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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지 않는 사회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3. 27. 21:02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03/26_1503.html

     

    '선데이 마이니치サンデー毎日'에 부정기적으로 연재하는 코너를 갖고 있다. 3개월에 한 번 정도 떠오르는 것들을 적는다. 5000자 정도 실리기 때문에, 비교적 까다로운 이야기를 쓴다. 이번 3월 29일호에 투고한 것은 민주제 논의이다. '존재해야만 하는 것(Sollen)'이 '존재하는 것(Sein)'을 규정한다는, 종교나 무도에서 당연한 이야기는 정치에도 딱 들어맞는 이야기이다.

     통치기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인들이 사리나 보신을 위해 '공공의 복지'를 배려하는 일을 중단한 탓에, 일본은 차차 '나라로서의 형태'를 잃어가고 있다.
     누군가의 태만이나 부주의의 귀결이 아니다. 과거 30년 정도 동안, 일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힘껏 노력해 얻은 결과이다.
     나는 이 현상을 이제까지 여러가지 말로 표현해 왔다. '반지성주의', '포퓰리즘', '주식회사화', '단순주의' 등. 그리고, 요즘들어 이들 징후가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지 않는 사회'의 고유한 병적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예전에 '표현의 자유'에 대해 강연을 의뢰받았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란 애초에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규칙인지 생각했다.
     분명히, 우리들의 민주주의적인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서, '공공의 복지'에 반하지 않는 한 그 자유를 억제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는 어떤 '좋은 것'이 따라오는 것일까? 사람을 격분케 하는 표현이나,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짓밟는 듯한 공격적인 표현에도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는가? 표현해도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공적기관이 판정하는 것은 허용되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즉답하기는 힘들다.
     왜 '표현의 자유'는 지켜져야만 하는 것인가?
     유감이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헌법 본문에 쓰여져 있지 않다. 쓰여져 있지 않은 것은, 그것이 자명한 것이라서가 아니다(자명하다면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날 리 없다). 그 대답은 국민이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해서, 스스로의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나, 공공의 복지나, 민주주의나, 거기에 상응하는 값어치가 있는가를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없다면, '그걸 지킬 필요 없다' 라고 딱 잘라 말하는 사람들(이미 국민의 상당수를 점하고 있다)을 설득해 마음을 돌릴 수 없다.
     헌법이 정한 '표현의 자유'는 어떤 '좋은 것'을 가져오는 것인가?
     그것을 말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는 것은, '민주주의란 무엇을 목표로 하는 제도인가?'를 우직하게 사료하여, 조리에 의거해 말하는 노력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토대를 형성한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고 묻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은 민주주의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어딘가에서 만들어져서, 그것을 '어이, 민주주의 하나 주게'라고 하면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지금 여기서 손수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일본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그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윈스턴 처칠이 하원 연설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이 죄와 슬픔 많은 세계에는, 이제까지 많은 정치체제가 실현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민주주의가 완전히 전능한 것(perfect and all-wise)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민주주의는 최악의 통치제도(the worst form of Government)라고 여태까지 여겨져 왔다. 이제까지 시도되어 왔던 모든 통치제도를 빼면 말이다."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문장이지만, 이 말을 인용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제도다'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변변치 않은 제도'다. 그렇지만, 그것 이외의 정치제도는 '더욱 쓸모 없는 제도'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민주주의를 마지못해 채용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얘기를 이어나간다. 어딘가 신랄하고 머리가 좋아 보인다. 그래도, 나는 그 해석을 채택하지 않는다. 처칠은 그때 '민주주의는 정말 실현시키기 곤란한 정치제도'라고 말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직' 이라기보다는, 아마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이 세상에 실현시키기 위한 수행적 노력'이라는 모양으로, 즉 항상 미완의 것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걸로 얘기는 끝났다고 생각한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는 노력이란 무엇이든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그것을 지향하다 거꾸러져 숨이 끊어진다는 것 이외에 나는 민주주의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세상에는 일신교 신도들이 25억명 쯤 있다. 그들은 세계가 끝날 때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날 구세주(메시아)의 도래를 믿고 있다. 그러나, 예언자가 그리 말한지 거의 3000년이 지나도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제껏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은, 귀납법적으로 추론한다면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신교 신자들이 그들 생애에 일어나지 않을 구세주의 도래를 마치 일어날 것처럼 지금 여기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어떤 개념이 가진 방향성[指南力]은 그것이 현실화할 개연성과는 관계가 없다. 메시아가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다고 해도 메시아주의는 지금 여기서 기능하고 있다. 그와 같은 것이다. '완전히 전능한 민주주의'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지 몰라도, 그 개념이 지금 여기서 정치적 방향성을 갖는 일은 있을 수 있다. '민주주의'란 일신교에서의 '메시아'와 비할 수 있을 만한 초월적인 개념이다. 나는 그렇게 가설을 세웠다. 이런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은 나 이외에 없을 줄로 아나, 그렇게 생각하면 현대 일본의 민주주의 실조를 설명할 수 있다.

     민주주의 또는 민주제(democracy)란 어떤 제도인가?
     정의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주권자가 누구인가 하는 정치제도의 분류이기 때문이다. 민주제 이외에는 군주제(monarchy), 귀족제(aristocracy), 과두제(oligarchy), 무정부(anarchy)등 여러 정치제도를 열거할 수 있다. 처칠이 '이제까지 시도되어 왔던 모든 통치제도'라고 부른 그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민주주의에 반대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들 중 어떤 정치제도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권자'란 어떤 인간인가. 나는 그것을 '자신의 개인적 운명과 나라의 운명 사이에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 라고 정의하고 싶다. 이것도 아직은 개인적인 정의고, 딱히 일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런 정의로 얘기를 이어나가고 싶다.
     제정이나 왕정이라면 황제나 국왕이 주권자다. 그러니까, 명군현제라면 나라를 능히 다스릴 수 있고, 암군우제라면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 귀족정이나 과두제여도 얘기는 같다. 주권자의 현명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선함과 악함을 통해 국운이 그대로 결정된다. 그렇다면 민주제도 똑같을 터다. 민주제의 국민이 주권자인 정치제도, 한마디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 운명과 나라의 운명의 사이에 상관이 있다' 라는 (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정치제도이다. 그리고 실제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현명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선함과 악함이 국운의 귀추를 결정하는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이 어딘가에서 '"세계를 바꾸라"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생활을 바꾸라"고 랭보는 말했다. 이 두 슬로건이 우리들에게는 하나의 것이다' 라고 썼는데, 나는 이걸 그대로 민주제 국가 주권자의 조건으로 사용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의 생활을 바꾸는 것이 나라를 바꾸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믿는 것그것이 민주제 국가에 대한 주권자의 조건이다.
     자신이 한 단지 하나의 말, 단지 하나의 행위에 의해 나라가 그 형태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자,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자다. 그러니까, 주권자는 '자신의 도덕적 고결함이 국가의 도덕적 고결을 위해 필요하다' '자신이 충분히 지적인 인간이 아니라면 조국도 그 지적 평가를 잃는다' 라고 믿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종의 관계망상이다. 그렇지만, 그런 망상을 깊이 내면화한 '주권자'를 일정 수 이상 확보하지 않는다면, 민주제국가는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은 '주권자가 없는 민주제 국가'라는 사태를 상상해 보면 알 수 있다.
     주권자가 없는 민주제 국가란, 국민이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방식과 나라의 운명 사이의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무엇을 하든 말든, 나라의 모습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공공적 권역은 마치 자연물인 것처럼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고, 자신이 더럽히자고, 함부로 대하고 훔치자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생각한다. 지금 일본인들은 참으로 그렇다.
     주권자임을 그만 둔 국민이라고 함은 '고속도로가 정체되어 있을 때, 갓길로 달리는 운전자'와 같다. 다른 운전자 모두가 준법적으로 행동하고 있는데, 한 사람만 위법적일 때 그가 얻는 이익은 최대화된다. 그러나, 그것을 본 다른 운전자들이 그를 흉내 내어 갓길을 달린다면, 그의 어드밴티지는 제로가 된다. 이것이 민주제 국가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딜레마다.
     공공의 질서가 번듯하게 유지되고 있을 때야말로 사리사욕의 질주는 커다란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사리사욕의 폭주가 지나치게 늘어나면 질서는 붕괴한다. 그래서, 사리사욕의 질주를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그런 인구비율이 '수용 한도受忍限度'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어떻게 '공공의 복지를 배려하는 사람'과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의 비율을 통제할 것인가? 그것이 민주제 국가가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현실적 문제이다.
     일정 수의 주권자(혹은 좀 더 쉽게 말해 '어른'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즉 '자신의 이해와 나라의 이해가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민주제는 굴러갈 수 없다. 그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다. 그러나,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어른'의 수가 늘어나면, 공공의 복지를 살피지 않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즉 '아이')이 얻는 이익은 증대된다. 사회가 민주화되면 될수록 비주권적이고 비민주적으로 구는 자들이 더욱 큰 어드밴티지를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즉 민주제란, 그 구성원들이 끊임 없이 '다른 녀석들은 법과 논리를 지키고, 상식에 따르고, 공공의 복지를 배려하게 해 놓자. 나 하나만은 빠져나와 이기적, 위법적, 비민주적으로 살자' 라고 유혹하는 시스템이다.
     어려운 작업이다. '최악의 통치제도'라고 처칠이 말한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래도 민주제도는 그 이외의 정치체제보다 '더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제 국가에서는 어쨌든 일정 수의 국민 스스로 노력한 것이 그대로 국력의 증대, 국운의 상승과 연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이 먼저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서에 따르면, 명군인 요(尭)임금이 오십 년 왕위를 지낸 후, 자신의 통치가 잘 이루어졌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변장하고 거리를 다녀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이 '만민이 행복한 것은 황제의 덕치 덕이다'라는 동요를 부르고 있었지만, 노인 한 사람은 배를 두드리며 '내 사는 데 임금의 힘이 있으나 마나'라고 큰소리치고 있었다. 황제의 자질과 지금 자신의 생활 사이에 상관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믿고 있었고, 노인은 믿지 않았다. 어느 쪽이 현실을 바르게 보고 있는지 어떤지는 차치하고서, 앞으로 '공공의 복지'를 위해 땀을 흘릴 용의가 있는 쪽이 누구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제정과 왕정의 나라에서는 통치자 한 명이 현명하면 선정을 베풀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군주 이외의 다른 백성들이 어떠한 판단력도 갖고 있지 않은 우둔한 유아여도 기능하는 제도, 오히려 그런 쪽일 수록 그럭저럭 기능하는 제도였다. 그래서 그들의 제도는 폐기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민주제를 지지하는 것은, 그것이 '될 수 있는 한 많은 국민이 적절한 판단력을 갖춘 어른일수록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잘 기능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민주제 국가는 일정 수의 국민이 어른일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민주제의 최대 장점이다.
     내 표현의 옳고 그름을 공적기관이 판단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는, 그 기관이 항상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많은 경우, 그 판단은 옳을 것이다). 그것은 국민의 적절한 판단력 함양에 이바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시민적 성숙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성년자를 위해 어른이 결정을 대신해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처리 방식이 정비된 사회에서 아이들은 어른이 되자고 마음 먹을 동기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당신이 판단하십시오'라고 권한을 넘긴다면, 사람은 자신의 판단력을 기를 수 없다. '당신이 결정하는 겁니다'라고 부탁한다면, 사람은 주권자로서의 자기형성을 시작할 수 없다.
     민주제는 그런 '도박'이다. 지금 일본의 민주제가 쇠락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그런 각오를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2020-03-26 15:03)

     

     

    저자 약력 
    우치다 다쓰루 
    1950년생. 사상가, 무도가.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거리의 한일론> 등.

     

     

    民主主義をめざさない社会 - 内田樹の研究室

    「サンデー毎日」に不定期連載という欄を持っている。三月に一度くらい思い立ったことを書く。5000字ほど頂いているので、わりとややこしい話が書ける。今回3月29日号に寄稿したのは民主制論である。「存在すべきもの(ゾルレン)」が「存在するもの(ザイン)」を律するという、宗教や武道では当たり前の話は政治にも当てはまるよという話である。  統治機構が崩れ始めている。公人たちが私利や保身のために「公共の福祉」を配慮することを止めたせいで、日本は次第に「国としての体」をなさなくなりつつある。  誰かの怠慢や不注意の帰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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