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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지마 다카시 씨의 추억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2. 1. 21:16
오다지마 다카시 씨의 부고가 도착한 것은, 미소기하라이 수행을 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메시지를 읽고 나서 도장으로 돌아가 수행을 계속했다. 오다지마 씨는, 이런 글이 쓰이는 걸 생전에 무척 싫어하던 사람이었지 하는 사실을 떠올리며, 자기 자신 멋대로 공양하려는 차원에서 헌사를 올린다.
필자가 처음으로 오다지마 씨의 문장을 읽은 것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였는데, 도쿄의 생활정보지 <시티 로드> 컬럼이었다. 다 읽고 나서 팬이 되었다. ‘젊은 세대에서도 대단한 사람이 나왔구나’ 라든가 ‘예측할 수 없는 재능이다’ 하고 놀란 것은 아니다. 그저, ‘이 사람의 글을 더 읽어보고 싶다’ 라고만 생각했다. 그만큼 중독성 있는 문장이었다. 그렇게 그가 쓴 글을 찾아내서 게걸스럽게 읽게 되었다.
실제로 존안을 뵐 기회를 얻은 것은 그로부터 20년 이상 지나고 나서다. 당시 마이니치 신문사에 있던 나카노 요코 씨가 평화헌법을 테마로 한 앤솔러지를 펴내고 싶다 하여 필자에게 기고를 의뢰해 왔다. 달리 누군가에게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하여, 히라카와 가쓰미, 오다지마 다카시, 마치야마 토모히로 이렇게 세 명의 이름을 꼽았다.
히라카와 군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이니 써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다지마, 마치야마 이렇게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고, 필자가 일방적으로 ‘팬’을 자처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원고 청탁을 받아줄지 어떨지 걱정했는데, 두 사람 모두 기고하겠다고 답장해주었다. 나카노 씨는 다른 작가나 평론가 몇 명에게도 요청했지만, 모두가 거절하여, 결국 책은 필자까지 4명이 필진이 되었다. 그것이 <평화 헌법 말입니다만> (2006년) 이다.
책이 나오게 되었으므로, 출판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롯폰기의 레스토랑에 모였다. 필자는 그때 처음으로 오다지마, 마치야마 두 분을 뵙게 되었다. 만나고 보니, 마치야마 씨는 다카라지마샤에 있었을 적에 오다지마 씨의 담당 편집자였던 인연이 있어서,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필자는 눈 앞에 ‘아이돌’이 두 명 있는 거니까, 그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했다. 히라카와 군은 이 두 사람을 애초에 잘 몰랐지만, 금세 오다지마 씨와 의기투합해버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뒤로도 우리와 오다지마 씨는 곧잘 만나게 되었다 (마치야마 씨는 이미 미국에 갔었다).
필자와 오다지마 씨는 성격상 거의 공통점이 없다.
오다지마 씨는 미식에 전혀 흥미가 없다. 신선한 생선회도, 기름진 육류에도 흥미를 표하지 않으며, 젓가락으로 싫다는 듯 멀리한다. 필자는 ‘맛있다 맛있어’ 하며 볼이 미어져라 완식한다. 오다지마 씨는 술도 즐기지 않는다. 필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홀짝홀짝 잔을 기울인다. 오다지마 씨는 그 대신 과자를 먹는다. 마작을 할 때도 여러가지 불량식품같은 스낵을 입 안에 계속 던진다.
오다지마 씨는 무사도나 무도, 수행 같은 것도 싫어했다. 종교도 꺼려했다. 그래서 신사나 불각에는 발걸음을 향하지 않고, 괴력난신을 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필자는 무도가여서 수행이 좋고, 수퍼 내추럴한 이야기에 사족을 못 쓴다. 우리 두 사람에게는 그다지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굉장히 사이가 좋았다.
무엇보다 필자는 오다지마 다카시가 쓴 글을 너무나 좋아했다. 추도를 위해, 그의 비평성이란 어떤 것이었나, 그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써보고자 한다.
그의 비평적 언설을 특징짓는 개성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이단’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정통’파 사람들을 말의 힘으로 자신의 곁에 끌어 당기려고 노력하는 점에 있었다. 고립되어 있다는 점은 그에게 있어 초기조건이었으며, 그는 그 점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이단자’로서 ‘정통’ 이나 ‘다수파’, ‘미풍양속’을 냉소한다든가, 일도양단하는 일을 그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소수파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도 아니며,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라고 그가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소수파란 그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적고, 같은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적다는 산문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파와 다수파 사이에는 옳고 그름이나 우열의 차이도 없다. 오다지마 씨는 그러한 ‘오픈 마인디드한 소수파’ 였다.
그는 소수파의 입장에서, 다수파를 향해 피아의 차이가 어디깨에 있는가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희유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소수파’ ‘이단’은 ‘다수파’ ‘정통’한테 등을 돌린다. 먼저 손을 뻗어주는 일은 없다. 하지만 오다지마 씨는 곧바로 다수파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리고 간절하게, 온 마음을 다해 ‘설명’을 시도했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이는 희유한 일이다. 보통 ‘소수파’ ‘이단’을 자임하는 사람들은 좀 불친절하다.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암호를 써서 말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군중들 사이에서, 소수파끼리 눈짓으로 통하는’ 식의 흉계같은 걸 꾸민다. 오다지마 씨는 그런 짓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이 고유명사를 모를 정도로 무지한 놈은 독자로 치지 않는다’ 라든가 ‘이 인용의 출전을 모를 정도의 초짜에게는 일러줄 말이 없다’는 식의 시건방을 그는 떤 적이 없다. 그가 가져다 쓴 어떤 고유명사나 인용이 어째서 이 자리에 나타났는가, 그 필연성에 대해 ‘사정을 모르는 이’에게 설명하는 노고를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를 필자는 ‘친절’이라고 부른다.
그가 쓴 글은 본질적으로 ‘설명’이었다. ‘나는 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보통 사람들>이 쓰는 말투를 쓰지 않지만, 거기에는 개인적인 경위나 이유가 있어서, 여러분은 그것을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게 오다지마 씨의 스탠스였다. 그가 가진 눈에 띄는 개성은 ‘그것을 여러분은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부분에 있다.
보통 자기 자신을 ‘이단자’, ‘소수파’로 자임하는 작가는, 다수파를 향해 설명한다든가, 설득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 다수파들의 지성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외한이 들으면 어떤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식의 수수께끼같은 연기를 매력 포인트로 하여 언론 시장에서의 자신의 니치를 확보하려 든다. 확실히, 이는 처세술로써는 유효한 방법이다. 하지만, 오다지마 씨는 그러한 ‘젠체하는’ 저술 방식을 무척 싫어했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오다지마 씨는 자신이 이단이자 소수파인 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소수성은,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여름방학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놀고 있다가, 가을이 되자 주위 친구들이 일제히 수험 모드로 전환해버렸는데, 그것도 모른 채, 학생복을 멀쑥하게 차려입은 동급생들 사이에서 혼자만 알로하 셔츠에 반바지, 슬리퍼 차림으로 뒤처진 고등학생’의 고립에 가깝다.
오다지마 씨가 하시모토 오사무의 <혁명적 반바지주의 선언>을 높이 평가한 것은 그가 쓴 에세이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필자와 히라카와 군이 그가 세상을 떠나기 열흘 전에 문병 차 방문했을 때, 병상에서 상반신을 일으키고서, 오다지마 씨는 언어와 문학에 대해, 최후의 힘을 쥐어짜듯 열띠게 들려주었다. 그때 오다지마 씨가 최후로 언급한 작가는 하시모토 오사무인데, 저서는 <혁명적 반바지주의 선언>이었다. 사실 필자는 오다지마 씨가 그렇게까지 하시모토 오사무에 대한 애착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그 책에서 얻은 감동에 대해, 2011년 6월에 이렇게 썼다.
“필자는 이 책을 20대 즈음에 읽었다. 저자는 하시모토 오사무. 초판 발행 연도는 1984년. 1991년에는 문고판이 나왔지만, 모두 이미 절판되어 있다. 인터넷 서점을 찾아보면, 출판사에도 재고가 없다. 명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수중에 실물이 없으므로 자세한 사항은 분명하지 않지만, 필자가 기억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 책은, ‘일본의 남자들은 어째서 정장을 입는가’ 라는 점에 대해 한 책 분량을 모조리 써서 고찰한, 터무니없는 서책이다. 아래에 요약한다.
1. 일본의 사무실에서는 ‘잘 참는 남자가 훌륭하다’ 는 평가를 받는다.
2. 열대 몬순 기후로 인해 찌는 더위의 여름을 가진 이 나라의 남자들이, 직장의 평상복으로 홋카이도보다 위도가 높은 나라의 정장인 서양식 저고리를 선택한 것은, ‘인내’가 사회 참가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취지를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참을 수 있는 사람은 어른, 반바지로 시원한 차림을 하고 있는 놈은 애, 라는 식인데, 우리나라 사회는 그러한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다.
4. 그래서 일본의 어른들은 헛된 인내를 한다. 게다가 그 헛된 인내를 숭고한 달성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저 견디기 힘든 더위임에도 불구하고.
5. 사실 이 ‘인내’의 문화는, 먼 옛날 무사 시대로부터 연면히 이어지고 있는 사회적인 전통이기도 하거니와, 민족적인 집착이기도 하다. 벼슬하는 사무라이는 아무 쓸모도 없는, 무겁고 거치적거리기만 하는 일본도라는, 형해화된 무기 모양의 공예품을, 큰 것 작은 것 두 자루, 허리에 차고서 출사(出仕)하는 것을 ‘무사의 예법’으로 했다. 이 무슨 사대주의인가. 이 무슨 헛된 인내인가.
6. 이상의 상황 아래에서, 반바지 차림을 즐기고 있는 어른은 공식적인 비즈니스 사회에 참가할 수 없다. 죽도를 찬 무사가 관청 안에서 경멸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유능함’이란, ‘무리에서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주위에 동조하는 능력 = 돌출하지 않는 능력’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기억한 대로 재구성한 요약본임으로, 세부 사항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야기의 순서가 다를 가능성이 있다. 근데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하시모토 씨의 견해에 반발을 품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극론이라든가 말이다. 자학사관이다든가 말이다. 결국 외부인의 편견이라든가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얼마나 멋진 착안인가. 경의를 표하고 싶어질 정도다. 에에.
(* 자학 사관: 2차 대전에서 진 탓에 민족적 자긍심을 잃었다는 비판적 시각에서 나온 용어 - 옮긴이)
(…)
<혁명적 반바지주의 선언>의 최종적인 결론은,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반바지 차림으로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인간만이 진짜배기 인간’ 이라는 취지를 선언하는 데 있다.”
요약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서라도, 오다지마 다카시가 하시모토 오사무로부터 무엇을 이어받았는지는 인용 내용만으로도 명백하다고 본다. 그는 ‘반바지 차림으로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오다지마 다카시 한 사람만이, 교복 차림의 고등학생들 가운데 (비유적 의미로) ‘반바지 차림’이었던 원체험(原體驗)적 사실이 있었다고 본다. 그때의 고립감과, ‘하지만 나는 절대 반바지를 벗지 않을 테다’ 하는 결심의 똑부러짐은 필자도 잘 안다. 정말 잘 안다.
그래서 그의 이단성과 고립은 ‘반바지를 입은 소년’이, 음울하게 교복이나 정장을 입고 미간을 찌푸리며 ‘참고 있는’ 왕년의 동급생들을 향해, ‘니네들 뭐 하고 있는 거냐?’ 하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그가 이 세상의 부조리나 시스템, 난센스적인 룰에 대해 쓸 적에, 그것은 왕년의 동급생들을 향해 '그 옷, 고통스럽지 않냐?' 하고 신경써 주는 것과 비슷하다. 비웃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매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들이 걸치고 있는 것의 거짓부렁이나 숨막힘의 이유를 들려주면서, ‘그런 건 벗고, 일로 와’ 하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가 쓴 글은 예리한 비평성과 친절심이 동거하고 있는 요상한 맛이 나게 되었다. 이 ‘오픈 마인디드한 소수파’라는 뼈대를, 오다지마 씨는 하시모토 오사무로부터 아마 이어받은 것이라고 필자는 본다.
그의 오의를 이어받는 작가가 앞으로 등장할지 어떨지는 모른다. 하지만, 오다지마 다카시의 작업은 일본 문학사(史) 가운데 한 줄기 유파로써 승계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오다지마 씨, 오랫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2023-01-01 18:23)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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