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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후의 텔레비전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3. 14. 22:34
‘70년 후의 티브이’
라는 이상한 주제를 수락했다. NHK가 티브이 방송을 시작했던 게 70년 전이므로, 7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를 예측해 달라는 것이다. 아마 설문 답변자의 과반수는 ‘70년 후에 티브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문제는 언제쯤 티브이가 사라질까 하는 것이다. 5년 후일까, 10년 후일까, 아니면 좀 더 살아남을 것일까. 어찌됐든 ‘정도의 차이’이다. 물론, 업계 내부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필사적으로 중요한 ‘정도의 차이’겠지만, 머지 않아 티브이가 주요 매체의 일각으로부터 탈락한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티브이를 보는 습관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과거 수년 동안을 되짚어 봐도, 보고자 하는 프로를 보기 위해 티브이를 켜는 동작을 했던 것은 국정 선거 개표 방송 때뿐이다. 지금은 그것조차 방송 시작과 동시에 ‘당선 유력’이 뜨면서 대세가 정해져버리는 마당에, 보기를 그만두게 된다.
지금도 거실에 있을 때는 50인치짜리 텔레비전 앞이 필자의 지정석이지만, 그것은 넷플릭스나 아마존 비디오, 케이블에서 스트리밍되는 드라마나 영화, 스포츠 중계를 보기 위해서이지, 티브이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가끔 잘못 티브이를 트는 경우가 있는데, 낯선 사람이 큰 소리를 지르거나 혹은 모르는 상품의 광고 둘 중 하나이기에, 바로 꺼버린다. 필자에게 있어 티브이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나, 오락 방송을 보기 위해서나, 이제 더는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매체가 아니게 되었다. 필자 주위에서도 티브이 프로에 대한 얘기가 화제로 오르는 경우는 없게 되었다. 한류 드라마 얘기는 곧잘 화제로 오르나, 그것은 모두 유료 스트리밍되는 것들에 관해서다. 이 추세를 이제는 멈출 수 없을 것이다.
NHK는 이제 잠시나마 ‘국영 방송’ (정권의 홍보 매체) 로서 연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다른 지상파는 어느 시점에서 비즈니스 모델로서 성립하지 않게 될 것이다. 지상파라는 비즈니스 모델은 광고주가 티브이 광고에 투자하는 광고비 (그 상당 부분을 덴쓰 같은 대행사가 먹는다) 가, 광고의 효과에 의한 수익분을 상회한다고 판정되는 시점에서 끝이다. 그 계산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앞으로 일본은 급격한 인구 감소가 시작되고, 경제 활동의 침체가 지속된다. 서민의 소비 생활이 둔화하고, 한 줌의 부유층만이 돈을 물처럼 쓰게 되고 보면, 티브이 광고에 의해 상품 매상이 급증하는 사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초고층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에 사는 부유층들의 욕망은 애초에 티브이 광고에 의해서 환기되는 레벨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역풍에 대항해 지상파 모델을 유지하려고 해도, 티브이 제작 측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콘텐츠 제작 비용을 절감하는 것과, 광고비를 인하해 ‘아무 기업이나 티브이 광고를 낼 수 있습니다’ 하는 상태가 되는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티브이를 보는 게 괴롭게 될 것이다.
광고를 내보내는 대신 콘텐츠를 무료로 송출하는 ‘지상파라는 비즈니스 모델’ 그 자체는 아주 잘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을 떠올린 사람은 천재다. 하지만, 그것은 우상향하는 경제성장이 이어지면서, 소비자가 신기한 상품에 관한 정보에 ‘목말라하는’ 세계를 전제로 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젊은 사람은 믿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티브이 전성기에 우리는 광고에 프로그램 그 자체와 똑같은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했다. 1950~60년대에 ‘티브이 키드’였던 때, 광고 시간을 참아야 할 대상으로 흘려넘긴 기억이 필자에게는 없다.
어린이들은 티브이에 나오는 CM송을 따라 불렀다. <월광 가면>은 ‘타케다타케다타케다~’ 하는 타케다 약품의 광고와 ‘콤비’ 프로그램이었고, <와, 와, 와~ 와가 세 개> 하는 미쓰와(三和) 비누의 광고는 <명견 래시>의 ‘서곡’이었다.
광고는 컨텐츠의 중요한 구성요소였으며, 프로그램의 매력과 광고의 소구력은 혼연일체가 되었다. ‘제공’ 받는 프로그램을 우리는 ‘배포 큰 광고주로부터 받은 증여물’로서 수취했다. 그래서 그 감사의 마음을 (자기 돈으로 상품을 살 만큼의 재력은 없었으므로) 학교에 갔다 와서 CM송을 소리 높여 부르며, 모친이 장을 보러 갈 때에 몇 개의 선택지가 있으면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의 광고주가 만든 상품’을 사게끔 간청함으로써 표현했던 것이다.
프레데릭 브라운의 SF 단편으로 <광고주의 한마디>라는 작품이 있다. 프로그램을 방송할 때, 만약 ‘광고주의 한마디’라는 요청이 있으면, 방송국과 시청자 모두 잠자코 그것을 삼가 들어야만 한다는 묵계(默契)가 1950년대 미국에는 존재했다. 브라운의 단편에서는, 전 시청자가 광고주의 수수께끼같은 한마디를 어떻게 해석할까 지혜를 짜올린다 (덕분에 인류는 파국으로부터 구원받는다).
광고주가 향수했던 이 예외적인 위신은 현재 티브이에서는 이제 바랄 만한 것도 못된다. 컨텐츠는 컨텐츠, 광고는 광고, 그 사이에는 이제 특단의 정서적인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이 정기적으로 시청하는 방송조차, 그 광고주에게 ‘이렇게 멋진 프로그램을 ‘제공’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하는 감사의 마음을 품는 시청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프로그램을 향한 애착이 광고주가 판매하고 있는 상품에 어떤 종류의 ‘아우라’를 부여했던 목가적인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티브이의 마법’은 그때 사라졌다.
(2023-02-22 11:4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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