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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서평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2. 12. 21:31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의 서평을 요청받아, 신문사의 온라인판에 기고했다.
‘탈진실 시대의 지침서’
‘탈진실의 시대’라는 말이 우리들의 시대상을 형용하는 말로 부합함을 실감하게 된 것은 언제인가. 이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밀하게 시일을 특정할 수 있다. 그것은 2017년 1월 22일이다. 그날 방영된 ‘미트 더 프레스’의 인터뷰에 따르면 미합중국 대통령 고문 켈리엔 콘웨이는, 백악관 대변인 숀 스파이서가 제 45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취임식에 ‘과거 대비 최대 인파가 취임식을 직접 보기 위해 모였다’고 허위 언명을 한 것과 관련한 질문에, 그 언명은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을 전하려던 것이었다고 대변인의 발언을 옹호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단일한, 객관적인 현실 같은 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각양각색의 시점에서 바라본, 각양각색의 프레임으로 잘라낸, 각양각색의 문맥상에 배열된, 전혀 비슷하지 않은 사실들이다.
Alternative facts를 일본의 언론은 ‘또 하나의 사실(もう一つの事実)’로 옮기는데, 잘 보면 알 수 있듯이 콘웨이는 이때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다. ‘또 하나’가 아닌 것이다.
이런 시니컬한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퇴락한 형태’라고 진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청할 만한 지견이라고 생각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직선적인 이야기로서의 역사’나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메타한 이야기’를 ‘서구중심주의’로 싸잡아 휴지통에 던져넣고 말았다. 역사해석에 있어서의 서구의 자민족 중심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점은 틀림 없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위업이다. 하지만,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의 진실성이나 정합성을 회의하라’라는 엄격한 지적 긴장에 사람들은 길게 배겨나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는 주관적인 편향이 가해져 있다’는 자기 회의에 갇혀 있는 것에 지친 나머지,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것에는 주관적인 편향이 가해져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확대하는 것으로서 지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추론했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인식에는 계급, 성차, 인종, 종교적 편향이 가해져 있다 (옳은 말). 인간의 지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 나간 말). 모든 지견은 끝까지 파고들어 보면 자민족 중심주의적 편견이며, 그 한계로 인해 서로 등가이다 (틀린 말).’
이렇게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조리 부정한 자민족 중심주의가 훌륭히 한 바퀴 돌아 모조리 긍정받게 되었다. 이것이 ‘포스트 진실의 시대’의 실상이다. 음울해지는 얘기지만, 이것이 사실이므로 어쩔 수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우크라이나 지도부는 나치다’라는 ‘러시아의 내러티브’의 귀결이지만, 정책의 연원이 망상적인 내러티브여서는 전쟁이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신체를 파괴하고, 도시가 잿더미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망상적인 내러티브일수록 강한 현실 변성력(變成力)을 갖는다.
조너선 갓셜의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은 이렇게 하여 ‘이야기가 세상을 망치고 있는’ 현실에 대한 풍부한 실례의 제시와, 그로부터 이탈하려는 기도(이는 희망적 관측에 그친다)를 쓴 것이다. 그 문제의식은 다음 문장을 통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의 분극화, 환경 파괴, 제멋대로인 데마고그, 전쟁, 증오ー문명의 거악을 가져다오는 제 요인의 이면에는 반드시, 똑같은 주범으로서의 요인이 관찰된다. 그것은 마음을 신산하게 하는 이야기다. 이 책은 인간 행동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은 아니지만, 적어도 최악의 부분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현재 우리들이 스스로 던질 수 있는 질문 중 가장 화급한 질문은, 대단히 진부해진 “어떻게 하면 이야기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이야기로부터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가”이다.” (29~30쪽, 강조는 저자)
이야기가 우리를 매료하는 것은, 그것에 확실한 실효성이 있기 때문이다. 갓셜에 의하면, 우리가 지금도 애용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원형은 신석기시대의 것에서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최신 인류학적 지견은 수렵 채집민이 매우 프렌들리하고 상호 부조적인 코뮌을 형성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수렵 채집민에게 있어 생활의 대원칙은 대단히 단순하다. 서로를 결속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하라. 결속을 해하는 불씨가 되는 행위를 하지 말라. 분단의 씨앗을 뿌리지 말라(음식, 섹스 파트너, 주목 등). 자신의 몫 이상을 독점하지 말라. 완력을 가졌어도 그것을 과시하지 말라. 사냥하는 재능이나 매력적인 용모가 있어도 타인에게 자랑하지 말라. 즉 좋은 사람이 되어라.” (161쪽)
그러한 원시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스토리의 태고적인 원형이 창출되었다. 종교, 도덕, 경제 활동, 친족 형성에 관한 규범들을 구성원들이 깊이 내면화하는데 있어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가장 많이, 가장 잘 배운다” (45쪽). 이야기를 통해 집단의 젊은 구성원들은 집단의 우주관과 가치관, 미의식, 행동 규범을 몸에 익힌다.
하지만, 이야기가 수렵 채집민 유래의 태고적인 기원을 가졌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야기의 한계 또한 된다.
이야기는 발생적으로는 결속력 있는, 동질성 높은 소집단을 형성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렇다 함은, 그것은 동시에 ‘타자’ ‘외부’와의 사이에 결정적인 경계선을 긋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배타적인 폭력의 기원이 자신이 속하는 집단에의 과잉 귀속감, 공감의 과잉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테러리스트가 적에게 철퇴를 가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은, 적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동포에 대해 깊은 공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부에 대한 공감이 적을 벌하는 인센티브가 된다.
“강한 증오의 이면에는 강한 애정이 있다. 그 증오와 애정은 모든 이야기에 의해서ー실제의 역사, 고대의 종교신화, 악의 음모론에의 탐닉에 의해 주입되었다.” (177쪽)
분명히 “스토리텔링의 빅뱅은 공감의 빅뱅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지만, 그것과 동시에 “이야기는 공감의 수만큼 비정(非情)을 낳는다”는 것도 된다 (177쪽). ‘공감’에는 ‘다크 사이드’가 있다.
이 ‘다크 사이드’가 가져다주는 해악을 어떻게 억제하고 최소화할 것인가. 그것이 갓셜의 이야기론이 제기하는 실천적인 주제이다. ‘어떻게 이야기로부터 세상을 구제할 것인가’가 탈진실 시대의 긴급한 학적(學的) 과제라는 갓셜의 의견에 필자는 깊이 동의한다.
‘이야기로부터 세상을 구제하는’ 수단을 갓셜은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타자를 향한 공감을 기를 수 있는 타입의 이야기. 다른 하나는 과학이다.
이야기는 애초에 소집단을 결속시키기 위한 장치이며, 집단의 외부나 타자와의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의 회로를 구축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뛰어난 이야기는 독자나 듣는이를 ‘타자의 마음 속’으로 데려다 주는 상정 이외의 기능을 발휘하는 일이 가능했다.
“이야기는 공감장치다. 이것이 기능할 때, 우리는 다른 세계,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뛰어든다. 이야기는 서로를 타자로 보는 것을, 궁극의 형태로 멈추게 한다. 즉 “그들”이 “우리들”이 된다. 이야기의 힘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때, 우리는 상대와의 차이는 환상이며, 편견에는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173쪽)
갓셜이 인용하고 있는 역사학자 린 헌트에 따르면, 18세기가 되면서 노예제, 가부장제, 고문 등이 ‘갑자기 비난받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은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형태, 즉 소설의 등장’이었다고 한다.
“헌트에 의하면, 소설은 자신의 가족, 혈족, 나라나 젠더 이외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그로 인해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덕 혁명의 계기를 만들었다.” (174쪽)
이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침울한 이야기만 읽어야 했던 독자에게 있어서 예외적인 낭보이다. 헌트에 의하면, 공감능력은 근육같은 것으로서, 픽션을 소비하면 소비할수록 공감의 ‘근력’은 강화된다는 모양이다. 갑자기 동의하기는 어려운 의견이지만, 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이 타자의 내면에 대한 상상력을 행사하기를 아까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갓셜이 기대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지적인 장치는 과학이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현실과 관련된 내러티브 중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를 발견해내기 위해 인간이 생각해 낸, 가장 신뢰성 있는 수법이다. (...) 과학은, 우리의 에고나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 앞에 실제 있는 것을 강제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이다.” (238쪽)
이 과학에의 신뢰라는 점에서 (플라톤을 향한 가차 없는 비판과 함께) 갓셜이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열심 독자였다는 것을 추찰(推察)할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며, 포퍼는 ‘과학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독특한 정의를 내린다.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가 외딴 섬에 연구실을 세우고, 거기서 정밀한 관찰과 분석을 행하여 학술 논문을 썼다고 하자. 고독한 연구자가 발표한 그 논문의 내용물은 현대 자연과학의 도달점과 훌륭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이제, 크루소는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포퍼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로빈슨의 과학에는 과학적 방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성과를 음미할 자가 그 이외에는 없고, 그 개인이 가진 심성사의 불가피한 귀결인 이런저런 편견을 정정해 줄 자가 그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판명을 하고 또한 이치에 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련을 쌓는 것이 가능한 것은, 그저 자신의 작업과 관련해 그것을 해보지 않은 인간을 향해 설명을 기도하기 위해서 뿐이며, 이 커뮤니케이션의 수련도 또한 과학적 방법의 구성요소인 것이다.” (<열린 사회와 그 적>, 강조는 우치다)
로빈슨의 지견이 ‘과학적이지 않다’고 판정된 것은 로빈슨의 과학적 지견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실제로는 옳았다). 그게 아니고, 어떤 언명이 과학적인가 그렇지 아니한가는, 그 언명이 ‘참인가 거짓인가’의 레벨이 아니라, ‘공공적인가 그렇지 아니한가’의 레벨에 있어서 결정된다는 점인 것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진리이다. 누가 반대하든 내가 한 언명의 진리성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소리높여 주장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설령 그것이 참이라 할지라도) 과학적이지 않다. ‘나의 가설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사후적 검증을 기다리고자 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언명은 (설령 틀렸다 하더라도) 과학적이다. 그런 것이다.
“우리가 <과학적 객관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학자의 개인적인 부당파성(不黨派性)의 산물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혹은 공공적 성격의 산물인 것이다. 그리고, 과학자의 개인적인 부당파성은 (설령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 사회적 혹은 제도적으로 구축된 과학적 객관성의 성과인 것이지, 그 기원이 아니다.” (같은 책, 강조는 우치다)
과학이 과학적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혹은 공공적인 성격’을 갖고 있을 때뿐이다. 과학자는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서는 과학적일 수 없다. 자신이 말하는 과학적 언명의 진위, 옳고 그름에 대한 검증과 판단을 사회적・공공적인 장에 맡김으로써 비로소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이 가진 그러한 약간 복잡한 성격을 통해 갓셜은 ‘이야기로부터의 이탈’의 실마리를 본다.
다만, 갓셜은 어떻게 과학에 대한 신뢰를 우리들 가운데 다시 한번 뿌리박을 수 있을까에 대해, 딱히 효과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을 뒤덮고 있는 이 커뮤니케이션 브레이크다운을 해결하는 방법까지 그에게 바라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갓셜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자신의 신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자기결정할 수 없는 이상, 자신과 다른 신념을 가진 타자에 대해 적어도 ‘경의’와 ‘외경’을 가질 것을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
“<그들>이 가진ー당신에게 있어서 <그들>이 누구든ー세계관의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와는 일치하지 않고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면, 그들은 불쌍한 사람일지도 모르거니와, 경우에 따라서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일지도 모르겠으나, 무시하고 깔볼 대상은 아니라는 점은 이해하자.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당신에 대해 똑같은 경의를 품어 줄 가능성이 높다.” (219쪽, 강조는 우치다)
타자와의 상호 이해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경의’ 정도는 가져도 좋지 않은가 하고 갓셜은 쓰고 있다. 그 말이 맞다고 본다.
‘경(敬)’이라는 한자의 원래 뜻은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에 의하면 ‘양 머리를 한 사람의 앞에 제례 그릇을 놓는 모양. 강족 사람을 희생시켜 제사지내는 뜻’ 이라는 상당히 피비린내 나는 것이다. 그로부터 ‘삼가다, 제례에 쓰여지다, 숭상하다’ 등의 뜻이 생겼다. ‘경’을 사용한 가장 인상적인 프레이즈는 ‘귀와 신은 공경하되 멀리 할 것. 이렇게 하면 지(知)라 할 수 있다’ 이다.
갓셜이 탈진실의 시대에 직면할 적에 실천적 결론으로서 밟아온 것이 만약 ‘타자는 공경하되 멀리할 것’ 이라는 지견이었다면, 그것은 공자가 ‘앎’이라고 부른 것과 우연히도 부합한다. 필자는 이것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2022년 8월 14일)
(2023-01-0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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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주 : 원문의 ポスト真実(포스트 진실)이라는 어휘는 한국 실정에 맞게 ‘탈진실’로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원문의 もう一つの事実(또 하나의 사실) 또한 이해를 돕기 위해 ‘대안적 사실’로 번역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참고: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417842 )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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