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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체지를 되찾자: 여자는 출산, 남자는 무도 (下)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1. 8. 8. 07:56

    (계속)


    ●적의를 훌훌 흘려보내다

    우치다 기모노는 앞으로 자신이 움직일 거리, 그 사이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움직일까를 양복보다도 훨씬 많이 가르쳐주는 게 아니겠어요. 그럴 적에 옷깃이 걸리면 안 되니 소맷자락을 조심스레 움직이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하니까 말이예요. 옛날 사람은 칼을 지니고 다녔으니까 허리 왼쪽 뒤로 60도 정도 돌출부가 있어요. 이것이 물건에 닿으면 ‘사야아테鞘当て’라고 해서 ‘무례한 자!’ 하며 베어버려도 좋을 정도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미사고 신체 감각을 확장해나가는 것이 상당히 오컬트처럼 취급되는 면이 많습니다만, 차를 운전할 때 차폭 감각이란 게 있지요. 자신의 신체 감각을 거기까지 확장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치다 맹인은 스테이크에 스치는 물성의 온도, 색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연장할 수 있는 것이예요. 여성은 모자 장식으로 달린 털에 뭐가 닿아도 알 수 있어요. 감각은 무기물에도 훌륭히 연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사고 그것이 전부 훈련으로 짜여질 수 있는 것이지요.

    우치다 저도 들은 얘기인데요, 럭비 선수 히라오 세이지 씨는 상당히 신체 감도가 높은 사람인데, 감도가 너무 높아서 도리어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엄청난 신체 정보가 들어와서 ‘앗 위험해 위험해’ 하고 안절부절 못해서 운전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차를 탈 때는 부인이 운전하게 했다고 합니다.

    미사고 부인이 운전한다고 해도 안심할 수 있었을까요(웃음).

    우치다 수퍼 애슬리트는 전후좌우 이곳 저곳으로부터 오는 여러가지 신호를 전부 감지해버리니, 오히려 괴로운 점이 있을지도 몰라요. 축구계의 나카다 에이지도 TV인터뷰에서 보면 언론의 무의식적인 악의에 대해서조차 삑 하고 반응해버리는 모습이니, 그건 그것대로 괴롭구요.

    미사고 어느 정도 감도가 강해지면 거울을 가지고 걷고 싶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질투 같은 것을 상대방이 흡수해버리면 질투하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느끼지 않아요. 그런데 받는 쪽이 그걸 되돌려주면, 질투의 당사자는 자기가 나빴다는 것을 알게 돼요. 거울을 갖고 다니는 기분으로 사람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치다 거울도 좋은데요, 곧바로 반사하는 것보다는 조금씩 옆으로 흘려버리는 쪽이 좋아요. 사악한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직접 돌려주는 것은 너무하잖아요.

    논쟁에서도 이기면 원한을 사고, 지면 기분이 상합니다. 어느 결과가 나와도 좋은 쪽이 없어요. 학교의 교수 회의에서 의논을 할 때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옛날에 여세를 몰아 의논 상대를 심하게 비판해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논쟁 단계에서 상대를 승복시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뒤탈이 되어 5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사람이 제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대 손해인 것입니다. 눈 앞의 승부에 이김으로써 장기적으로는 손해를 봤어요. 이 일로 넌더리가 났습니다.

    저는 책을 내면 여러 사람들로부터 논쟁에 휘말리게 됩니다만, 그래서 전부 피하고 있습니다. 이겨도 득이 없고, 져도 득이 없어요. 싸움은 좋지 않습니다. 질투에도 공격에도 상대하지 않고 선뜻 흘려보내는 것이 제일입니다.

    미사고 일본에서 예로부터 미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들은, 실제로 정말 소중한 것이예요. 흘려보내는 것, 주변 사람들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 돈에 연연하지 않는 것, ‘아이고 뭐 그럴 수도 있지요’ 하며 방긋방긋 그 자리에서 끝내는 일 같은 것 말예요.

    우치다 예스 예스라고 하면서도 노라고 말하는.

    미사고 주위의 기분을 배려하는 것 말예요.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못쓰고, 확실히 의논하지 않으면 못쓴다’는 말들을 합니다만,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 자체가 못쓰는 거예요.

    우치다 한때 ‘토론 교육’이라고 일본의 학교에서도 도입을 의논했던 적이 있었잖습니까. 그런 건 죄다 난센스예요. 두 개의 팀으로 나눠 찬성, 반대라니요. 중요한 것은 상대를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화해가 불가능한 대립을 어떻게든 합의형성케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토론과 합의형성의 훈련은 전혀 다른 거예요. 토론은 오히려 대립점을 명시화하는 훈련이지요. 그런 걸 해 봤자 아무 득이 없습니다.

    -- 지금은 법원조차 회복적 사법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케어형 재판’이겠네요.

    우치다 일본에는 그럴 기술이 있다고 생각해요. 화해는 중요합니다.

    미사고 전부 한 번, 받아들이기 때문이지요.

    우치다 유럽적인 토론 문화, 대립문화의 근본에는 ‘바른 것은 언젠가 보편화된다’, 즉 진리는 반드시 전체화한다는 철옹성의 진리 신앙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반대로, 사악한 녀석은 사악함을 고칠 개전의 정이 없다며 체념하는 것입니다. 사악한 것이 가져다주는 피해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 왠지 성악설같기는 하지만, 이 리얼리즘의 근본에는 타자는 불가해한 존재라는 단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유럽에서는 ‘열 길 물 속과 같이 사람 속도 알 수 있다’는 신빙이 최종적으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까지 격하게 타인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인에게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공포감이 있어요. 잘 모르기 때문에 무섭고, 무서우니 ‘본심’을 될 수 있는 한 말하지 않은 채 끝낸다는 식으로, 표면적인 아이고 아이고로 얼버무립니다. 이러한 합의형성 전략 쪽이 실은 인간의 본질적인 검은 속내에 대한 ‘공포’와 ‘경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타자란 무엇인가?’ 라는 것을 정면으로 논하는 문화와 ‘타자라는 논의 자체를 없는 것으로 하지 않으시렵니까?’ 하는 회피의 문화를 서로 비교하면, 어떻게 봐도 후자 쪽이 타자의 타자성이라는 것에 대해 외경의 염을 갖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파이프 같은 나 자신’이 되어 보기

    미사고 두려운 인간이 두렵지 않은 인간으로 될지의 여부는, 아까 말한 얼라이먼트의 솜씨와 관계가 있는 겁니까.

    우치다 글쎄요. 미묘한 차이네요. 그저 그 사람과 함께 밥을 먹고 싶어지는가의 여부라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가족은 기본적으로 밥을 같이 먹는 집단이지요. 데이트는 기본적으로 밥을 먹으러 가는 거구요. 어째서 그런 거냐고 묻는다면, 밥을 먹을 때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게 즐거운가 즐겁지 않은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예요. 가족과 밥을 먹는 것은 사이가 좋아서 먹는 게 아니예요. 그 반대입니다. 언제 밥이 맛없어질지를 체크하기 위해 함께 밥을 먹는 겁니다. 밥을 먹고 맛이 없어지면, 그 가족은 위기신호를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가족 해체의 시나리오란 밥상을 뒤집어 엎는다든가, 남긴 채로 ‘그만 먹을거야’ 하는 것이니까요.

    섹스까지 갈 것도 없이, 남자와 여자는 함께 밥을 먹어보면 같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어요. 안 되겠다 싶은 상대면 맛이 없으니까요. 맛이 없다는 것은 ‘이 사람을 멀리하는 게 좋다’고 신체가 발하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머리로는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해도 소화기(消化器)는 싫은 겁니다. 별 시답잖은 말을 한다 해도 엄청 와구와구 먹고서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할 때는 신체가 ‘궁합이 좋다’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미사고 그러고보면, 아이스크림 하나를 둘이서 나눠먹을 수 있는 이들은 서로 육체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어떤 책에 쓰여져 있었습니다(웃음). 하나의 물건을 쉐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친밀 권역이니까요.

    우치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해주는 것, 같이 식사할 때 쾌락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신체적인 부분에서 조화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니까요.

    -- 말씀이 나온 김에, 친밀 권역에 대한 논문을 쓰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우치다 가나이 요시코 씨의 친밀 권역이라는 이야기를 무척 재밌게 읽었더랬습니다. 근대적인 개(個)의 확립은 좋은 일입니다만, ‘인간은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전제를 채택하면 집단 가운데에서 우선 약한 노인이라든가 유아라든가 환자가 배제되고 맙니다. 자립주의란, 자립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무가치한 것으로서 배제된다는 것이 아닐까 해서요. 행정 부문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자는 게 아니고, 의무로서도 아닌 (돌봄 및 가사 - 옮긴이) 그 자체를 본업으로서 행해 나가자는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는 게 가나이 씨의 사고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나이 씨는 ‘가족’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았기에, 대신 ‘친밀 권역’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약한 개체에 대해 그것을 보호한다든가 위무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은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사고 이러한 좋은 것이 있으니 받아들인다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홀연히 받아들일 수 있겠다 하는 기분이 들 때 인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아이도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당신이 좋습니다’라는 말을 한 번이라도, 한 사람에게라도 들었던 경험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 능력이 있는 사람을 어떻게 늘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자면, 매일 만나기 때문에 가족이 가장 소중해집니다. 뭐, 가족이 아니어도 좋습니다만.

    ‘이 사람을 확실히 지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힘이 있는 사람이 가정 가운데에서도 프로로서의 의료복지 분야에서도 줄어들고 있는 것이리라 봅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 그것이 케어 능력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가 그러한 것을 받아본 경험이란 게 기본적으로는 필요하겠네요. 겪어보지 못했다면, 무도의 경험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우치다 무도의 경험은 사제관계이니까요. 사제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스승으로부터 인지받는’ 것이 제자에게 실감되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관통하는 흐름 속에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무언가가 계승되어갑니다. 그렇게 스승으로부터 계승된 것을, 다시 다음 세대에게 계승해 나갑니다. 사제관계란, 한마디로 말해 ‘무상 증여’인 것이니까요. 스승이 볼 때 제자는 아무것도 아닌, 아주 열등한 존재임에도 그에 상관하지 않은 채, 스승은 제자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선물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의 근저에 존재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네가 좋아’가 아니라, ‘네게는 가능성이 있는게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느끼고 있어요. 상대의 ‘가능성’에 집중해 말을 겁니다. 지금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가 아니라, 미래의 자신을 향해 외상을 그어두는 느낌이지요.

    다른 사람으로부터 안긴다는 것의 가장 감동적인 면모는, ‘너 자신이 모르고 있어도, 네 안에는 엄청나게 풍성한 것이 있는거야’라는 메시지를 수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메시지를 보낸다는 건 의무라든가 일로써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정말로 그 사람 속에 내재하고 있는 풍성한 것이 직접 ‘만져졌다’는 실감이 들지 않으면, 그런 것을 말할 수 없으니까요. ‘의무로서 사람을 안아준다’같은 것은 없으니까 말이예요.

    미사고 역시 그건 케어를 제공하는 측, 믿는 측도 기분이 좋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요. 상대방의 풍성한 부분에 닿게 되어서 자신도 또한 긍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호작용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산사님의 일이 벅찬데도 조산원에서 일하고 있는 조산사님이 절대로 일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임산부를 받아들일 때, 상대가 허리가 아프다고 할 때 자신도 허리가 아프다는 느낌이 드는 것과 같이, 받아들인다, 받아들여준다 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의 안정감을 기억해내는 탓인지라 때려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줄곧 그러한 케어를 제공해오고 나면 번아웃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 반대예요. 번아웃하게 되는 케어 제공을 하고 있으니 번아웃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니까 케어하는 측에서도 기분이 좋은 것이겠죠.

    우치다 애정은, 자기 안에서 솟아오르는 게 아닙니다. 통과해가는 것입니다. 돈과 마찬가지입니다. 돈은 비축해 둘 때는 바깥에서 들어오지 않습니다만, 쓰면 들어오지 않습니까. 화폐의 본질은 운동이므로 화폐는 운동하는 곳에 모입니다. 그래서 돈을 쓰는 사람 곁으로 술술 들어오는 거예요. 강의 흐름과 마찬가지인데, 솨아 솨아 옆에서 돈이 흘러다니고 있으니 살짝 통을 대고 있으면 어쨌든 필요한 만큼만은 돈이 손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저장해 두면 안 됩니다. 자기가 저수지를 파서 거기에 돈을 모아두기만 하면 이제 더는 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저 옆을 흘러갈 뿐이예요. 비즈니스맨으로서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은 개인 자격으로 돈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그 사람 곁에 돈이 왕창 들어와서 왕창 흘러갈 뿐. 애정도 그것과 같은 거예요.

    미사고 흐르는 듯한 몸을 갖추는 게 중요한 거예요. 에고가 가득 차 있으면 자신의 몸 안에서 흐름이 차단되어 멈추고 만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치다 자신의 능력이나 포텐셜을 자신의 것으로만 하려고 한다든가, 자신의 능력을 비축해 두어 이자가 붙으면 크게 쓰겠다는 생각을 하면 못씁니다.

    미사고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역할로서 받아두기로 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서, 자신을 좋은 상태로 놓아두면, 좋은 것이 흘러들어오는 것이지요.

    우치다 자신의 소유물은 금방 동이 나고 맙니다. 애정만 해도 그래요, 바로 바닥을 드러내버립니다. 바깥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것을 살짝 써버릇하는 수밖에 없어요.

    미사고 흐르는 듯이 놔두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바깥에서 오는 것을 멈추고 막아버리면, 내보내려고 해도 내보낼 수 없게 됩니다. 졸졸 나올 수밖에 없어요.

    우치다 저항하지 않는 유동체가 되어가는 겁니다.

    미사고 자기 같은 건, 될 수 있으면 없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아 찾기를 해 봐도, 그런 건 없습니다. 역할이 주어지면 ‘감사합니다’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습니다. 케어를 제공하는 직종에서도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그것을 흘려보내는 자신이 될 수 있을까’가 과제입니다.

    우치다 파이프의 직경을 크게 해 두는 거죠.

    미사고 청소도 하면서 방치하지 않도록.


    ●시간을 엇갈려놓기 …… K1과 출산

    -- 아까 미사고 선생님께서 감수성을 높이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피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우치다 선생님께서는 블로그 일기에서 K1 선수 무사시 씨가 밝힌 ‘맞아도 안 아픈 방법’ 얘기를 하셨지요.

    우치다 상대의 공격을 받는 때는 위기적 순간입니다만, 신체감수성을 최대화해 놓지 않으면 그 상황을 극복해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체감수성을 최대화했을 때에는 통각도 최대화하기 때문에, 매우 아픕니다. 당연하죠. 하지만, 신체감수성의 감도를 내리면 아픔은 경감될지언정 몸은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근본적인 모순이예요. 그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듣고 싶어서, 무사시 씨와 만났을 때 우선 그것을 물어본 것입니다.

    대답은, ‘두 곳의 펀치법을 생각하는 것’.

    지금 맞고 있을 때 두 번째의 펀치, 그러니까 오른쪽 스트레이트가 상대의 안면을 펀치해서 상대가 다운될 때의 체감을 리얼로 해 둡니다. 그것을 ‘현재’로 합니다. 그렇게 하면 맞았던 게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어느 부위에 얼마만큼의 데미지를 받았는지는 명확히 알 수 있지만 아픔은 리얼이 아니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시간을 엇갈려놓습니다. 미래 방면으로 시프트합니다. 이 설명을 듣고, 이제까지 여러 무도가가 말해온 것이기는 해도 잘 이해가 안 되었었는데, 쿵 하고 ‘오장육부에 납득이 되어서’ 굉장히 감동했어요.

    -- 거울 얘기에서는 ‘각도를 엇갈린다’는 것이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시간을 엇갈리는 것이겠네요.

    우치다 객관적으로는 무엇이 일어났다는 것을 이해하고서, 어디에 데미지가 있었는지도 전부 알고 있지만, 아픔의 절실함을 ‘시간 엇갈리기’ 하는 것으로서 경감시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컨트롤이 결과적으로는 무도적으로 말해서 ‘선수 취하기’라는 것으로 연계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토바이 코너링과도 비슷합니다. 바이크의 경우 코너링을 하고 나서 코너를 벗어났을 때의 체감을 코너에 들어가기 전에 확실히 가졌을 때는, 깔끔하게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동작이 완전히 동조해서 리얼타임으로 바이크를 조작하면 코너링이 상당히 어려운 겁니다. 반대로, ‘크리핑 포인트 근처에서 리타이어로 미끄러지는 건 싫은데……’처럼 하게 되는 것을 멍하니 이미지화하면, 실제로 그렇게 무의식 가운데 신체가 움직여버려서, 리어가 질질 미끄러져나갑니다. 인간은 사실 ‘미래의 체감’을 선취해서 그것을 말하자면 ‘설계도’로 해 놓고 거기에 맞춰서 그것을 실현하는 것과 같이 현재를 컨트롤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류의 지향성을 갖고 있지 않으면 신체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곽을 분명히 해 둔 ‘미래의 체감’을 갖고 있는 인간과 그다지 갖고 있지 않은 인간, 시간적으로 앞까지 가는 인간과 리얼타임을 질질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것은, 설계도에 따라 집을 짓는 인간과 설계도 없이 거기에 있는 목재나 공구를 멍하니 손에 들고서 ‘이거 어떻게 쓰면 좋을까’하고 생각하는 인간만큼 움직임의 효율이 다른 까닭입니다. 설계도를 갖고서 행동하는 사람 쪽이 당연히 압도적으로 유리한 것입니다.

    미사고 해산도 참으로 똑같은 느낌인 겁니다. 미래의 지점이 있을 터입니다. 그 지점에 집중할 수 있으면, 진통파를 잘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파도를 쉬이 넘어서, 그 지점이 이미지화될 수 있으면, 아플 때는 아프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수십 초정도 잠이 들 정도로 릴랙스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통증의 파도를 넘을 수 있어요. 그것의 반복입니다. ‘출산은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보통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파도를 수월히 이미지화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20년 전쯤에 야마나시 현에 있는 마을에서 당시 70세 정도 되는 분의 출산 경험을 취재 조사한 보고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마을에서는 ‘해산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나 낳을 수 있다’는 구전이 있었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사실 모두 해산을 가볍게 여깁니다. 신생아도 죽지 않습니다. 모두 140cm 정도의 자그마한 할머니들뿐인데도, 해산할 때의 무서운 추억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해산의 이미지가 따라와서 미래의 지점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것이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전해오는 탓에, 그것을 향해 해산이 종식하는 것처럼 몸을 다룰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펀치를 먹었을 때와 진통을 똑같이 생각해보면, 그 파도가 이미지로써 보이는 쪽이 잘 풀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의료개입을 한다든가, 중도에 손을 잡아준다든가 하면 그 리듬을 깨버리는 것이겠네요. 한 번 리듬을 일탈하면 무제한적으로 개입을 해야 다음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 악순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치다 무도의 경우에, 상대가 손을 뻗었을 때 자신도 그 손을 친다든지 잡는다든지 하면, 그 점점에서의 정보를 통해 자신의 다음 행동을 상대방에게 알려주고 맙니다. 체축의 위치나 중심이나 움직임의 속도나 강도나 방향이,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에 상대에게 전해져서 상대가 거기에 반응해옵니다. 인간의 감각이란 날카로운 것이니까요. 그러한 것이 수 십분의 일초 정도의 시간으로 전부 전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접점에서의 접촉 면적이 많아서 접촉시간이 길어지면, 그것만으로도 전해지는 신체정보의 양이 많아요. 하지만 도리어, 가벼운 접촉 뿐인 것과 같은 반응의 방식은 신체정보가 적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상대가 무엇을 하게 될지 잘 모르게 됩니다. 작은 목소리를 듣게 되었을때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때 우리들의 청각은 가장 민감해지지요. 그리고 그때 ‘시간이 멈춥니다’.

    민감해질 때. 그것도 상대가 보내온 정보를 ‘해석’하기 위해 신체의 감수성을 올릴 적에, 시간이 멈춰버리는 것입니다. ‘내 몸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에 발을 담그면, 현재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현재라는 시간에 ‘고착’되는 것입니다.

    ‘고착’이라는 것은 무도적으로는 발바닥이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서 몸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써, 일반적으로는 공간적인 정지 상태인 것입니다만, 물론 시간적인 고착이라는 것도 있을 터입니다. 신체가 현재에 고착되어버립니다. 아까 말씀드린 ‘나쁜 코너링’의 경우와 같이, 시간과 신체가 리얼타임으로 움직이는 상태겠네요. 이 상태가 무도적으로는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도적으로 말하는 ‘살리고 죽이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음活殺自在’이라는 것은 상대를 공간적으로 정지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 흐름 가운데 봉쇄시키고 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가운데를 자유자재로 오고가는 인간과, 어떤 시간 흐름에 고착되어 있는 인간끼리는 이제 더 이상 승부가 되지 않는 것이예요.

    미사고 움직이고 있는 사이에 본인에게는 시간 감각 같은 것이 사라져버리지요. 시간이 거기를 향해 스으- 하고 자연스레 흘러가면, 아무리 긴 해산이라고 해도 본인에게 있어서는 시간의 감각이 없으므로 잘 해나갈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지금의 의료는 전부 분업화로 짜여져 있어서 말하자면 의료진의 시계로 시간을 재단하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고 달성감도 있는 경험을 어머니도 아기도 가지려고 할 때에 개입한다는 의미가, 지금 말씀을 듣고 있으니 굉장히 이해가 잘 갑니다. 경험을 중단시키게 되는 것이겠네요.

    우치다 운동한다는 것은 공간적인 이동이 아니라 실제로는 시간 가운데에서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을 정지시키기를 종용당하며 현재로부터 움직이면 안된다는 말을 듣게 되면, 지금 아픔을 느끼고 있는 측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괴로운 것이겠지요.


    ●무심결에 낳고 싶어졌습니다

    -- 무통분만을 선택하게 되면 그 경험을 할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미사고 모처럼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되는데, 무통분만에 갇혀버리면 아깝지요. 한편으로는 태어나는 아기도 그 경험을 하게 되니까요. 아기의 경험을 봉쇄하고 맙니다.

    어느 조산소에서 탯줄이 4번 감긴 아기를 출산할 때의 비디오가 가끔 떠오릅니다. 병원에서는 한 번만으로도 허둥지둥하며 잘라버립니다만, 조산소에서는 어지간히 해산이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기의 심장 소리가 양호하고 어머니도 건강하고 기분이 좋은 것 같아서 지켜보았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느긋한 해산이었지만, 자궁구가 최대한으로 열려있어서 상당한 기세로 아기가 나왔습니다. 머리만 나왔는데 4번 감겨있어요. 조산원에서는 이때 탯줄을 자르지 않으므로 조산사님이 한번, 두번, 세번, 네번 하니까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여기서는 70대를 넘긴 조산사님이었는데요, ‘아기의 얼굴을 보세요’라고 말합니다. 그 아이는 자랑스러운 듯이 훌륭한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해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즉 아기는 자신이 그러한 상태였다는 것을 뱃속에서부터 알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천천히 나오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고 생각해서 아마도 느리게 조정해서 나왔어요. 최대한으로 입구가 열려있으므로 그 바깥은 산도이니 느릿느릿하면 괴롭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악 하고 나왔어요. 아기로서는 자신의 힘을 사용한 것입니다. 경험하고 싶었던 경험을 해서 자기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조산사님으로부터 들은 말이 이랬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아이에게 시켜주지 않으면 안 되지요. 자신의 상태를 알고서, 태어나게끔 하는 경험이 있고 없고는 차이가 있어요’. 이러한 경험이 없어도, 물론 앞으로의 인생에서 만회할 수 있습니다만 처음부터 이러한 경험을 해놓고 출발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인생의 출발로서의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조산사님의 말을 듣고는 과연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저 자신은 아이가 두명 있습니다만, 모두 지독한 해산이었습니다. 큰애는 브라질에서의 역산(逆産)이었으므로 제왕절개, 작은애는 영국에서 진통 촉진제를 많이 사용한, 그런 해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해산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경험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출산을 생각해보면, 아이에 대해 너그러워집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에 느긋하게 기다려주지 못했으므로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무엇이든 차분히 기다려줘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조산사님으로부터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이는 특별한 경험을 하지 못했으므로 못쓴다’는 말을 들은 여성이 죄책감을 느낀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미사고 그러한 태도를 취하면 상대방은 정말로 괴롭지요. 그러한 출산 경험을 할 수 없었던 어머니나 아이이기 때문이야말로 세심한 케어를 받을 필요가 있는데 말입니다.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불가피하다는 점을 받아들여서 병원 출산 환경이라고 할지라도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케어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도, 제왕절개이므로 애를 망쳤다, 하는 것에는 정말로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바람직한 해산, 바람직한 해산’이라고 하면, ‘그러한 경험을 하지 못했던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하지 못했던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욱 주변에서 이해해주고 지원해주면 되는 겁니다. 못했던 사람이 있으므로 그것을 배려해 본래 해산이란 이러한 경험이라는 것을 말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닙니다. 해산이란 이러한 경험이라는 것을, 어머니도 아기도 남자도 모두 알아두면 좋아요. 지금은 의료로써의 출산만 경험하게 되므로, 진실된 의미에서 태어난다는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본래 해산이란 이렇게 멋진 것이라고 말할 적에 ‘그리 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못했던 사람이 비참해지므로 거기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말자’고 반응하는 것은 방향이 거꾸로 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우치다 말씀대로입니다.

    미사고 인간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대학 나온 사람,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언어로 상상해서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공부하기 때문이니까요. 자기가 경험하지 못했으니 알 수 없다 하는 것은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경험, 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치다 저는 미사고 선생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으려니, 대단히 기분이 좋은 해산을 했을 때란 어떤 기분인지를 체감으로서 전달받았는걸요.

    미사고 저는 개인적으로 좋은 경험을 하지 못했으므로, 상상적인 체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전달할 수 있다면, 여성의 말을 듣는다든지, 본다든지, 그것을 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우치다 별안간 해산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출처: http://www.tatsuru.com/guests/misago.html

    びっくり対談

    びっくり対談 身体知を取り戻す:女は出産、男は武道 三砂ちづる……国立保健医療科学院応用疫学室長 内田 樹………神戸女学院大学教授 (2003年11月9日 医学書院会議室にて) ――内田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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