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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밭길, 지적 도전 그리고 사경寫經인용 2023. 5. 3. 20:33
그러니까 벌써 네 해 전의 일입니다. (주)사이언스북스 편집부의 권기호 씨가 코스모스의 번역을 저에게 종용해 왔을 때, 저의 즉각적 반응은 한마디로 주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저 자신이 현대 천문학의 엄청난 변화를 알고 있기에 20년이나 지난 책을 이제 번역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부정적 반응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번역을 한다면 주(註)를 많이 달아야 하겠구나. 그런데 나는 주가 많이 달린 책을 싫어하지 않는가. (...)
번역을 약속하고 첫 페이지를 옮기면서부터, 저는 '번역하기는 고문이다.'라는 명제를 재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천문학이 주를 이루지만, 천문학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책은 코스모스에서 인간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밝혀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초점에 이르기까지 과학뿐 아니라, 서양 철학과, 동양 사상, 현대 사회학, 정치 심리학 등의 지식이 두루 필요했으니, 『코스모스』의 번역은 맨발로 가시밭길 걷기였습니다.
- 홍승수
하지만 피어시그의 책을 번역하는 데 필요한 것이 어찌 모터사이클에 관한 지식뿐이랴. 그의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학교에서 배워 익히 알고 있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넘어서는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을 공부하는 데, 고대 희랍 철학을 공부하는 데, 흄과 칸트의 철학을 공부하는 데, 『도덕경』을 읽는 데, 산스크리트어를 이해하는 데, 불경을 공부하는 데,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그 외의 온갖 지성사의 이슈들을 공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즐겁고 기꺼운 마음으로 보냈다. 이 책을 번역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은 일부 이 때문이다. 물론 무엇보다도 역자의 '굼뜸'을 탓해야겠지만, 번역 도중 책이 걸어오는 그 모든 지적 도전을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번역 도중 역자의 지적 이해 능력 바깥쪽에 있는 문제와 만나면 그것이 무엇이든 이해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에야 다음 번역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일은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 장경렬
저에게 레비나스의 책을 번역하고 연구논문을 쓰는 것은 모두 사경(寫經)이었습니다. 외부에서 온 낯선 개념과 감각을 육화할 수 있도록 자신의 말과 사고와 감각을 바꾸는 일이지요. 어휘를 무리하게 넓히고 평소에 사용하는 통사법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통사법을 구사하고 가청 음역 밖의 음운을 듣는 것에 비견할 수 있겠지요. 이처럼 자신의 신체를 째어서 벌리고 늘어나지 않는 근육을 늘이고 굽히지 않는 관절을 굽히는 일을 해야만 사경이 가능합니다.
사경이란 단지 쓰여 있는 것을 옮겨 적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글이 자신의 신체를 통과하는 셈이니까요. 그랜드 피아노를 샀는데 현관을 통과하지 못해 벽에 구멍을 내서 집 안으로 들였다는 이야기를 때때로 듣습니다. 위대한 철학자의 텍스트는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같은 것입니다. '우리 집'에 피아노를 들이기 위해서는 문을 떼어내고 벽을 부수고 마루의 보강공사와 방음공사를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수고 재구축할 각오가 없으면 '그런 거대한 것'은 내 안에 들일 수 없습니다.
- 우치다 타츠루'인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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