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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것은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3. 16. 22:47

    이라는 주제를 받았다. 잘 생각해 보면 수수께끼같은 논제다. 그런 건 ‘뻔한 일 아닌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구태여 주제로 놓고 논하고자 한다는 것은, ‘질의 좋고 나쁨’이 ‘뻔한 일’이 아니게 된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아마 편집자 중 어떤 분이, 누군가의 언동에 대해 ‘질이 형편 없군’ 하는 인상을 말했을 때, ‘당신 지금 <질이 형편 없다>고 말했는데, 그건 대체 어떤 객관적 근거에 기반한 언명인데 그러세요. <질의 좋음/나쁨>을 판정하겠다면, 그 기준을 즉각 제시하시오’ 와 같은 주장을 듣고서 심란해졌던 적이 있어서일 것이다.

     

    최근 들어 이런 사례가 많다. 일일이 ‘개인적 의견입니다만’ 이라든가 ‘사진은 본 글의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라든가 하는 조건을 달지 않으면 시끄럽게 트집 잡기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포스트모던’ 이 가진 고유한 지적 황폐의 발현일 수 있다고 미국의 문예평론가 미치코 카쿠타니는 지적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은 ‘객관적 현실’이라는 말을 가벼이 입에 담지 않게 된 시대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은, 각자의 처지 즉 인종, 국적, 성별, 계급, 종교, 이념 같은 편향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그 자체는 그다지 생경한 지견이 아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의 객관성을 과대평가해선 안 된다는 것은,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 이래로 계속 언급되어 왔던 것이다. 허나, 포스트모던 시기에는 그 지적 자제(自制)가 과격화했다.

     

    ‘자제가 과격화했다’라는 말은 언뜻 들었을 때 이상하지만, 그런 게 있다. 플라톤의 경우, 조금만 살펴보면 동굴 바깥에 객관적 현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던이 과격화한 시대에서는 ‘조금만 더 주의깊게 살펴보아 현실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더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선고가 내려진 것이다. 객관적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쓸모 없으므로 이제는 하지 말자는 게 된 것이다. 정말이지 대단하다.

     

    ‘세상을 보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 자체는 상식적인 언명이다. 허나, 그로부터 ‘만인이 공유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데까지 가면, 이는 ‘비상식’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2017년 1월 22일, 백악관 대변인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과 관련해 ‘사상 최대 인파의 집결’이라고 허위 언명(言明)을 한 일이 있었고, 이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은 대통령 고문 켈리엔 콘웨이는 대변인의 언명이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를 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비상식’과 관련한 획기적인 사건이 된다.

     

    일본의 언론은 이 언명을 ‘또 하나의 사실’이라고 번역하는데, 콘웨이는 이때 facts라고 복수형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하나만이 아닌, 무수한 대안적 사실이 등(等)권리적으로 병존하고 있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 이날 선언되었던 것이다.

     

    진실성의 증명을 아무도 하지 못하는 이상, 목소리를 낼 기회가 많은 인간, 목소리가 큰 인간의 승리로 돌아간다. 이것이 ‘포스트’ 포스트 모던 시대 지적 퇴폐의 실상이다. 지적 절도(節度)가 과격화한 탓에, 지적 무법 상태가 현출(現出)한 것이다.

     

    객관적 사실조차도 회의의 대상이 되는 시대에 ‘질의 좋음/나쁨’ 같은 판단에 보편성이 요구될 턱이 없다. 물론 거기서 얘기가 끝날 수는 없다.

     

    ‘이 세상에 질의 좋고 나쁨과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냉소하며 일이 매듭지어져 흘러가면 이 세상은 캄캄해진다. 어떤 시대든지, 형편 없는 질은 단호히 물리쳐야만 하며, 훌륭한 질은 옹호되고 기림받아야만 한다. 이 세상에는 ‘얼터너티브’를 인정해도 되는 것이 있으며, 인정해야만 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품위(decency)는 결코 얼터너티브를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품위는 그 본질을 따져보자면 ‘집단 내부적인 것’ ‘이너서클의 귀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도래한 것, 우리와 공통된 이론이나 가치관, 미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것, 다시말해 ‘타자’와 상대할 때의 작법(作法)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상대하는 작법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경(敬)’은 시라카와 시즈카에 의하면, ‘본래 제례에 관한 글자. 신에게 봉사할 때의 마음가짐’을 나타낸다. 가장 알기 쉬운 용례는 <논어>에 있는 ‘귀신은 공경하되 그것을 멀리할 것. 이를 앎이라 할 수 있다’ 이다.

     

    경이란 거리를 두는 것이다. 뜨거운 프라이팬을 잡을 때 요리용 장갑을 이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세상에는 ‘귀신’과 비슷한 것이 있다. 뭣도 모르고 접촉하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것이 허다하게 존재한다. 그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 ‘경’이다. 밑 빠진 항아리와도 같은 포스트모던적인 ‘모든 것은 똑같은 주관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명제는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이 두려움의 느낌을 치명적으로 결여하고 있다. (<學> 2023년 봄호)

     

     

    (2023-03-07 14:23)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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