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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보朝鮮新報' 인터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3. 27. 10:36
출처: http://blog.tatsuru.com/2020/03/25_0749.html
[옮긴이 주: 역문에서 사용한 '재일한국인'이라는 명칭이 원문에는 '재일 코리언在日コリアン'으로 명기되어 있음]'조선신보' 3월 16/18일 병합호에 한일 문제에 관한 인터뷰가 게재되었다.
조총련계 매체 취재에 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지면상 자수 제한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풀 버전.
'골칫거리 이웃과는 이제 안녕' '한국인이라고 하는 병리' -- 작년, 잡지 '주간포스트週刊ポスト'는, 기사 내용 중에 이런 말을 늘어놓는 헤이트 스피치를 했다. 한민족에 대한 이상한 차별이 일본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가운데, '주간포스트' 발간사인 쇼가쿠칸小学館에 대한 집필거부를 선언한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 씨가 지금, 일본 사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 재일조선인을 둘러싼 일본 사회의 상황에 대해 느낀 바가 있습니까?
예전과 비교해 보았을 때 재일한국인에 대한 비관용, 차별이 공공연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원인은 아베 정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베 정권이 출범하고 난 뒤 7년 동안 '혐한'의 기운이 정치적으로 조성되고 말았습니다.
일본 사회의 재일한국인을 향한 차별적 감정은 2차 대전 이전부터 일관되게 존재해 왔습니다만, 그것을 공공연화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종류의 '분위기'가 결정했습니다. '차별적인 말은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억제의 분위기가 있으니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말은 하지 않아요. 이런 억제가 아베 정권 아래에서는 약해졌습니다. '혐한' 언설이 거리낌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극론이나 유언비어를 말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습니다만, 현 정권 하에서 그런 '소수의 극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NHK의 경영위원이 되고, 총리와 함께 식사를 하고, 마치 '권위 있는 인간' 같이 매체에 빈번하게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시민적 상식에 의해 억제되어야 할 비상식적인 발언이, 정권을 향한 공포나 아첨을 의식해 횡행하게 되었어요. 그것이 일본 사회 전체의 논리 열화를 가져왔습니다.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차별의식이 가시화된 것일 뿐,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감정이 보이지 않는 형태로 일본 사회 가운데 항상 잠재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베 정권이 끝난다면 지금처럼 눈에 띄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이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여러 문제 가운데서도 아베 정권이 장기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권 핵심 지지층 중에는 '권력자는 부정을 일으켜도 상관 없다' 라고 하는 도덕적인 허무주의에 침식되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정권이 자료를 날조, 은폐해도, 총리가 거짓말을 해도, 지지자를 세금으로 향응해도, '잘못이 아니다'라고 부루퉁해합니다. 부정을 저질러도 처벌 받지 않고, 법의 지배에 따르지 않은 채 지나가는 게 권력자의 특권이지 않나, 그런 특권적인 위치를 노력해서 얻었으니 여기에 불평 삼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친구가 인터넷 상에서 아소 다로를 비판하면 '자신이 재무 장관이 된 뒤에 말하라' 고 하는 답변이 날아듭니다. 내가 국정을 비판해도 '그럼 국회의원이 되어라'라고 트집 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못 하겠다면 입 다물라.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동일하게 '성공'한 사람만의 자격이다. 그것이 '현실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건 '현상에 불만이 있다면, 우선 현상을 받아들여라' 는 말과 같아요. 그야말로 절대적 현상 긍정입니다.
그들이 아베 총리를 지지하는 이유는, '그가 총리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동어반복인데도 그걸 모릅니다.
- 어째서 이런 사고방식이 생겨나게 된 걸까요?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렇겠죠. '시민 사회를 좀 더 성숙시킵시다' 라든가 '고용 상황을 개선합시다'라는 바람을 현실화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 하는 사람 눈 앞에서 '웃기시네' 라며 매도를 퍼붓고, 딱 잘라 비판하면 찰나적 쾌감과 전능감을 얻을 수 있어요. 자기 자신의 사회적 상승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게 잠깐의 상쾌함과 후련함이 되겠죠. 그러니 인터넷에서는 자신보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나 전문가의 발언을 상투적인 어구로 싸잡아 부정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로 넘쳐 흐르는 거예요.
유난히 성차별, 인종 차별을 부르짖는 사람들도 목적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여자 주제에' '한국인 주제에' 라고 '말 해선 안 되는 것'을 마음 편히 말하는 자신을 '쩌는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반도덕적이고 반 사회적인 것을 말하는 자신'에게 알량한 권력 실감을 느낄 수 있는 거예요.
원래 이런 차별적인 말을 시민들이 규범으로 억제하고, 수습해야 하는 것입니다. 법률로 처벌하는 차원 이전에, '그런 비상식적인 말을 해서는 안 돼' 라는 규제가 작동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의 일정 수가 '착실한 어른'이 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 사회에는 그런 비상식적인 언동에 대해 '정신 차려라!' 고 일갈하는 어른이 줄어들었어요.
- 그런 가운데 재일조선인도 숨 막히는 기분이 드는 것 같습니다.
일본에는 직업이나 수입 같은 능력으로 '분수'가 결정되고, 이에 따라 '틀에서 벗어나지 마라' 는 억제 명령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권력자가 된 뒤에 권력을 비판하라'는 말하자면 '자신의 분수를 알고, 주제를 파악해라, 깜냥에 맞지 않는 일은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 잡지가 일본 대학생을 인터뷰한 기사가 있었습니다만, 학생들이 지금 일본 대학으로부터 받고 있는 인상과도 거의 비슷합니다. '좁은 곳에 갖혀 있다' '숨 쉬기 힘들다' '옴짝달싹 못 한다'라고 하는 신체적인 인상을 말한 형용사였습니다. 숨막힘을 일본의 젊은이들이 공통으로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요, 이렇게 한탄하고 있는 학생들의 괴로움이 '분수를 알라'고 하는 금제 명령의 결과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어요. 그것 뿐만 아니예요. 학생들이 서로 '배역 캐릭터를 연기해 나가라' '되도 않는 짓은 하지 마라' 고 하는 형태로 상호규제를 행해, 서로 목을 조르는 거예요.
재일한국인의 경우에도 '재일한국인'이라는 딱지가 붙어서, 그 '역할' 연기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점점 좁은 곳으로 몰리는 거예요. '일본에 불만이 있으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 라고 하는 것은 '재무 장관에 불만이 있으면 재무장관이 돼' 라는 말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상응하는 사회적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마라. 싫다면 테두리를 규정하는 사회 자체를 떠나라' 는 말입니다.
- 이 분위기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일찍이 1960년대 안보 투쟁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된 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뒤를 이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는 '소득 2배 증가所得倍増' 와 '관용과 인내'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소득 2배'는 정치적 의견의 다름과는 상관 없이 모든 일본인이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관용과 인내'는 동질한 사회를 구성하는 가운데, 공감도 이해도 못 할 이웃이 섞일지라도, 그것을 견딜 것. 불쾌한 이웃과도 "서먹서먹" 공생하라는 말이었어요.
나는 이 슬로건을 선택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노선에 따라 일본은 역사적인 고도성장을 이뤄냈으니까요. 지금 일본은 1960년대 이후로 가장 깊은 나뉨의 골이 파였어요. 그러니 다시 한 번 '관용과 인내'를 내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작년, 기사에 '한국은 없어도 된다'라고 혐오발언을 한 '주간포스트' 발간사 쇼가쿠칸에 대해 집필거부를 선언하셨습니다.
쇼가쿠칸같은 큰 출판사에는 국민간 소통의 플랫폼을 형성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 있습니다. 작은 곳이라면 정치적 편향 발언을 유포해도 어떨지 모르겠지만, 쇼가쿠칸같은 규모의 출판사는 국민간 대화의 장을 설정하는 것이 사회적 책임입니다. 가지각색 의논에 대한 장을 제공하는 것이 일인데도, 국민간 분단을 획책하고, 국민의 일부를 배제 그리고 박해하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쇼가쿠칸에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자각이 없습니다. 매체의 열화가 이렇게 심해진 것을 보고 나는 심히 놀랐습니다.
- 표현의 자유란 무엇일까요?
무엇을 위한 표현의 자유인가? 그걸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의 자유는 '무엇이든 좋아하는 걸 말하면 돼. 그게 거짓말이어도, 사람을 상처 입혀도,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더럽혀도, 무엇이든 표현할 권리가 있어' 라고 하는 얼 빠진 말이 아닙니다. 언론의 자유가 존재하는 사회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보다 시민이 성숙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언론의 자유를 사수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어떤 공적 기관이나 누군가의 뛰어난 의견이라는 '판정자'가 있어서, 그 기관이나 개인이 전일적으로 '표현해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정 식별하게 되면, 시민들은 자신의 판단력을 높일 필요가 없어요. 그렇지만, 사안의 적부에 대한 판단을 타인에게 맡겨버린 인간은 결코 성숙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내가 언론의 자유를 지키자고 하는 것은, 시민들의 지성적, 감성적인 성숙을 저해하고 어린애인 채로 남겨두려는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서입니다. 시민이 모두 자기 자신의 판단을 방기한 채, 상위자에게 시시비비 판단을 맡겨 버려도 상관 없는 유아라면 다루기 편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집단은 머지 않아 멸망합니다.
표현의 자유는 단순한 원리 원칙이 아니고, 구체적인 성과를 목표로 한 수행적인 장치입니다. 이로 하여금 시민들의 성숙을 지원하고, 집단을 좀 더 강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위한 표현의 자유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입맛에 맞는 '표현의 자유'를 주워 섬기는 인간도, '윗 분들'에게 표현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맡겨 버리는 인간도, 나는 모두 신용하지 않습니다.
- 앞으로, 한반도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일본인의 다수가 근현대사를 거의 배우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의 식민지화와 그 지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많은 일본인들이 알지 못합니다. 적어도 강화도 조약으로부터 150년간의 역사에 관해 최저한의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징용 문제나 위안부 문제같은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정치가도 매체도 1965년 한일협정을 논의의 기점으로 해 두기 때문에,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득히 먼 이전부터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가 1965년 시점에도 해결되지 않았고 '미뤄 둔 것' 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똑같은 난문이니만큼, 간헐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이지요. 이걸 '끝난 일이다' 라고 딱 잘라 끝내버린다면 역사에 대한 무지나 다름 없어요. 해결하기 어려운 난문은 난문으로 받아들이고, 오랜 시간을 들여 양국의 중지를 모아 논의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어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왜 이리 풀기 어려운 것일까' 라는 곳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일 역사적인 관계에 대한 지식으로는, 평균적인 한국 사람이 더 자세히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최근 한국 영화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식민지 시대의 친일파에 관한 영화 등, 자기 나라의 '어두운 면'을 영상화해, 이야기로 국민적인 공유를 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일본에는 이런 노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한국에 커다란 지적 이점이 있습니다. 이대로 일본인이 자기 나라의 '어두운 면'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린다면, 얼마 되지 않아 한일간 국력에 커다란 격차가 생기겠지요. 국력이란 엄밀히 말하면, 불편한 것을 포함해 어디까지 자국의 역사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것이 그릇의 크기입니다.
(2020-03-25 07:49)'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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