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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스가 다케히코 <우울한 정신과 의사, 점술에 의지하다> 해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1. 22. 18:45

    카스가 선생이 이렇게 깊은 걱정을 품고 있는 분인지는 몰랐다. 항상 밝게 웃는 ‘명랑한 사람’ 인 줄로만 알았다. 십수년 전에 처음으로 대담을 하고 나서 이제까지 카스가 선생과 만났던 모든 장면을 떠올려 봐도, 웃는 얼굴밖에는 기억에 없다. 사람이란 알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카스가 선생은 이렇게까지 염려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과 의사로서 프로의 일을 수행하고 있고, 몇 권의 저작을 발표했으며, 필자의 친구인 히라카와 카츠미 군에 의하면 ‘걸출한 현대 시인’ 이기도 하다. 범인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단한 사람도 “불안감이나 부전감(不全感), 방황ー그렇게 칠흑같으면서도 불투명한 것”이 마음 속에 펼쳐지게 되면 ‘견디기 힘든 기분’이 되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되는 것인가, 솔직히, 필자로서는 잘 모르겠다.

     

    ‘아니, 카스가 선생의 기분을 잘 알겠다’는 독자도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서 ‘나와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은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라 본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아래에 쓴 필자의 ‘해설’은 불필요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의, 아는 체하는 ’해설’ 같은 걸 필자는 읽지 않는다.

     

    아래의 해설(스러운 것)을 필자는 카스가 선생이 읽어주기를 바라며 쓴다.

     

    어째서 카스가 선생은 ‘견디기 힘든 기분’에 사로잡히고, 필자는 사로잡히지 않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것을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말로 표현하고 싶다. 해설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어째서 필자는 견디기 힘든 기분이 들지 않는가’에 대해 쓰는데, 카스가 선생이 필자의 ‘증상’에 대해 진단을 내려주기를 바란다.

     

    물론 필자도 육체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컨디션이 계속 나빠지거나 남에게 매도를 당하면, 어두운 기분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길게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을 정도로 ‘어두운 기분’이 악화된 것은 이제까지 두 번밖에 없다. 점술가에게 찾아가서 ‘무언가 악령이 쓰이지는 않았습니까?’ 하고 매달린 적은 한 번밖에 없다.

     

    모두 그렇게까지 심각한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정신과 의사는 ‘일을 쉬십시오’하고 말하며 수면제와 항우울제를 처방했다. 점술가는 ‘당신에게는 강력한 배후 영이 붙어있으므로 걱정 마십시오’라고 보증받았다. 그렇게 해서 나았다.

     

    필자의 가설은, 그것이 인간의 ‘깊음’과 상관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필자가 ‘견디기 힘든 기분’으로부터 면제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필자의 ‘인간으로서의 얕은 깊이’의 효과일 것이다. 그것에 대해 조금 자기 분석을 해볼까 한다.

     

     

    필자는 깊이가 얕은 인간이다. 적잖은 사람이 필자의 인간됨이나 작품을 평하기를 ‘이해하기 쉽지만, 깊이가 얕다’고 평가절하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에 대해 필자는 반론하지 않는다. 그 지적이 맞다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상당히 오래 전 일인데, 대학 시절에 반 친구로부터 절절한 한숨이 섞인 ‘우치다는 정말 왜 저러고 사는지 모르겠어’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말한 이는 온후하고, 여간한 일로는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 친구였다. 그는 100퍼센트 정직하게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말한 것이다. 필자가 쇼크를 받은 것은, 그때 그의 평언(評言)에 ‘연민’의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었던 점이다.

     

    필자는 자신이 ‘싫은 놈’이었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십대가 끝날 무렵부터, 일부러 그렇게 처신해 왔으니 당연하다. 학과에서는 ‘반(反) 우치다 그룹’이란 게 조직되어서, 정기적으로 모여 필자의 험담이 비등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치다는 정말 왜 저러고 사는지 모르겠어’ 하고 중얼거리던 그의 표정에 나타난 필자의 초상은, 바깥에서 봐도 ‘싫은 놈’, 속을 봐도 ‘싫은 놈’이고, 또한 그의 태도에서는 여백이라든가 서정, 깊이나 정취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이, ‘반들반들하게 싫은 놈’을 마주했을 때의 연민(을 통한 그 이상의 슬픔)의 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뭔가 이대로 수를 쓰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뒤 조금이나마 자기 도야를 하기 위해 무도 도장에 다니게 되었다.

     

    다행히도 대단히 훌륭한 스승을 만날 수 있었으므로, 열심히 수련에 매진했다. 그렇게 반 세기에 걸쳐 수련을 계속해, 정신이 들고 보니 무도의 전문가가 되어서, 도장에서 제자를 가르치게 되었다.

     

    이러한 ‘반성, 그리고 곧장 자기도야 시작’이라는 습속이 아무래도 인간으로서의 ‘얕음’을 표징하는 것 같다. 친구가 연민의 눈으로 쳐다보는 경험을 하면, 보통은 자포자기하여 폭음한다든가, 정처 없는 여행을 떠난다든가 하는 자기 파괴적인 우회를 할 것이나, 필자는 그러지는 않았다. ‘싫은 놈이다’라는 말을 듣고서, 반성하고, ‘참된 인간’이 되고자 하였다. 방황이나 갈등같은 ‘응어리’가 없다.

     

    그로부터 10년 정도 지났을 무렵 합기도 동료가 어느날, 분노 섞인 목소리로 ‘우치다 씨는, 자신의 비천한 부분, 추악한 부분을 어째서 숨기는 겁니까’ 하고 힐문한 적이 있다. ‘전부 드러내면 되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그러니까요’ 하고 몰아세웠다. ‘위선자’라는 말까지 들었다.

     

    필자는 딱히 새삼스레 착한 사람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싫은 놈’의 처지로부터 탈출하려는 수행을 하고 있는 탓에, 폭력성, 공격성이나 질투, 증오 등 네거티브한 감정을 될 수 있는 한 분출시키지 않으려고 마음을 쓰고 있다. 옛날 식으로 표현하면 ‘신사 될지니’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선자’라고 하면 면목이 없다.

     

    하지만 필자를 나무란 그들에게는 ‘신사가 되리라’ 하고 자기 형성의 노력을 하는 인간이란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그들의 눈에는 ‘인간이 아닌 것’을 보고 있는 생리적 혐오에 가까운 것이 있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종류의 ‘얕음’이나 ‘부박함’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해했다.

     

    인간의 질이 상당히 다르기는 하지만, 필자와 카스가 선생은 자라난 조건이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허약 아동이었다는 점이다. 카스가 선생은 천식이었는데, 필자는 6살 때에 류마티스성 심장질환을 앓아 판막증이 되었고,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중학생까지는 격한 운동을 금지당했다. 그래서 운동회에도 나가지 못했고, 물론 철봉 거꾸로 오르기도 할 수 없다*.

    (* 逆上がり: 일본 초등학교의 필수 지도 항목중 하나로 체계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 옮긴이)

     

    그러한 인간이, 자기도야를 위해서라곤 하지만, 느닷없이 무도 도장에 입문했던 것이다. 제정신이 아니다. 망설임이나 갈등을 거치지 않고서 직각적으로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게 가능한 성격은, 카스가 선생이었다면 정신적 병리라고 진단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는 인격 장애의 분류가 몇 가지 소개되어 있는데, 필자는 ‘경조부박’이라는 문자열에 강하게 반응했다.

     

    또 한 가지 카스가 선생과 필자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사자 없는 산에 토끼가 왕 노릇’한다는 점이다. 필자에게는 ‘이게 제 전문입니다’ 하는 분야가 없다. 문학을 논하고, 철학을 논하고, 정치를 논하고, 교육을 논하고, 무도를 논하고, 전통 예능을 논해왔지만, 전문가가 되기 위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분야는 문학연구와 문학 뿐, 그 이외의 영역에서는, 그 자리에서 떠오른 것을 떠들 따름이다. 그래서 어느 분야든지 ‘오직 한 우물’만 파 온 전문가들은 필자를 미워한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흥미가 솟으면, 그에 대해 맹렬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길 가는 사람의 소매를 붙잡고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하고 간청하게 된다. 지적 절도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병이다. 아마 필자는 카스가 선생과 ‘똑같은 병’을 앓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둘 다 모두 거기에 곤혹스러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필자는 자기 자신을 상당히 ‘병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경조 부박’이라는 자기 방어의 ‘감옥’같은 것을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서 거기에 안거하고 있다. 건전한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하지만 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분명 필자에게 어떤 종류의 병적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카스가 선생을 짓누르고 있는 만성적인 ‘견디기 힘든 기분’을 맛보지 않게끔 한다는 데에 있다.

     

    필자는 어느 시기부터 자신을 ‘경조 부박한 인간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기로 했다. 만약 지금 ‘우치다 씨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내적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경조 부박한 인간인 점’이라고 답한다. 솔직한 대답이다. 필자가 부박한 인간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부박한 인간’에 대해서는 누구도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부박한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없다. 참으로 그러한 질문을 면제받은 인간이 ‘부박한 인간’이라고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꽤 많은 공을 들여서까지 스스로 병을 앓는 것이다. 

     

    카스가 선생은 자신을 ‘경계성 인격장애와 정상인이 접하는 곳에 위치해 있는 인간’이라고 자기 진단을 내렸다. 필자도 무언가 장애와 정상인의 ‘기수역’을 떠돌아다니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카스가 선생과 만나고 싶어졌다. 선생이 필자를 어떠한 광기로 분류해 줄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이대로 괜찮은지, 아니면 뭔가 치료를 필요로 하는지, 그것을 가르쳐 주었으면 한다. (2022년 6월 15일)

     

    후기: 이렇게 써놓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카스가 선생과 함께 히라카와 군과 ‘어째서 사람은 글을 쓰는가’를 테마로 해서 좌담을 할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다. 두 사람의 문학적 갈등의 깊음을 듣고서, 다시금 자기 자신이 한 번도 ‘문학 소년’이나 ‘문학 청년’이 아니었던 것, 시인이나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던 것, 시인이나 작가를 동경하거나 질투한 적 없는 ‘저자’였다는 점을 배울 수 있었다. 역시 필자는 병이 들었다고 본다.

     

     

    (2022-12-29 13:3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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