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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라테를 어떠한 방식으로 논해야 하는가: Don’t think, feel!의 문맥 (히라카와 카츠미)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1. 6. 27. 10:18

    가라테를 어떠한 방식으로 논해야 하는가
    Don’t think, feel!의 문맥

    히라카와 카츠미(쇼토칸 가라테 도큐 가라테도장松濤館空手東急空手道場 지도원 5단)
    2000년 2월 9일


    들어가며

    2000년 1월 22일, 고베여학원대학에서 실시된 무도 심포지엄에서 아이키도[합기도], 일본 전통 봉술[杖], 공수도 등 서로 다른 무술의 수련자가 참석해 무도적 신체를 테마로 삼은 토크세션이 마련되었다. 필자가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실은 그다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항상 그렇지만 말이다.) 단지, 기분 좋은 시간을 두 명의 탁월한 무술가와 함께, 진지한 참가자 여러분과 더불어 나눌 수 있었던 행복감이 지금도 몸 안에 남아있다. 완전히 잊어버리기 전에 우치다 타츠루, 오니키 마사미치 두 선생의 탁견이 촉발한 아이디어를 포함해, 약간의 보충 설명 비슷한 고찰로서 기술해둔다.

    이제 필자는 공수도에 대해 말하려는 참인데, 아마 그럴 수는 없으리라. 말인즉슨 공수도라는 ‘신체 표현’에 대해 ‘언어표현’으로 읊는 비평적인 스탠스는, 그림이나 음악에 대해 비평을 하는 경우와 같은 딜레마를 내포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림은 그려야 하는 법이며 보아야 하는 법이거니와, 음악은 연주하고 들어야 하는 법인 것이다. 그림은 말이 끝난 지점부터 시작하는 것, 혹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엇이어야 하는 것을 캔버스에 표현한다. 자신이 그린 추상화를 자기가 해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화가로서 패배한 것이다.

    이 딜레마는 무도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할 때 더욱 폭이 넓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무도는 자신이 언급되는 것을 거부하는 듯 굴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는 아마도 비평대상 그 자체에 대한 것보다도, ‘비평의 스탠스’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종 ‘비평적 스탠스’ (결국에는, 말할 수 없겠구나 하는 통각)를 의식해 나가며 공수도에 대해 언어적 해설(언어적 해체?)을 해보려고 한다는 얘기다.

    유명한 캔커피 광고에서 단언하듯 ‘그게 아니야.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카피가 처절할 정도로 처량한 점은, 이 ‘비평적 스탠스’에 대한 자각의 결여로부터 나온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공수도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에 대해 말하지 않고, ‘공수도에 대해, 혹은 무도적 신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고찰하게 될 것이다.


    공수도의 요소, 혹은 겐[見]이라는 능력


    공수도의 3요소, 다시말해 ‘몸의 신축’ ‘힘의 강약’ ‘기술의 완급’은 형식에 대한 가르침만은 아니다. 공수도 전체 국면에서의 신체운용에 대한 가르침이다. 또한, 이는 모두 공수도에 한한 것이 아니라 무예 일반에도 해당되는 무도적 신체 운용의 요체이다. (하지만 모든 요체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이 말들은 그 자신이 가리키고 있는 내실에 이르는 이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똑부러지게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소위 ‘실전 무술’이 됩니다요라고 할 수 있는데, 어찌하면 이 3요소를 습득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저 담담히 수련을 거듭하라고 밖에는 말하지 못한다.

    ‘보고 따라하는’ 수련법이 있어서 선생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것을 배우라는 말이 있는데(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중요한 연습인데), 필자를 포함해 현대인의 대다수는 ‘보는’ 능력이 극단적으로 퇴화하여 온 것 같다. 이 ‘본다’는 능력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큰 ‘이야기’를 아사다 테츠야가 <마작 방랑기>에 써놓았다.

    도박의 천재들이 행하는 ‘겐見’이라는 조사능력에 대해 설명한 대목이 있다. 도박사들은 도박판에서 느닷없이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우선 판의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어떤 때는 지켜보기만 하고서 걸지 않은 채 나가버린다.

    지긋이 쳐다보면 거기서 무언가가 보인다. 그것은 주사위 눈의 합 혹은 플레이어의 버릇이나 배짱같은 정보뿐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 내적이며 유동적인 자장 같은 것이 감득되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감득되지 못했을 때는 도박사가 베팅하지 않는다. 가만히 쳐다보면서 무언가가 몸 안에 피어오르는 것을 기다린다.

    그렇게 기다리면 저 멀리에서 어떤 종류의 정보가 자연스레 체내에 들어온다. 이것이 ‘겐’이다.

    무도에서의 따라하기 수련법도 분명 그러한 것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논고를 끝낼 수는 없다.

    ‘무도의 심오한 경지란, 신체를 갈고 닦은 감응체가 되는 것이다.’

    진리는 때때로 평범하고 지루한 것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자신을 머뭇거리게 하는 또 하나의 관점인 것이다. (그 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기로 하겠다.)


    공수도에 대해 말한다는 것


    공수도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할 때, 어떠한 방법이 있을까.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는 방법. 즉, 공수도의 모든 에센스는 수련 가운데 있으며 수련으로밖에는 말할 수 없다는 태도다. 확실히 공수도의 신체운용법에는 그저 연습을 반복해 나가며 신체에 쐐기를 박는 방법 이외에는 접근하기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필자의 경우, 초단에 이를 때까지 철저하게 위와 같은 방법으로 훈련받았다. 기본을 습득하려는 경우, 이론은 때때로 방해가 된다. 이른바 머리로 하는 공수도를 계속 하게 되면, 신체 동작에 사고의 편향이 관여하여 반드시 동작에 쓸데없는 동작이 섞여들기 때문이다. 브로카 영역에서 내린 명령이 사지로 전달돼 동작을 일으키는 시냅스 연쇄 반응에 의해 생겨나는 ‘지연’은, 무도에 있어서 종종 치명적인 동작 결함이 된다. 생각하기 전에 행동하는 것, 즉 무의식 하의 신체운용을 습득하는 일이야말로 수련인 것이다. 무의식하의 신체운용을 배우는 데 있어서 뜻(언어)은, 필요가 없다(?).

    공수도의 정신에 대해 말하는 방법. 소위 정신 주의. 정신론이다. ‘오쓰押忍’라는 말로 대표되는 공수도의 어법은, 단련을 극한까지 파고드는 것으로 하여금 인간은 하나의 고양 상태를 획득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전제에는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 단련을 파고들어 얻을 수 있는 것은, 근력, 지구력, 숨참기 등 신체적 강함이며, 정신은 그것만으로 단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정신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단지 정신의 위기를 맞아 대치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 그것은 말이라는 것, 단련한다는 것이란 말의 연습에 의한 것이 아닌, 그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타자성’이라는 인식의 깊이와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신에 대해 말을 해온 것은, 공수도는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해석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빙이라는 케미스트리에 속해있어 ‘불합리한고로 믿는다’는 것을 통해 신빙의 심도를 증가시키고, 이 신빙은 신체를 빌린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일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빙의 문맥 가운데에는, 항상 결론과 원인이 도치되어 있다. 믿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이지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믿음에 이른 게 아닌 것이다.

    테크닉에 대해 말하는 방법. ‘몸놀림’, ‘교차’, ‘상대방의 선수를 읽기’, ‘선수 취하기’ 식의 동작기법, ‘찌르기’, ‘차기’, ‘때리기’에 연동하는 허리의 움직임이나 ‘비축’, ‘비틀기’에 의한 파워의 축적과 폭발 방법 등. 이것들은 많은 공수도 해설서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힘의 법칙, 물리학, 운동생리학 등 과학의 의장을 두른 언어를 통한 술기의 해설이나 트레이닝(수련이 아니다)의 방법이 논해져 왔다. 공수도가 스포츠화, 체육화한다는 것은 테크닉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한, 근력운동 코스를 합리적으로 쌓아나가면 ‘강함’을 획득할 수 있다는 선형적인 인과율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프로레슬러 다카다 노부히코와 힉슨 그레이시의 시합을 보고 스포츠의 패배를 느끼게 된 관중은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필자의 첫 사범인 에가미 시게루 쇼토칸 사범이 지은 최초 저작이 Beyond the technique 즉 ‘기술을 넘어서’였던 것은 흥미진진하다. 에가미 사범은 기술을 추구해왔던 사람이었지만, 만년에는 상당히 정신성을 강조한 분이었다. 에가미 사범의 경우, 최종적으로는 상대와의 조응이라는 개념에 이르렀지만 거기에 이르는 방식에 대해서는 제자들에게 명료한 말로써 설명하지는 않았다. ‘철저히 강해지고자 한다면, 정말로 사이좋게 되는 법을 익히라고 하고 싶다. 정말로 사이가 좋아지는 것, 사이가 좋아지게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즉 상대와 일체가 되어 정말로 상대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상대와 똑같이 느끼고, 똑같은 기분이 되는 것이다. 상대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리는 일이 필요하다. 항상 상대의 기분을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탓에, 이제까지 공수도를 논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 것이 있어왔다. 그러나 공수도를 말하는 어법은 모두, 아직 확실한 방향성을 획득하는데 이르지는 않은 듯 해보인다. 공수도에 대해 말할 때 ‘침묵의 어법’, ‘주술의 어법’, ‘과학의 어법’을 구사한다고 해도,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남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야말로 가라테의 본질이 있을 터인 것이다. (나의 경험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공수도, 혹은 무도에 대해 말할 때는 ‘언어적인 표현과 가장 떨어져 있는 부분에 있는 신체 표현에 대해 언어로 말한다’는 곤란을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애초에 ‘들어보면 알 것이다’로 끝날 일이었으면 ‘무武’는 필요 없을 터이다.


    문맥의 문제


    우리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수도 혹은 무도 전반에 대해 처방능력을 갖는 어법같은 것은 없는 게 아닐까.

    어법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소룡의 명언을 떠올려보자.

    이른바 Don’t think, feel.

    도대체, 이소룡이라는 무도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무도적인 신체의 획득은 로고스(언어)에 의한 것이 아니며, 반복훈련에 의한 신체 각인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무도적인 신체를 획득한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육체를 감응체로 만드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조금 기다려주었으면 한다. ‘말로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 그렇게 하면 상대의 행동을 느낄 수 있다’하는 것으로 정말 괜찮은 걸까. 그렇게 단순한 문제일까. 다른 함의는 없을까.

    상대로부터 받는 신체정보 수용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것. 즉 신체를 훌륭한 감응체로 만드는 것. ‘겐見’의 능력을 갈고 닦는 것. 모두 같은 말이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이것을 ‘생각하려고 하지 말라. 느끼려고 해라. 자신이 행하는 움직임의 이미지를 회복하라’는 식으로 바꿔 말하면 어떨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신체를 볼 수 없다. 그저 이미지화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의외로 중요한 사실이다. 자신의 신체동작을 우리들은 신체감각으로는 포착할 수가 없고, 이미지라는 지적인 레벨로 포착해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 단계에서 포착한 자신의 신체동작은 실제 신체동작과는 항상 ‘엇갈려’ 나타난다. (심포지엄에서 시험해 보았듯이 말이다.)

    자신의 ‘가타型’를 처음 비디오로 보았을 때의 위화감과 실망감은, 수련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있으리라. 수련이란 실은, 이 ‘엇갈림’을 수정하는 행위가 아닐까. 이미지의 육화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는 ‘무도적 신체에 대해 말한다’는 문맥도 애초에 도치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도를 어떻게 말할(이미지화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 아닌,

    ‘무도적 이미지라는 것을, 신체는 어떻게 말할 수(표현할 수) 있을까’를 물어야 마땅했지 않았을까.


    의식의 육화로서의 무도


    통속적이기는 하지만 경험적으로 올바르다고 판단될만한 게 있다면, '떠벌이 무사는 약한 무사다’라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잘 싸우는 자는, 입을 다물고 무언 수행하는 이였다. 이 ‘상식’은 무하마드 알리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깨지지 않았다. 무하마드 알리는 처음부터 달랐다. 이 종교적인 사내는 이미지가 피와 살을 얻을 때까지 고군분투했다. 만약 이미지가 실현될 수 있다는 신화를 믿고 있다면, 그 이미지를 최대한으로 고양해둘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 남자의 ‘사자후’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무하마드 알리의 머릿속의 배태된 이미지는, 킨샤사 경기에서 지상 최강의 펀치를 가졌다고 알려진 조지 포먼을 무찔렀다.

    이때 우리들이 보았던 것은 말씀이 육화한다는 주술적 진실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말씀’이 ‘육체’를 상대로 승리한 순간을 목격했을 터이다.

    좀 옛날 얘기지만, 아무리 해도 세계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던 일본 테니스 선수가 전일본급 프로 테니스 선수에게 어떻게 세계 수준에 육박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의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일본인의 신체 발달이나 과학적인 트레이닝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었어요. 모든 요인은 플레이어들이 부자가 된 덕에 미국의 유능한 코치를 고용했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코치가 행했던 것은 철저한 이미지 트레이닝이었습니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도입한 이후 토너먼트에서 계속 이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언어, 이미지, 모티베이션. 이것들은 항상 기술, 기법, 신체동작에 선행하는 중요한 요소였을지도 모른다. (진짜 그런 것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실이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와 실태의 관계를 풀어내는 것, ‘세계’를 넓혀가는 것이다.)

    공수도 혹은 무도란,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다. ‘고도의’라는 의미는, ‘스트레이트하고 단순한 시스템이 아닌, 뒤죽박죽으로 뒤틀린 시스템’을 이르는 것이다. 살인검, 살인권법이라는 것은 타자를 궁극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며, 타자를 소멸시키는 기법이다. 무도에 이르는 길의 한가지 궁극적 모습이 여기에 있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을 살리면서 상대를 살리는 활법(시스템; 또한, 유도에서 졸림을 당해 가사상태에 빠진 자에게 행하는 호흡복원법 -옮긴이) 이기도 하다. 이 두 문맥의 격차는 많은 무도가를 주저하게 했으며, 혼란스럽게 했다.

    이 ‘망설임’ ‘혼돈’의 개방은 그저 수련 가운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상대에게 해를 입히며 상대와 교류한다는 이 불균형한 타자와의 얽힘을 파고들어나가는 것이 무도의 주안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시스템이 그렇듯이, 시스템 내부에 시스템 전체를 부정하는 계기를 배태하지 않는 시스템은 반드시 경직되고, 결국 괴사한다.

    이러한 이치를, 무도 하나만이 피해갈 수는 없다.


    출처: http://www.tatsuru.com/guests/karate.html

    空手道は、どのように語られ得るのか

    updated 9 Feb. 2000 空手道は、どのように語られ得るのか Don't think, feel! という文脈         平川克美(ひらかわ・かつみ)                      松濤館空手東

    www.tats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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