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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대 신체 감각인용 2023. 5. 12. 12:54
민청 학습은 소학생도 알아들을 뻔한 소리의 무한한 복습이었다. 저절로 지쳐 떨어져 물 간 생선이 될 수밖에 없었고 나중엔 스스로를 박제가 돼 버린 것처럼 느꼈다. 여북해야 민청 간부나 동무라고 부른 남학생 중엔 잘생긴 남자도 있었을 법한데 어깨를 맞대고 학습도 하고 툭하면 악수도 잘했건만 한 번도 야릇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건 결코 연애 감정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성간에만 있는 것이면서도 연애 감정 이전의 이끌림이 남자와 여자가 섞여서 하는 일 가운데는 반드시 있는 법이다. 그 남자와 여자가 남매나 부녀나 모자간이라 해도 말이다. 생기라 해도 좋고, 윤기나 부드러움이라 해도 좋은 그런 정서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더불어 하는 일 가운데는 따로따로 하는 일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잔재미가 있는 법이다. 어떻게 된 게 그것까지 말라 버린 느낌이었다. 아니, 그건 느낌이 아니라 실제였다. 황폐의 극치였다.
나는 전쟁 중 생리가 멎어 버렸고, 비슷한 경험을 했단 소리를 나중에 여러 번 들었는데, 대개는 영양부족 탓으로 돌리는 듯했다. 물론 영양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심리적 중성화 현상의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여북해야 그 무렵 나는 북조선이 과연 노동자의 낙원일까를 의심하는 것보다는 북조선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인구를 증가시킬까를 궁금해하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인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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