구하며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나다운 문체가 두드러지는 거다’ 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제 주위의 동료 가운데에도 영어와 일본어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느날 그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 오오 해 주었고, 참고가 되었습니다.
우치다 저는 다수의 연원에서 어우러져 나온 음악을 어쨌든 좋아하는데요. 60년대에 히트했던 곡 중에 호세 펠리시아노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있습니다만, 초반부는 마마스&파파스 오리지널대로 영어로 부르기 시작하는데요, 중간부터 스페인어로 바뀝니다. 언어가 바뀌면, 발성이나 기타 연주도 바뀝니다. 미국의 팝과 스페인 음악이 습합(習合)하고 맙니다. 그 점이 굉장히 멋져요.
경쟁과 다양성은 트레이드오프 관계
고토 요새 ‘Radio Garden’이라고, 전 세계의 커뮤니티 FM에서 방송되고 있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앱이 있거든요. 브라질의 커뮤니티 라디오일 때도 있고, 인도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리얼타임으로 방송되는 음악이 들립니다. 그것이 매우 재미있어요. 주류 음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발견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음악으로 성공하는 것’이란 미국에 진출한다거나, 영어권 시장에서 히트하는 것이라는 식의 착각이 있습니다. 그런 데서 팔리는 게 마치 ‘세계 음악’ 인 것처럼 날조되는 일이 있습니다만, Radio Garden을 듣고 있으면, 세계 음악이란 각각의 지역, 지역마다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치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핫피이엔도적으로 자신만의 유니크함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적인 기쁨을 깊게 해주는 일이고, 자신들이 아니고서는 대체할 수 없는 니치(niche)한 음악을 하는 것이 행복인데도, 어째서 세계 시장을 갈망해버리고 마는 것이지? 하는 마음을 품게 되곤 합니다. 뮤지션으로서 어떤 길을 걸어야 재미가 날까, 하는 거예요.
우치다 학교 교육도 마찬가지지만, 경쟁과 다양성은 양립하지 않아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경쟁하고 있는 사람들을 단일한 ‘판단 기준’ 아래 수치적으로 고량(考量)하여, 상대적인 우열을 판가름하는 구조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신체 능력을 본다 하는 때에, 축구를 하는 사람과 무용을 하는 사람, 스모를 하는 사람을 모두 똑같은 ‘판단 기준’으로 가늠하는 일은 불가능하지요. 이 상황에서 뭔가 심사하려고 하면, 이를테면, 모두에게 100미터 달리기를 시켜서 그 기록을 신체 능력의 수치적 지표로 하는 식의 단일한 ‘판단 기준’으로 끼워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무의미한 일이지요. 하지만, 100미터 기록만으로 운동선수로서의 우열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면, 모두가 어쩔 수 없으니, 필사적으로 100미터 달리기 트레이닝을 하게 됩니다. 이런 거, 별 쓸모도 없지 않나요.
음악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이라든가 실패라는 말을 꺼내면, 반드시 수치적인 ‘판단 기준’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똑같은 것을 하면서, 그 가운데 누가 가장 ‘팔렸는가’를 염두에 두게 됩니다. ‘남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을, 남들보다 약간 더 잘하는’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됩니다. 경쟁을 하고 있으면, 모두 얼굴 표정이 비슷해지고 맙니다. 경쟁하면 다양성을 잃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씨가 예전에 인터뷰에서, 스튜디오 지브리는 국제적인 시장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일본 어린이들이 관람할 영화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세계 시장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해도, 그것은 ‘보너스’같은 것이므로,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한다’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아마, 세계 시장을 겨냥하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하면, 시장 조사를 한다든지, ‘유망한 기획’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걸 꺼려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고토 젊은 뮤지션에게 용기가 되는 말씀입니다. 결국 똑같은 것을 더 잘하는 녀석이 팔린다는 현상을 지적해주셨는데, 매우 흥미롭습니다.
프로듀싱을 하다 보면, 제 주위에도 팔리느냐 안 팔리느냐로 상처 받는 어린 친구들이 저를 포함해 많습니다만, 하고 싶은 대로 작품을 실현시키는 것이 성공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희망적으로 여기는 것은 오타키 씨라든가 호소노 씨 등은 애초에 천재이기는 합니다만, 시간이 지나 30년, 40년 뒤의 서구에서 유니크한 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이 감각은 소중하다고나 할까, 일테면 지금 좋은 소리 못 들어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친절하게 쓰고자 하면, 에너지가 솟아오른다
우치다 맞아요. ‘팔리는 작품’과 ‘살아남는 작품’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작품이 100년 뒤에도 readable한 책, audible한 음악인가의 여부와, 리얼 타임으로 ‘팔린다’든가 ‘평가받는다’의 사이에 반드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시점에서 굉장히 팔렸던 작품이, 그저 소비될 뿐이고, 몇 년 뒤에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그런 일들은 흔하니까요. 그보다는, 역사의 풍설(風雪)을 견디고 살아남는 작품이 개인적으로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크리에이터는 그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살아남는 작품’이란 대체적으로 ‘이상한 작품’이지요.
‘이상한 작품’은 대체로 팔리지 않습니다. 근데 신기하게도, ‘이 작품의 진짜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놈은 나 말고는 거의 없겠거니…’ 라고 생각해주는 팬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원 봉사하는 ‘전도사’가 되어줍니다. ‘이렇게나 멋진 작품인데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마음이 있으니 전도 활동에 기합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어느 시기에 전국적으로 팔려서,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던’ 작품보다도, 쫄딱 망해버렸지만 ‘이 작품의 가치를 스스로가 세상에 전하지 않으면, 누가 전하랴’ 하는 타입의 열성 팬을 세대를 초월해 가질 수 있는 작품 쪽에 역사를 살아 남는 힘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고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힘이 됩니다. 확실히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굉장한 에너지가 됩니다.
우치다 한 사람이라도 칭찬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 든든합니다. 근데,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또 하나, 굉장히 에너지가 나오게 되는 계기가 있습니다. 그건 말이죠, ‘남들에게 친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문장을 쓸 때, 좌우지간 ‘독자에게 친절하게’ 하자는 마음을 먹고 쓰려 합니다. 그러면 쓸 때 신이 나고, 써내려가면서 점점 힘이 솟으니까요.
‘친절하게 쓴다’는 것은 이를테면, 설명할 때 대충 하지 않는다, 거짓말하지 않는다, 근거 없는 내용을 쓰지 않는다, 논리가 통하지 않는데도 통하는 척 하지 않는다…든가, 그런 것들입니다. ‘친절하게 쓴다’는 것은 ‘간단하게 쓴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독자의 지성과 독해력에는 신뢰를 둡니다. 그래도, 될 수 있는 한 술술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도록 노력을 합니다.
‘평가받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게 되면, 쓰고 있는 현재와, 평가받는 미래 사이에 시간차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훗날 높이 평가받아서, 그렇게 기운이 나게 되고 보면, 쓰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는 아직 기운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친절하게 쓴다’ 하게 되면, ‘지금 여기’서 바로 기운이 나게 됩니다.
엄청난 재능이 있음에도, 지금 한 가지 분야에 넓이나 깊이가 없는 사람이 있지요. 그들을 보고 있자면, 대체로 ‘친절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한테 얼마나 재능이 있는가, 센스가 좋은가, 그런 것을 어필하는 데에는 상당히 열심입니다만,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하려는 자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뭐가 어찌 되었든 자신의 작품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될 수 있는 한 ‘친절하게 하자’고 마음 먹어 봅니다. 그렇게 하면 말투도, 작품을 프리젠테이션하는 방식도, 매우 달라질 거라고 보거든요.
고토 선생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그저 간단히 해서, 독자에게 읽기 쉽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시죠.
우치다 맞아요. ‘친절히 함’은 ‘간단히 함’과는 다릅니다. ‘간단히 함’이란, 상대를 얕잡아보는 것이라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 태도는 바로 간파당합니다. 결코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선사하지 않는 것이 ‘친절’입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꽁치의 맛>을 보면, 동급생들이 돈을 모아, 홀랑 영락해버린 중학교 시절의 은사에게 전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모두한테서 맡아둔 돈을 가지고서, 류 지슈가 도노 에이지로에게 전해줍니다. 그때, 선생님에게 결코 굴욕감을 선사하지 않으면서 ‘베푼다’는 지극히 곤란한 미션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 장면이 참으로 볼만합니다. 그러한 과제를 떠맡음으로써 인간은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이 장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친절하게 군다는 것은 실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예요. 그런데, 친절해짐으로써 사람은 성숙합니다.
고토 제가 음악을 만들 때를 떠올려보면, ‘신뢰한다’ 는 식으로 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흥미진진함을 알아주는 자식이 분명 있다, 같은 식으로요.
우치다 맞아요. 독자에게 ‘눈짓’같은 것을 발신하면, 그것을 감지해 주는 사람이 있지요. 오타키 씨는 1곡을 만드는 데 20곡 정도의 인용을 집어넣는다고 하는데요, 그것은 리스너에 대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리스너가 듣고서, ‘아, 이 프레이즈는 거기서 따 온 인용이네’ 하고 알아채면, 그 순간에 작곡가와 리스너 사이에 ‘핫 라인’이 연결되니까요. 그것이 무엇으로부터의 인용인가, 아는 인간이 적으면 적을수록 연결은 ‘핫’해집니다.
팝을 막 듣기 시작한 중학생이 들어도, ‘이건 그거네’ 하고 알아챌 수 있는 요소가 2개나 3개 쯤은 있는, 10년 20년 집중적으로 들어온 deep한 청중이 들어도 ‘이걸 알아차린 인간은 세상에 나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러 층위의 리스너 모두를 위해 오타키 씨는 ‘선물’을 채워넣습니다. 그런 것을 친절이라 말할 수 있겠다고 봅니다.
뿌리를 끊었기에, 외래의 것과 만난다
고토 요즘 생각하는 건데요, 순문학을 읽는다 칩시다.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작가도 물론 흥미롭지만, 이것이 번역되었다손 쳐도, 해외 사람들이 그걸 읽는 모습을 당최 상상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어서요.
한편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씨를 예로 들면, 저와 동세대인 해외 록 뮤지션들도 읽습니다. 문득 떠오른 게, 그가 ‘습합(習合)’을 체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치다 과연,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우선 영어로 썼다는 모양이니까요. 우선 영어로 쓰고서, 그것을 스스로 일본어로 번역하는 수고를 들였습니다. 그것은 아마 무라카미 씨가 일본의 문학 전통으로부터 연을 끊고자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요.
음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때까지의 일본 음악이 가진 전통이라든가 인습과 단호히 연을 끊는 데서 출발하고자 마음먹는다면, 별안간 외국어로 부르기 시작하든가 하겠지요.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한 번 자신의 국내적인 ‘뿌리’를 끊어내는 일을 하지 않으면, 외래의 것, 이물(異物)과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제시하는 그 땅에 이르라’ 고 명령합니다만, 그것은 자신의 집에서 나와, 황야를 헤매지 않으면 ‘신’과는 만나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것과 같은 겁니다.
무라카미 씨는 어찌됐든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을 싫어했습니다. 따라서, 일본 근대 문학의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지점에서 ‘스타트’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영어로 쓴다든가, 미국 문학을 집중적으로 읽는다든가 함으로써 국내적인 ‘뿌리’를 끊었을 터였습니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본의 ‘우에다 아키나리’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근대 일본 문학의 국내적 뿌리에 얽히지 않으려고 몸을 멀리 하다 보니, 근대 문학이 부정했던, 그보다도 훨씬 오래된 ‘뿌리’에 이어졌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의미에서는 무라카미의 문학도 습합적(習合的)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고토 저 스스로를 되돌아보건대, 뿌리를 끊어내고 싶었던 건가, 하고 생각해 보았는데요. 악기를 시작할 때, 영어로 불렀으면 불렀지, 일본어로 부르고 싶지는 않았어요. 딱히 대상을 발견해내지 못했던 면도 있었기는 했지만, 어쨌든 일본어가 아니면 뭐라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점점 해나가는 사이에 멜로디와 거기에 맞는 일본어의 압운 다루는 법을 터득하게 되어, 일본어로 작업하기 시작했습니다만, 확실히 처음에는 부초처럼 떠다니는 듯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대개 영어를 기반으로 하는 밴드들하고 합동 공연을 하니만큼 그때마다 내심 맘이 좋지만은 않았는데, 그건 단순한 소외감은 아니었구나 하고, 무라카미 씨의 이야기를 듣고서 조금 안심했습니다.
프로듀서의 업무는 ‘바닥의 휴지를 줍는 것’
고토 젊은 애들과 얘기를 해 보면, 모두 ‘우선은 팔아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러는 와중에, 제 친구가 ‘좋아하는 일을 해도 팔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렇긴 하구나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역시 ‘경쟁’이라고나 할까, 하나의 잣대로 측정받기 위해 문 앞에 줄을 서버립니다. 이건 습합(習合)과 완전히 거꾸로 된 순화(純化) 그 자체가 아닌가 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돼, 데미지는 없어’ 라고 말은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나름대로의 힘이 있다고 믿지 않으면 할 수 없겠구나, 라고도 생각하게 됩니다.
우치다 프로듀서가 할 일은 격려하는 거지요. 젊고 재능 있는 친구들이 줄지어 어딘가에 순서를 기다리고 있으면, ‘자네는 줄서지 않아도 괜찮아’ 라고 말을 걸어주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고토 정말로 그렇습니다. 젊은 친구들과 얘기를 해 보고, 얘가 클리셰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는, 제가 좋아하는 해외 음악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서 건네보곤 합니다. 그렇게 하면 사고 방식이 살짝 바뀌어서, 색다른 에센스가 들어가는 일도 있구요. 그러니까 음, 할 수 있는 일이란, cheer라든가, 응원하는 것 정도겠구나 하고 여깁니다.
그리고, 도시락을 적절한 타이밍에 주문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업무라고 생각하거든요. 집중력이 끊기고 더 이상 한다 해도 진행이 막혀 한번 쉬어야 할 것 같은 때에, 타이밍을 잘 잡아 도시락을 주문합니다.
우치다 옛날에, 대학에서 아트매니지먼트 수업을 담당했던 때가 있었는데요, 그때 하시모토 오사무(소설가, 평론가, 수필가 - 옮긴이) 씨에게 부탁해서, 학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사 한 적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아있는 게 ‘프로듀서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이었어요.
그때 하시모토 씨는, ‘프로듀서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닥의 휴지를 줍는 것이다’ 라고 말했지요. 모두 모여 뭔가를 만들 때, 아티스트도 스태프도 각자 자기가 할 일에만 몰두해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신경 쓰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계속 쌓이면, 작업장이 점점 불결해지고, 공기가 거칠어집니다. 프로듀서는 이렇듯 ‘누구의 일도 아니지만,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집단의 퍼포먼스에 영향을 주는’ 일을 파악하고서, 재빨리, 잠자코, 처리합니다.
프로듀서가 ‘전체상을 본다’고 말할 때, 뭔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연상되는데요, 그게 아니라, 바닥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는 게 하시모토 씨의 지론인데,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매우 감동했던 기억이 있어요.
젊은 사람의 작업을 지원할 때도, 테크니컬한 충고라든가, 자금 지원, 네트워크 연계 같은 것도 모두 중요하지만, 우리 ‘곳치(Gotch)’ 씨가 말했던 대로 ‘도시락을 딱 좋은 타이밍에 내는’ 일도 연장자가 할 수 있는 귀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로큰롤이야말로, 잡종 문화의 성과
고토 마지막으로 여쭤보고 싶은 것은, 미국 밴드와 합동 공연했을 때 떠올랐는데요, 미국은 이민의 나라고, 동시에 일본도 뿌리(roots)를 더듬어 보면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면도 있고 해서, 비슷한 점이 있는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우치다 확실히 그런 의미에서는, 미국도 잡종 문화이지요. 여러 가지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 미국 문화의 잡종성을 보여주는 최상의 표현은 로큰롤이 아닐까요.
엘비스 프레슬리가 지금까지 ‘킹’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컨트리와 팝, R&B 3가지 차트에서 동시에 넘버 원에 등극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으로서는 퍼뜩 이해하기 어렵지만, 컨트리와 R&B라는 것은 각기 백인과 흑인의 에스닉(ethnic)한 음악이므로, 물과 기름과도 같아 서로 포용할 수 없습니다. 컨트리의 히트 송이 R&B 차트에 드는 일은 없고, 반대로 R&B의 히트 송이 컨트리 차트에 드는 일도 없습니다. 이 두 장르를 분리하는 벽은 정말 높았습니다. 따라서, 프레슬리가 3차트에서 1위가 되었던 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예요. 뉴욕의 흑인도, 텍사스의 백인도, 캘리포니아의 고등학생도, 모두가 ‘이건 우리들의 음악이다’ 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프레슬리의 음악을, 각기 다른 문화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이건 우리를 위한 음악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잡종 문화가 가진 최대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토 흥미롭군요. 일본 또한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아시아의 여러 사람들이 서로 섞인 장소이지요. 따라서 ‘역사가 살짝 오래된 미국’ 같은 느낌으로 파악하는 게, 순화(純化)의 이미지보다는 마음 편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우치다 거 참 흥미로워요. 일미(日美) 잡종 문화론이로군요. 마지막으로, 글을 쓰는 작업과 음악과의 관계에 대해 짧게나마 말해두고 싶은 점이 있는데요. 글을 쓸 적에 ‘소리 내어 읽어보아 그럭저럭 감이 좋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리듬이라든가 말맛(響き; 울림), 운(韻)같은 것에 주의를 두지 않은 문장을 보면, 컨텐츠가 아무리 멀쑥하더라도, 읽기 까다롭지요.
저도 될 수 있으면 소리 내어 읽었을 때 수월하게 나오도록 쓰고자 합니다만, 곳치의 문장(현재 아사히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음 - 옮긴이)은 그 점이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읽는 데 무리가 없는 거요. 읽기 시작하면 술술 페이지를 넘기고 마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멈추지 않아요. 그건 역시 곳치의 문장이 음악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토 감사합니다.
출처: https://www.mishimaga.com/books/nihonsyugohron/0030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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