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워크러시’의 나라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3. 13. 22:44
젊은 경제학자가 고령화 사회에 관한 대책으로 고령자의 ‘집단 자결’을 요청한 발언이 뉴욕타임즈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논란’ 발언을 한 예일대 조교수인 나리타 유스케 씨에 관해 기사에서는 ‘미국 학계에서는 거의 무명이지만, 일본의 SNS 상에서는 극단적인 견해를 표명하면서, 노인지배 아래 손해를 보고 있다며 불만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십 수만 명의 팔로워를 획득하고 있으며’, ‘사회적 금기를 희희낙락 파괴함으로써 열광적인 시청자를 획득해 온 일본의 선동자 중 한 명’으로 소개했다.
기사를 읽고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일본 사회를 ‘노인 지배(gerontocracy)’라고 부르는 것은 과연 적절한가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확실히 일본 사회에는 ‘권력을 가진 노인들’이 만연해 있어서, 젊은 사람들의 커리어 형성을 막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지방에는 압도적 다수의 ‘권력을 갖지 않은 노인들’이 있다. 그들은 지배당하고, 수탈당하며,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측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사회를 ‘노인 지배’라고 부르는 게 적절할까.
그럼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권력자 지배(powercracy)’라는 말이 떠올랐다.
물론 그런 정치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지금 필자가 생각해냈으니). 허나,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가진다’ ‘지배하는 자가 지배한다’는 일본의 정치 체제의 동어반복성을 형용하는 데에는 ‘파워크러시’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까.
보통 왕정이든, 귀족정이든, 과두정이든, 민주정이든, 주권자는 그 권리를 정당화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 ‘민의의 반영이다’, 혹은 단적으로 ‘현명하니까’ 등. ‘파워크러시’는 다르다. 권력자의 정통성의 근거가 ‘이미 권력을 갖고 있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파워크러시’의 나라에서는 권력자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다. 권력자를 비판할 수 있는 것은 권력자뿐이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상대 소수가 된 야당에는 정권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할 수 있는 것은 ‘반발’ 뿐이다). 시민에게도 정치에 대한 불만을 말할 권리는 없다. 불만을 말하면 ‘그러면 네가 국회의원이 되면 된다’는 말을 듣는다. 언론 유명인을 비판하면 ‘그러면 네가 유명해져서 언론을 통해 자기 의견을 말하면 된다’는 말을 듣는다.
‘파워크러시’의 나라에서 권력자가 권력자인 것은, 정치적으로 탁월해서도, 지적으로 우수해서도, 윤리적으로 하자가 없어서도 아니다. 이미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파워크러시’이다. ‘파워크러시’의 사회에서는 ‘권력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권력자임’의 정통성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웬걸.
예전에 어느 정치가가 국회의원을 은퇴하면서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한 일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후대를 잇게 된 그 아들은 곧바로 홈페이지에 자신의 가계도를 올리고, 친척 중에 세 명이 총리를 포함한 몇 명의 국회의원이 있다는 ‘혈통 증명’을 과시해 보였다.* 자신이 국회의원으로서 적절한지에 대한 근거로서 ‘국회의원을 배출한 가계에 속한다’를 내건 것이다. 아마 본인이나 그것을 제안한 주위의 인간 모두, 그것이 가장 호소력이 있다고 믿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리라. ‘이미 권력 측에 있는 것이, 앞으로도 권력의 측에 서기 위한 최우선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이다’라는 ‘파워크러시’ 신앙을 이렇게까지 천진난만하게 표명한 사례는 역시 드물다.
(* 일본은 내각제로 총리는 국회의원임. -옮긴이)
우리나라가 ‘파워크러시’ 나라라고 생각하면, 지금 권력자들의 이상한 언동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들의 비논리성이나 비윤리성은 딱히 무언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채택한 비정한 수단이 아닌 것이다. 권력자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탁월한 정치적 견식을 가지는 것도, 웅변의 재능을 타고나는 것도, 민심 장악에 능란한 것도 아닌, ‘실제로 권력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기성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법 아래의 평등’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다는 것, ‘비상식’이라는 평가가 자신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 타인에게 쓸데 없는 굴욕감을 선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어필하게 된다.
참으로 난감한 것은 ‘파워크러시’의 나라에서는 권력자 뿐만이 아니라 권력을 가지지 않은 일반 시민까지 그 영향을 받아 ‘권력자같은 태도’를 다투게 된다.
지자(智者)가 통치하는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지자처럼 보이게끔 할 것이다. 유덕(有德)한 사람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도 또한 유덕자처럼 보이게끔 처신할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권력적으로 행동하는 자가 통치하는 나라에서 출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권력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
정말이지 요즘들어 비상식적이고, 오만하며, 공격적인 사람이 늘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딱히 일본인의 인격이 열화한 게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의 사회적 상승을 노리고서, ‘못된 자식’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깨닫고서, 납득이 갔다.
(2023-02-22 11:05)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지방 이주자들에게 이야기한 것 (1) 2023.03.15 70년 후의 텔레비전 (0) 2023.03.14 생산성 높은 사회의 말로 (0) 2023.03.12 중국 최신 사정 (0) 2023.03.12 갈등하는 공산당 (0) 2023.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