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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 선생 X 박동섭 선생 ‘이제 시대는 <습합>으로 산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1. 7. 13. 11:35
(일본 미시마 출판사에서 <日本習合論> 출간 기념으로 행한 2020년 9월 17일의 MSLive! 온라인 대담회 스크립트입니다. - 옮긴이)
[일어날 법한 일이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
우치다
박선생은 <일본 습합론> 읽고 나서 어땠어요?
박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누구도 설명 못할 사례를 모아서, 설명해낼 수 있는 하나의 스토리라인을 발굴해내었다고나 할까요. 그것이 우치다 선생님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치다
누구도 설명하지 못한 사례가 아니라, 그냥 모두가 귀찮아했던 사례입니다만(웃음)
습합론의 출발점은 ‘왜 신토와 불교 분리가 가능했는가?’ 라는 질문에서 비롯했습니다. 국가를 근대화시키려는 과정에서 정치적 지배층이 종교 그리고 민중의 정신문화를 통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1,000년 이상 존속해 온 종교적 전통을 버리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거기에 따라 말끔히 전통을 버려버린 것입니다. 어째서 민중은 신불 분리에 대해 조직적인 저항이나 반론을 하지 않았는가. 거기에 대해 납득이 가는 설명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책에도 썼지만, 역사가들은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설명을 해 주는데, 일어나지 않은 일이 ‘어째서 일어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어난 일을 해명하는 게 역사가의 본업이므로 공을 들여 별개의 의문에 천착할 틈이 없었겠지요.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역사학자가 다루지 않는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일어나도 좋을 법한 일이 어째서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것을 물었어요. 이건 미셸 푸코가 <계보학적 사고>에서 명명한 것과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어나도 좋을 법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역사학적인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되지 않겠나 합니다.
[‘심층 시추’가 아닌 ‘관계짓기’]
박
지금까지 줄곧 선생님 책을 삼가 읽어왔습니다만, 이번에 다시금 우치다 선생님은 과학자시구나 하고 절절하게 느꼈습니다. 과학자는 지적 폐활량이란 게 있어서, 산소가 희박한 곳에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일본 습합론> 가운데에서도 분명히 나타나는게 아닌가 합니다.
수학자 모리타 마사오 선생이 곧잘 쓰는 말에 ‘What is mathematics and what could it be’ 라는 게 있습니다. 어째서 수학은 정해진 문제해결이나 알고리즘에 묶여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다른 방향도 괜찮지 않겠는가. 이렇듯, 있을지도 몰랐던 세상에 대해 선생님도 생각하시는 바가 있지 않나 합니다.
정말이지 과학적 지성은 ‘여러 현상을 감정하는’게 가능한 유연함과 도량의 깊음을 반드시 수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을 그 말의 바른 의미대로의 ‘과학적’인 태도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치다
과학자라고 불린 건 처음인데요.
박
그러신가요. 저는 계속 과학자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치다
요전에, 히라카와 군과 대담했을 적에 ‘우치다, 너 젊은 놈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아냐’고 해서, ‘뭐라고 하는데?’ 라고 하니까 ‘학술계의 「살랑살랑」 으로 불리고 있다구’ 랍니다(웃음)
박
(웃음)
우치다
그래도,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가지고요. 젊은 연구자들에게 평가가 좋지 않은 것도, 「살랑살랑」 이라고 불리는 것도요. 박 선생 ‘ 「살랑살랑」 チャラ男’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박
그건 나쁜 의미 아닌가요?
우치다
맞아요.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살랑대는, 하여간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다는. ‘학술계의 「살랑살랑」’이라니 뭔가 그럴싸해서 묘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여기저기 들이대는’ 유형의 학자는 최근 들어 사라졌으니까요. 90년대 정도까지는 대학교 홍보문구로 ‘학제적(Interdisciplinary)’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요, 이제는 뚝 하고 문자 자체가 사라졌어요. 그 대신 등장한 게 ‘심층’. 이게 요즘 자주 들리는 말입니다.
박
‘깊이 파고드는 의논’ 이런 식으로 쓰이지요.
우치다
그래요. 특정 주제를 유전 뚫듯이 드릴로 곧장 파내려가는 이미지요. ‘학제적’이란 말은 학술의 경계선을 넘어 자유로이 영역 사이를 왕래하는 것이었는데요, 그 자유로운 느낌이 부정당하고 대신 ‘심층 시추’가 등장했습니다. 그러한 유행어 변화는 분명히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탓에, 복수의 인접영역을 자유롭게 월경하며 사는 방식이 부정당하고, 정해진 협소한 전문분야에 움츠려 들어앉고 나면 오로지 거기를 파고들어가는, 그러한 인생이 바람직하다는 ‘분위기’가 나왔어요. ‘월경’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아카데믹하지 않다는 사고방식이 요즘 들어 등장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심층 분석’이란 말을 신문기자나 평론가가 쓰는 걸 많이 듣게 되는데요, 처음 들었을 때부터 나는 미묘한 위화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떤 편집자가 내게 ‘이 주제를 좀더 심층 서술해 주십시오’ 했을 때, ‘싫은데?’ 라고 했더랍니다(웃음). 깊이 파고드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박
그러십니까?
우치다
‘파고드는’ 것은 별로라서. 나는 말예요, ‘관계짓는’ 게 좋아요. ‘요건 고거잖아’ 하는 게 좋아요. 이제까지 관계지어진 일이 없이 멀리 떨어져 있던 짝 사이에 이제껏 생각 못했던 패턴의 일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굉장히 두근거립니다. ‘자아 여기를 파들어가자!’ 하고 지면에 표시를 해서 구멍을 내는 게 성격상 맞지 않아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서로 가교를 이어주는 ‘단나旦那’]
박
책에는 (삼각형의) 밑변이 넓어지지 않으면 높이는 올라가지 않는다 하는 이야기가 쓰여져 있었지요.
우치다
그랬지요. 일본어에는 ‘단나게이旦那芸’ 라는 말이 있는데요, 나는 그런 의미에서의 ‘단나’라고 생각해요. 연결해 주는 사람.
전통 예능의 경우라고 하면 피라미드의 정점에 현인이 있고, 저변에는 그 예능을 향유하는 관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가운데 부분을 중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현대의 예능을 말한다치면, 거기에 프로듀서라든가 디렉터라든가 편집자라든가, 그렇게 직업적으로 ‘가교 짓는 사람’이 있는데요, ‘단나’라는 것은 직업이 아닙니다.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돈을 내는 것도 아니예요.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현인과 초보 사이를 매개해 주는 것이 ‘단나’예요. 전통예능의 계승에는 ‘단나’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박
그렇군요.
우치다
사실 ‘기부금’으로 예능활동을 지원하는 ‘단나’ 없이, 유료공연만으로 성립하는 전통예능은 일본에서는 이제 가부키밖에 없는 거예요. 나는 오랫동안 노가쿠[能]를 연습해 왔는데, 나로서는 완전히 ‘단나게이’인 겁니다. 어찌어찌 연습을 해오고 보니까, 현인의 기예가 정말로 굉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얼마나 물밑에서 노력을 해왔는지를 알 수 있어요. 다 준비된 것을 그저 관람석에서 보기만 하는 사람과는 그 점이 달라요. 초보자에게 ‘이 현인의 기예에서 어느 부분이 대단하냐면...’ 하고, 쓸데없는 참견임에도 ‘현인의 대단함’을 설명하는 아저씨가 있다는(웃음) 그런 것이 ‘단나’의 중요한 일인 겁니다.
나는 아이키도[합기도]라는 무도 또한 오래 하고 있어서 내 도장을 갖고서 수백 명의 문인을 길러왔습니다만, 이건 ‘현인’의 기예가 아니고 ‘단나게이’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스승이 얼마나 뛰어난 무도가였는지는 문자 그대로 몸으로 알고 있어요. 나 정도의 무도가하고는 하늘과 땅 정도 힘의 차이가 있어가지고, 그릇의 차이를 느낄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리게 되지요. 그래서 어찌하면 좋을까 하니, 자기 도장을 시작한 겁니다. 나 자신은 이류, 삼류 무도가입니다만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아이키도를 경험시켜주고, 세상에 이런 엄청난 게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만큼은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일본의 무도를 융성케 해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내 인생은 아이키도에 의해 참말로 풍성해졌으니까요.
현대 일본에서 이런저런 전통 예능이나 전통 기술이 사라지고 있는 까닭은, 현인의 레벨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저변이 빈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변이 쪼그라들면 현인이 아무리 좋은 작업을 해내도, 그것을 경제적으로 받쳐주는 층이 얕아지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현인은 자신에게 아무리 굉장한 기술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생업으로 삼을 수는 없어요. 그것만 해서는 굶는 겁니다.
뭐든지 ‘시장에 전부 위탁’해 놓고서는, 시장에서 환금성이 높은 기예만이 살아남는다는 폭력적인 자세를 취하면, 전통예능이나 전통기술 거의 대부분의 맥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자기 돈을 내고, 사재를 털어서 기능과 예술의 대단함을 세상에 알리고 후세에게 남겨주기 위해 ‘쓸데 없는 참견’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지원’이므로 시장원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쓸데 없는 일을 하는 ‘단나’가 현인과 초보 두 세계 사이 양쪽을 가교짓는 일을 하지 않으면, 예능이나 기술이 끊어져 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서로 이어주는’ 존재도 일종의 ‘습합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박
경계를 넘어다니는 일 말씀이시지요.
우치다
나는 단일한 카테고리 안에서 랭킹으로 줄세우는 일이 싫은 거예요. 단나는 여러가지 랭킹에 얼굴을 내밀고 여러가지 영역을 가교합니다. 나 자신은 어딜 가나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중매 역할’을 하고 있어요. 애초의 기질인 겁니다. 그래서 ‘습합’이라는 아이디어에 끌린 게 아니겠어요.
[Something에 대해 Something을 알고 있다는 것]
박
우치다 선생님은 곧잘 교양과 잡학의 차이를 말씀하셨지요. 잡학은 하나의 주머니 속에 갇혀있습니다. 하지만, 교양이란 것은 넘쳐 흐릅니다.
<14세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라는 책에서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교양인은 Everything에 대해 Something을 알고 있고, Something에 대해 Everything을 알고 있다. 단나라고 하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요?
우치다
으음. 그건 역시 학자를 정의하는 말이겠네요. 대학에서 가르치는 전문가의 경우, Everything에 대해 Something을 알고 있고, 동시에 Something에 대해서는 Everything을 알고 있어야만 하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머나먼 목표라고 봅니다. 나같은 건 그 조건에 들어맞지는 않아요. Something에 대해 Something을 알고 있는 정도니까요(웃음)
나는 뭔가에 대해 ‘이것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영역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요. 정말로요. 어떤 것도 철저하게 할 수가 없으니까요. 전체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겁니다. 우리 집에 와서 서재의 책꽂이를 보면 아실 거라고 보는데요, 내 집에는 전집이 한 질도 없습니다. 어떠한 전집이라고 할지라도 전부 숭숭 뚫려있습니다. 보통 전집 중에 한 권이라도 빠져 있으면 신경이 쓰이겠습니다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읽고 싶은 것만 깨작깨작 사요.
여기서 커밍아웃하는 겁니다만, 나는 정말로 뭘 몰라요. 진짜로 무지합니다. 어느 분야라고 할지라도 ‘여기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게 하나도 없어요. 박 선생은 세계에서 가장 우치다 사상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없겠지만요(웃음)
박
그건 맞습니다.
우치다
세계 1위예요. 의문의 여지 없는 세계 정상급 우치다 연구자예요.
박
스승께 그런 말씀을 듣자오니 대단히 떨립니다만, 한 명밖에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겠지요.
우치다
나는 한 가지 전문이라는 게 없으니까요. 이것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하는 건 하나도 없어요. 전부 어중간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 계시겠지만 나는 일년 내내 일을 하기 때문이에요. 아침부터 밤까지. 책을 읽고 조사하고, 원고를 씁니다. 학자로서도 공부를 꾸준히 하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시간을 들여서 ‘정점에 달했다’라든가 ‘극한에 이르렀다’ 하는 일가를 이룬 게 없어요.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게으름뱅이는 전혀 아니예요. 하지만 그 노력의 방향이란 게 제각각이어서, 깔끔하게 마무리가 지어지지 않아요. 박 선생은 우치다 연구자니까 이 점을 유념해 주었으면 합니다.
박
새로운 발견이군요. 지금까지 선생님은 Everything에 대해 Something을 알고 있는 은둔 지식 전도사라고 저는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우치다 선생님이 Something에 대해 Something을 알고 있는 분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발견입니다.
우치다
은둔자라서 바깥에 안 나가는데 세상에 뭘 어떻게 전도한다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는데요 (웃음)
[허점 투성이 허풍쟁이]
박
우치다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선생님의 사고방식이나 현상 인식 방법론을 접하게 될 때마다, 마음이 푹 놓입니다. 이 정도로만 해도 된다 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랄까요.
우치다
그걸 알려드리기 위해 쓴 거니까요. 이런 사람 한 명쯤 있어도 좋지 않겠나, 자기 자신이 안심하기 위해 씁니다.
그렇지만 말이죠, 학문 세계에서 ‘요기조기 쬐끔씩 찍어 맛봐도 나쁠 건 없잖나’ 하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한 가지 분야에서 정상에 이르겠다’고 모두 입을 모아 말할 뿐입니다. 그치만, ‘복수의 분야에 잠깐씩 발목만 담가 본다’는 사람이 학자 중에는 한 명 정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나처럼, 그러한 유형의 연구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유형의 젊은이에게 아카데미의 진입장벽이 너무 높습니다. 나는 ‘학자가 되고 싶다’는 젊은 사람이 잔뜩 나오는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봐요. 왜냐면, 그래야 학문의 세계가 넓어질 테니까요.
박
넓어지고 말고요.
우치다
뭔가 한 분야에 집중하는 게 서툴지만 그럼에도 학문을 하고 싶다는 사람일지라도 학자가 될 찬스가 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바로 내가 그렇게 학자 노릇을 하며 먹고 살고 있으니까요.
박
Something에 대해 Something을 아는, 그러한 삶의 방식도 괜찮지 않겠냐 하는 말씀이시군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일본의 문맥>이란 책에서 요로 다케시 선생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우치다 선생님은 머리가 튼튼한丈夫な 분이시라는 것을요.
우치다
맞아요. 요로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치다 씨 같은 경우는 <머리가 좋다>고 할 게 아니라 <머리가 튼튼하다>고 하는 거다’ 라고 하셨죠(웃음).
박
독특한 표현이라 저는 흥미로웠어요.
우치다
머릿속에 여러가지 것들을 쑤셔넣어도 튼튼하니까 끄떡 없는 거예요.
박
그렇게 관계성을 발견하는 일은 정말로 근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치다
영역이 다른 것들을 머릿속에 랜덤하게 담아두지 않으면 서로 떨어진 짝끼리의 관계성을 발견할 수 없으니까요. 나쓰메 소세키라든가 오타키 에이이치(포크록 밴드 ‘해피엔드’에서 활동 - 옮긴이)씨가 내 롤모델입니다.
박
<일본 습합론>을 읽고서, 앞으로는 ‘전공이 어떻게 되십니까?’ 하는 말이 사어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한국은 너무나 전공에 매여버리는 일이 잦은데, 이를테면 교육학 안에서도 교육심리학과 교육철학은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아요. 이래갖고는 상당히 볼썽사납습니다.
우치다
전공은 뭐가 어찌 되었든 상관 없는 거잖아요.
박
요즘 유행하는 말중에 ‘융합교육’이란 게 있습니다. 서로 섞이자는 게 참으로 습합習合 그 자체이지요. 하지만 알맹이를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아서, 흉내내는 차원에서의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의미에서의 통섭이나 크로스보더와 같은 움직임은 없습니다.
우치다
그건 전 세계적 양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이런 책을 쓴 거구요. ‘순수 추구 경향은 이제 끝내자’예요. 여러가지 것들이 혼재하는 환경, 다시말해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것이 한데 공생하는 가운데에서 지혜를 이끌어내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메시지입니다. 그걸 제안하는 거예요.
박
<일본 습합론>은 <일본변경론>의 속편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우치다
그래요. 허풍선이大風呂敷 시리즈 2탄입니다.
박
허풍선이라니요(웃음)
우치다
이 보자기風呂敷는 너덜너덜하지만, 무지 큽니다. 허풍선이라는 건 엄청 부풀려 말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쓸만한 구석이 있는 놈인데, 잘 보면 허점이 어딘가에 있어요. 그래서 그거 찾는 일이 재미있는 거예요(웃음)
박
구멍이 나 있어도 상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우치다
허풍쟁이의 경우 ‘이 보자기를 얼마나 크게 펼칠 수 있을까?’ 하는 스케일만을 문제삼으므로, 구멍이 나 있어도 실이 풀려 있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학자는 틀린다는 걸 싫어하지요. 구석구석까지 분명히 밝혀서 구멍 하나 실 한오라기조차 용납치 않고서야 ‘이게 제 작품입니다’ 하고 세상에 내놓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결국 보자기 사이즈가 작아집니다. 보자기를 넓게 만들면 구멍은 늘어납니다. 구멍을 없애자니 보자기는 줄어듭니다. 크기와 구멍은 트레이드오프 관계인 거예요. Something에 대해 Something밖에 알지 못하는 인간이 쓴 책이므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박
(웃음)
우치다
허점(구멍)이 있으니 허풍선이(보자기)라는 거예요.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다는 것]
박
미래의 독자를 위해 쓰신다는 게 선생님의 기본 발상이시지요.
우치다
요번 <일본 습합론>에도 해당됩니다만, 내 책을 읽고 구원받았다든가, 뭔가 산뜻해졌다는 사람은 100명 중에 2, 3명 있을까 말까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세상에는 이렇게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구나, 그리도 유쾌하게 사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식으로 말예요. 이렇게 태도 불량한데도 어찌어찌 지낼 수 있다면, 나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든다면 참 기쁠거예요.
박
선생님이 책을 쓰는 자세는, 독자로 하여금 쿵 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팔랑팔랑 넘기는 식으로 받아들이게끔 쓰시는 게 아닌가 하는데요…
우치다
훌훌 받아들이는 것 말이죠. 오랜 기간 읽히는 것, 외국어로 번역되어 문화적 조건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히는 게 가장 기쁩니다.
박
<일본 습합론>에도 나와있습니다만, 미래의 독자에게 어렴풋이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목표로 쓰셨다는 얘기는, 어제의 자신을 상대로 쓰신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겠지요?
우치다
소설은 별개로 치고, 지금 나오는 책 대부분을 50년 전으로 타임슬립해 보내보면 그 시대의 독자는 책에 뭐가 쓰여져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내 책은 50년 전으로 보낸다고 할지라도 아마 90% 정도는 읽히지 않을까 합니다. 1970년 스무 살의 우치다 타츠루 군에게 읽게 해 보아도, 대부분 뭐가 쓰여졌는지 이해할 수 있어서 ‘제법 훌륭한 내용이군’ 하고 찬성할만한 글을 쓰니까요.
박
미래의 독자를 위해 쓴다는 전략이 과거의 우치다 타츠루를 위해서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다는 발상이 흥미로웠습니다.
우치다
과거와 미래는 ‘지금이 아닌’ 시점에서 말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니까요.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의 상식은 50년 전으로 가져가도, 50년 후로 갖고 가도 통용되어야만 합니다.
박
예전에 나루세 마사하루 선생(요가 수행자 - 옮긴이)과 쓰셨던 책에서 상식과 비상식만이 아닌, 초(超)상식이 있다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운 의논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식은 영원히 이어지는 게 아니며, 그러한 생각을 갖고 우치다 선생님은 의도적으로 쓰시는구나 생각합니다.
우치다
상식은 일시적인 것이지요. 내 기준은 상식이므로, 말하자면 일시적이고 일관성이 없는 것을 기준으로 두며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일시적인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어요. 물론 나도요. 나는 현재 시점의 일본이라는 일시적인 프레임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런 상식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는 한편, 나는 자신이 채용하고 있는 기준이 국지적이면서도 일시적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른 시대나 나라 사람에 대해서도, ‘여기서는 이러이러한 것이 상식이기는 한데요’ 식으로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얘깁니다만, 세상이 한번 망한 뒤에도 내 글을 고고학자가 지면에서 발굴해내서 해독할 적에 ‘요 우치다라는 사람의 책, 다른 책보다 읽기가 수월하네’ 하는 마음이 들게끔 쓰는 거라고 봐요. 2020년이라는 국지적이고도 한정적인 장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피(被) 한정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그것을 알아보기 위한 하나의 자료로써요.
출처: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 La miseria y el esplendo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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