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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신 들린 미국 (<소프트 앤 콰이어트> 팜플렛)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3. 20. 21:28

    전 세계 어디에나 증오발언은 존재하지만, 미국에서의 ‘차별’과 ‘폭력’의 돌출만은 ‘병적’이라고 형용해도 좋을 것이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령 선언을 발령한 것은 남북전쟁 중인 1863년이다. 하지만, 인종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북전쟁 후 한 시기에는, 남부의 주에서도 흑인 정치가가 속속 등장하고, 흑인 의원이 주 의회의 과반수를 점하는 주조차 있었지만, 나중에 무시무시한 백래시가 찾아왔다. 북군의 철수와 동시에 남부의 주에서는 공립 학교에서의 인종 분리, 공원, 레스토랑, 호텔 등 공공 시설의 사용 금지 및 제한, 식자(識者) 능력 시험 부과에 따른 투표권의 제한 등, 흑인을 배제하기 위한 여러 주법(州法)이 제정되었다 (‘짐 크로우 법’ 이라고 총칭된다).

     

    우리는 노예 해방 선언 뒤, 완만하기는 하지만, 미국에서의 인종 차별은 단계적으로 해소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데, 그것은 틀렸다. 일단 흑인들은 노예 신분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남부의 주에서는, 그들을 사실상 피차별 신분으로 전락시키는 일이 한번 더 합법화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19세기 말 이야기다. 1964년 공민권법으로 흑인과 백인이 동등한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인권을 향유할 수 있음이 역사상 최초로 확정되기까지 1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미국에서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일어남으로써, 우리는 인종차별이 아직까지도 미국 사회를 깊이 좀먹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어째서 인종차별의 철폐가 미국에서 지지부진하였는가?

     

    소수자 차별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이다, 미국만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이란 어차피 ‘그런 것이다’ 라며 시니컬하게 사고 정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인간은 거듭 가혹하고 잔학하나, 그럼에도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 점포나 레스토랑에서 소수자를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것과, 소수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한다는 것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상대의 인격을 공격하는 것과, 상대의 신체를 파괴하는 것 사이에는, 보통 인간으로서는 넘기 매우 곤란한 심리적 벽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법치국가라면, 중죄인으로서 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수지 맞지 않는 일’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만 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 벽이 낮다. 심각할 정도로 낮다. 그래서, 사소한 계기로 사람은 이 벽을 넘고 만다.

     

    이 작품은, 차별 의식이 조금 과잉되었기는 하지만, 평범한 시민 생활을 보내는 사람이, 사소한 계기로 살인을 범하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의 상당히 용이한 전환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가져다주는 쇼크과 공포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인종 차별 폭력을 삽화적으로 그린 영화가 몇 개 있다. 인종차별주의자와 성차별주의자가 추잡스러운 말을 여기저기 토해내는 장면을 필자는 다양한 영화에서 보아왔다. 하지만, 그러한 짓을 하는 자는 대체로 ‘보통 사람’이 아니다. 스킨헤드라든가, 약물중독자라든가, 부랑자라든가 하는 ‘평범하지 않다는 낙인’을 짊어진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차별적인 마인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이유는 납득이 가능하다. 그들 자신이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차별받아왔으므로, 그 원한이 ‘그들보다 더욱 사회적으로 주변적이면서, 반격할 실력이 없는 사람’을 향하는 것이다. 알기 쉬운 구조다. 그래서 사회 복지 제도를 정비한다든지, 세심한 배려를 보여주는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이러한 유형의 피차별의식은 상당히 완화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딱히 누군가로부터 차별받지도 않고, 그 인종 속성에 따른 사회적 불이익을 입고 있지도 않은 ‘보통 사람’ 가운데 자라난 차별 의식과 소수자에 대한 증오이다. 그들은 무언가 구체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차별 의식과 증오는 환상적인 것이다.

     

    현실적 근거를 가진 편견이라면 현실적 정책에 의해 교정 가능하다. 허나, 환상에 의해 자라난 편견은 현실을 아무리 건드려도 교정할 수 없다. 이 영화의 무서움은 거기에 있다.

     

    어째서 미국에서는 그러한 환상적인 차별 의식이 ‘보통 사람’의 심리의 심층에 뿌리내리고 있는가. 그에 대한 개인적인 설명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미국은 자유의 나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론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한마디 덧붙이자면 ‘미국은 자유에 병적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나라’ 가 될 것이다.

     

    미국은 독립전쟁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주권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시민에게는 부당한 정부의 지배를 실력으로써 부정할 권리가 있다는 점은 미국 건국의 기본적인 아이디어이다. 독립선언에는, 정부가 시민들의 권리를 해하는 행위를 한 경우에는 ‘인민에게 정부를 개혁, 혹은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권리가 있다’고 명기되어 있다.

     

    독립선언 11년 후에 제정된 합중국 헌법에는, 과연 시민의 저항권・혁명권은 명기되어 있지 않다. 그것을 보충하려는 듯이, 수정 헌법 제 1조와 2조에 ‘자유를 보장한다’는 문언이 쓰여져 있다.

     

    수정 헌법 1조는 ‘신앙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인민이 정부에 청원할 권리’를 보증하고 있다. ‘청원(petition)’이라는 것은 ‘저항권’ ‘혁명권’을 희석한 표현이다. 시민은 정부에 대해 ‘각종 악습을 제거하기 위해’, ‘평화로이 집회를 할’ 권리가 있다고 수정 제 1조에는 적혀져 있다. ‘제거(redress)’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수단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그것을 위한 시민의 결집은 허용되어 있으나, ‘평화롭게(peaceably)’ 라는 한정이 붙어있다.

     

    ‘평화롭게’라는 한정이 더해짐으로서, 수정헌법 제 2조에는 ‘무장권’이 남게 되었다.

     

    독립전쟁에서의 전투의 주력은 ‘무장한 시민(밀리시아)’이었다. 무장한 시민이 미국이 가진 군사적 실력의 본능인 것이다. 그래서 합중국 헌법에는 상비군의 보유가 금지되어 있다(대부분의 사람이 모를 것으로 생각되는데, 합중국 헌법 8조 12항에 명기되어 있다).

     

    2020년 1월 6일의 연방 의회를 향한 난입 사건은 우리 일본인에게는 ‘폭도의 난입’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반도(叛徒)들은 주관적으로는 독립 선언에 명기된 바와 같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부를 ‘개혁・폐지할 권리’를 행사했던 것이다. 그것을 ‘각종 악습의 제거’를 위한 ‘청원’이라고 생각하는 시민에게 있어, 그것이 위법 취급을 당한다는 것을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했으리라.

     

    미국은 시민적 자유를 중히 여기는 사회이다. 병적일 정도로 중히 여긴다고 말해도 좋다. 그래서 평등이 이렇게까지 격하게 기피되는 것이다. 그렇다 함은, 자유와 평등은 원리적으로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전 국민이 똑같이 잘살고, 건강하며, 문화적인 생활을 보내는 사회를 실현시키려 한다면, 우선 부유한 사람으로부터 세금을 많이 걷고, 약자 차별을 법률로 금지하며, 약자를 지키고, 부양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한다. 언론의 자유를 어느 정도 규제하고(인종차별주의적, 성차별주의적 발언이 억제의 대상이 된다), 사재(私財)의 일부를 공공에 공탁(供託)시키는 시스템 없이 평등은 실현될 수 없다. 공권력이 시민의 생활에 개입하고, 시민적 자유의 일부를 제한하는 일 없이, 평등은 달성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미국에는 많이 있다. 놀랄 정도로 많이 있다. 그들은 ‘사회적 공정’이라든가 ‘평등’을 단적으로 악으로 간주한다. 그런 것은 근대 서구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생득적인 차이나 능력 차에 따른 위계 서열이 형성되는 게 뭐가 나쁘냐고 단언하며, ‘정치적 올바름’을 일축하고, 민주주의보다 개인의 자유를 우선하는 과격한 리버테리언(현재는 ‘신 반동주의자’라든가 ‘가속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한다)이 지금 미국에는 족생(簇生)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확신범적인 차별주의자가 미국에서 대량 발생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미국에서는 ‘자유는 평등에 우선한다’가 국시 가운데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그다지 없으므로, 필자가 대신 설명한다.

     

    애초에 합중국 헌법에 ‘평등의 실현’은 정부의 목표로서 내걸려있지 않다.

     

    독립 선언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만인은 평등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만인은 창조주로부터 빼앗길 수 없는 몇가지 권리ー생명, 자유, 행복 추구권ー을 부여받았다.’

     

    즉, 합중국 건국에 앞서서, 이미 만인은 신에 의해 ‘평등한 존재로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미 창조주에 의해 평등은 달성되어 있는 것이다.

     

    ‘생명・자유・행복 추구권’은 정부가 보증하고, 그것을 지켜야만 한다. 그것은 미국이 존재하는 근본 원리이다. 그래서 그것을 게을리한 정부는 ‘개혁, 폐지’될 리스크를 부담한다. 허나, ‘평등을 실현하라’는 말은 독립선언에도, 헌법에도 쓰여져 있지 않다. 그래서 평등의 실현을 게을리한 정부는 ‘개혁, 폐지’될 리스크를 부담하지 않는다.

     

    평등의 실현은 정부의 의무도, 시민의 의무도 아닌 것이다.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뒤에 이어지는 자유로운 경쟁에 따라 다소간의 강약 빈부의 차가 생겨나도, 그것은 각자도생인 것이다.

     

    그러한 사상이 미국의 경우는 건국 이래 계속 살아있었다. 살아있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강화되었다.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 평등을 기피하는 사람들은 강자, 승자이며, 사회의 규칙을 정하고,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사회적 공정이나 사회 정의의 실현보다 나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단언하는 게 조금도 거리낌 드는 일이 아니며, 부끄러워할 일도 아닌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인 베스 데 아라우호는 모친이 중국계, 부친이 브라질인인 여성이다. 그녀가 어떤 사회를 ‘제대로 된’ 사회라고 보는가, 그 개인적 기준을 필자는 알지 못하지만, 영화를 놓고 보는 한, 소수자 측에 선 그녀는 미국을 ‘어지간히 이상한 사회’로 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영화 초반부에, ‘아리아인 단결을 위한 딸들’의 한 명은 동료 소수자가 자신보다 먼저 관리자로 등용된 것을 ‘어퍼머티브 액션’ 때문이라고 거세게 비판한다. 우리는 평등하게 창조된 존재로서 자유로이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가 소수자라는 이유로 과도한 이점을 향유하는 것은 ‘불공평’이라는 그녀의 반평등주의 연설은 ‘딸들’ 전원의 갈채를 받는다. 아마 이 갈채에 동조하는 사람이 미국에는 수천만 명 있을 것이라고 본다. ‘딸들’이 무시무시한 폭행을 가하는 중국인 자매는 그녀들보다 부유하고, 그녀들보다 좋은 집에 살고 있다. 이 중국인 자매는 ‘딸들’의 눈에는 그녀들보다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증오를 배가시킨다. 빈부의 차이는 능력의 차이의 귀결이라는 자유 경쟁 룰을 신봉하고 있을 ‘딸들’은, 어째서인지 소수자에 대해서는, 그 성공이나 부유함이 자유경쟁 하에서 노력으로 얻은 트로피라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평등’주의적인 권력의 간섭에 의해 얻은 ‘부당 이익’인 것이다.

     

    소수자가 자신들보다 열위에 있으면 ‘자유’의 이름으로 모욕하고, 자신들보다 상위에 있으면 ‘평등’의 은혜를 입은 것이라며 매도한다. 이런 논리에는 출구가 없다. ‘딸들’이 가진 이 심리의 조형에는, 아마 소수자인 데 아라우호 감독 자신의 실제 체험이 농후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 작품이 무언가 정치적 주장을 하는 영화(pièce à these)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틀림 없이 히치콕의 <로프>를 오마주한 원테이크 리얼타임 실험작품이다. 그리고 관객 서비스 가득한 호러 영화이기도 하다. ‘인간은 괴물보다 무섭다’라는 (태고적부터 일러온 교훈인) 공포담이다.

     

    영화는 ‘죽었어야 할 것’이 호수에서 떠오르는 <13일의 금요일>적인 장면으로 끝난다. ‘죽었어야 할 것의 재림’을 프랑스어로는 revenant(유령)이라고 한다. ‘딸들’의 소수자에 대한 증오는 결코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반복적으로 여러가지 증상으로써 ‘재귀’해 올 것이다. 그것이 미국이 사로잡힌 유령인 것이다. 미국이 이 유령과 연을 끊을 날이 올까. 아마 언젠가는 올 테지만, 한참 뒤의 일일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2023-03-07 14:25)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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