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양리 북스 키친, <책들의 부엌> (한국 문학의 시간)인용 2023. 5. 9. 13:57
소양리 북스 키친은 책을 팔고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 북 카페와 책을 읽을 수도,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북 스테이를 결합한 복합 공간으로 총 4개의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선 북 스테이 공간은 건물 3개 동으로 만들었는데 각각 2층짜리 독채 펜션이었다. 북 스테이용이 아닌 나머지 건물의 1층은 북 카페로 사용하고 2층은 스태프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도록 구성했다. 그리고 이 4개의 동은 중앙 정원에 있는 유리로 된 식물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정원을 중심으로 십자 모양으로 4개의 동이 들어서 있는 셈이다.
북 카페의 전면은 통유리 창으로 되어 있었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소양리 풍경은 자체로 그림이 되었다. 매화나무 너머로는 굽이굽이 이어진 산등성이가 보였다. 유진은 치맛자락이 너울대는 듯한 거대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보면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양리 북스 키친'이라는 이름을 정하는 데도 2주가 넘게 걸렸다. 책으로 가득한 공간에 맞는 이름을 고민하던 중, 책마다 감도는 문장의 맛이 있고 그 맛 또한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 생각났다. 각각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추천해 주듯 책을 추천해 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힐링이 되듯 책을 읽으며 마음을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북스 키친'이라고 이름 붙이게 되었다. 맛있는 책 냄새가 폴폴 풍겨서 사람들이 모이고, 숨겨뒀던 마음을 꺼내서 보여주고 위로하고 격려받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소양리 북스 키친 객실 동 1층에 있는 작업실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24평 아파트 거실 크기였는데, 6인용 하얀 원목 테이블이 중간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새하얗고 탁 트여 있어서 답답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등의 작업을 하기 딱 좋은 정도의 크기였다. 통유리 창 앞의 티 테이블에는 까만색 전기 포트와 수동 그라인더가 놓였고, 옆으로는 관엽식물 화분 3개가 놓여 있었다. 빌트인으로 제작된 거실 장에는 책이 백여 권 정도가 꽂혀 있었는데, 자세히 가서 보니 칸막이별로 분야별 추천 도서를 모아놓은 듯했다. 소설부터 인문서까지 그 종류가 다양해 보였다. 책 옆으로는 하얀색 블루투스 스피커가 보였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책들은 마음껏 읽으시면 됩니다. 북 카페에 있는 책도 읽으실 수 있고, 밤 12시까지 이용 가능하세요. 다만, 북 카페에서 나오실 때 마지막으로 나오시는 분은 불은 꺼주시면 좋고요. 저희가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 '글 쓰는 작업실'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요. 오전 9시부터 12시 혹은 오후 2시부터 5시 중에 고르실 수 있어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아니고, 시간에 맞춰서 모인 다음 각자 글 쓰거나 책 읽는 프로그램입니다. 집중하실 수 있게 시간을 따로 구분해 놓은 거예요. 이따가 북 카페 오시면, 한 번 더 설명해 드릴게요."
"어메니티랑 침구류는 환경을 위해 매일 세탁하지는 않습니다. 사흘에 한 번씩 교체해 드릴게요. 혹시 더 자주 필요하시면 얘기하시고요. 책은 북 카페에서 가져다가 객실에서 읽으셔도 됩니다. 인터넷 와이파이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이용 안내 브로슈어에 있으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그럼,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북 카페에 와서 이야기해 주시거나 이용 안내 맨 아래쪽에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 아, 내일 아침 식사는 오전 8시입니다. 북 카페로 와주시면 되고 조식이 필요하지 않으신 경우 미리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형준은 기획 제안서에서 소양리 북스 키친이라는 공간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물줄기가 되고, 힘들 때 위로를 받는 쉴 만한 물가가 됐으면 좋겠다는 콘셉트를 제시했다. 그리고 연간 단위 프로그램을 빼곡하게 기획해 왔다. SNS 마케팅 방안도 참신했다. 그래서 면접 보기 전에, 유진은 시우와 함께 형준의 제안서를 보면서 "얘는 무조건 뽑아야겠다."고 얘기했던 터였다.
야외 결혼식은 세린이 7월에 소양리 북스 키친으로 와서 맡은 첫 번째 프로젝트였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세린이 얼떨결에 영업한 첫 작품이었다.
(...)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세린은 소양리 북스 키친의 스태프로 합류하게 됐다. 공식적으론 북 카페의 각종 MD 상품을 디자인하고 마케팅 관련 시안을 짜는 역할이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야외 결혼식과 피로연, 세미나 같은 소규모 행사 준비가 세린의 몫이 되었다.
밤 따기 스태프 역할은 만만치 않았다. 밤나무를 흔드는 건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뾰족한 가시를 품은 밤송이를 밟고 벌레가 먹지 않은 단단한 알밤을 꺼내면서 당연한 듯 가시에 찔렸다. 초등학생 아이들이 신나게 뛰면서 밤송이를 밟아대다 넘어져 다치진 않는지, 가시가 옷을 뚫고 들어가 박히진 않는지 살피는 것도 스태프의 몫이었다. 밤나무가 심어진 뒷산은 꽤 가파른 곳인 데다가 뱀이 출몰할 수 있다고 해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런데 소양리 북스 키친은 무슨 뜻으로 지었어? 소양리는 여기 이름이니까 그렇다 치고. 북스 키친은 뭐냐? 난 처음에 무슨 레스토랑인 줄 알았잖아."
"그렇게 문의하는 손님도 꽤 있었어요. 아니면 쿠킹 클래스 같은 거 하는 곳이냐고. 키친을 치킨이라고 대충 외우고, 치킨 주문 전화도 하더라고요."
"북스 치킨. 입에 딱 붙는데?"
"아, 선배, 진짜!"
유진도 마주 웃으면서 주변을 쓱 둘러봤다. 가로가 기다란 창으로 보이는 눈 내린 소양리 산자락은 수묵화 그림 같았다.
"북스 키친은 말 그대로 책들의 부엌이에요. 음식처럼 마음의 허전한 구석을 채워주는 공간이 되길 바라면서 지었어요. 지난날의 저처럼 번아웃이 온 줄도 모르고 마음을 돌아보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맛있는 이야기가 솔솔 퍼져나가서 사람들이 마음의 허기를 느끼고 마음을 채워주는 이야기를 만나게 됐으면 했어요. 그리고 누군가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글쓰기를 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선배는 노래를 듣는 것처럼 고개를 까딱거렸다. 저쪽 테이블에서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바깥에는 진한 커피를 닮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촛불은 전보다 또렷하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촛불이 아니더라도 눈이 내린 저녁은 꽤 밝았다.
"……유진아, 좋아 보인다."
긴장이 풀린 선배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깃들어 있었다.
"진심이야. 뭔가…… 단단해진 것 같아. 편안해 보이기도 하고. 가장 너다운 모습이 된 것 같아."
- 김지혜, <책들의 부엌> 알라딘 링크
====
편집장의 한마디: 저는 나름대로 픽션의 개념을 숙지하고 있으며, 허구의 서사를 다루는 훈련이 되어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이 책은, 이런 저마저도…. (웃음)'인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악과 신체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 (0) 2023.05.13 이데올로기 대 신체 감각 (0) 2023.05.12 제프 베조스의 독특한 경영 스타일 (0) 2023.05.08 가시밭길, 지적 도전 그리고 사경寫經 (1) 2023.05.03 Daisy, Daisy, Give me your answer, do. (0) 2023.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