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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 밀의 <자유론>에 관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2. 5. 21:16
주간지 ‘도요 경제’가 고전의 재평가라는 특집을 기획했다. 책을 추천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기에, 밀의 <자유론>을 골랐다.
J.S. 밀 <자유론> (아래 인용은 사이토 요시노리 옮김, 고분샤 고텐신야쿠 문고 펴냄에 의함)
[본문 속에서]
“인민의 의지라는 것은, 실제로는 인민 가운데 보다 다수를 차지하는 부분의 의지, 혹은 보다 활동적인 부분의 의지를 의미한다. 다수파란, 자신들이 다수파라고 공인받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런 연고로, 인민은 인민의 일부를 억압하고 싶다고 바랄 지도 모르는 탓에, 그에 대한 경계가, 다른 여러가지 권력 남용에 대한 경계와 똑같은 정도로, 분명히 필요한 것이다.” (18쪽, 강조는 밀)
“인간이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의 진짜 값어치는, 판단을 그르쳤을 때 그것을 고칠 수 있다는 점 한 가지에 있으므로, 어떤 판단을 신뢰할 수 있는 경우는, 오류를 수정할 수단을 자신이 항상 간수하고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53쪽)
“사람의 의견은, 그 의견을 정말로 믿고 있는 사람에게 직접 들어봐야만 한다. 본인이 그 의견을 믿고 있다면, 그것을 열심을 다해 말할 것이고, 될 수 있으면 남들이 이해해줄 수 있도록 있는 힘껏 노력할 것이다.” (91쪽)
“사람은 의심을 거두게 된 사물에 대해서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기 십상이다. 그것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성향이기도 하거니와, 인간이 저지르는 과오의 절반 정도는 그것이 원인이다.” (106쪽)
“보통, 대립하고 있는 의견은, 한 쪽이 옳고 다른 쪽은 틀렸다기보다는, 둘 다 옳은 구석이 있다. 상식적인 의견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는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에, 상식에 반대되는 의견도 진리의 나머지 부분을 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112쪽)
“부분적인 진리끼리의 격한 충돌,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진리의 반쪽 나머지가 소리도 없이 조용히 억압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두려워해 마땅할 해악인 것이다.” (127쪽)
“어떠한 주제든지, 일반에 유포되어 있는 의견이 진리의 전체인 경우는, 좀체, 아니 결코 없는 법이니, 진리의 나머지 부분은, 다른 의견들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에만 그것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128쪽)
“우리가 논쟁할 때 범할지도 모르는 죄 가운데 최악의 것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부도덕한 악인으로 단정해버리는 것이다.” (132쪽)
“논쟁에서 어떤 편에 서 있는 사람이든, 만약 그의 주장의 방식에 공평함이 결여되어 있으며, 악의나 편견, 속좁음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난받아야 한다. 다만, 그 사람이 우리와 반대 입장에 있는 경우, 그의 그러한 결함을 그 입장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소개]
<자유론>은 영국의 철학자,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1859년 저작이다. 미합중국의 건국에 따라 서구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시민적 자유와 사회적 통제 사이에 모순이 발생한다. 시민의 자유는 어떠한 기준에서, 어디까지 억제되는 것이 용납되는가’ 라는 이제까지 (왕정이나 제정 사회에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난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유론>은 그 난문에 대한 원리적인 고찰이다. 유감스럽지만 밀이 이 책을 쓴 지 150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아직 이 난문에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해설]
<자유론>은 이름만큼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다지 읽힌 적이 없는 고전이다. 이 책은 메이지 5년(1872년 - 옮긴이)에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자유지리(自由之理)> 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 밀이 생존해 있을 때이므로, 대단히 이른 시기에 소개된 셈이 된다.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이 책을 일본 근대화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서 골랐다. 하지만 그 포부가 무색하게도, 밀이 언급하고 있는 성숙한 정치적 지견은 결국 일본의 정치 풍토에 정착하지 못했다. 만약 정착만 되었더라면 근대 일본의 정치사는 비교적 평탄했을지도 모르고, 2차 세계 대전 때 패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에 쓰여져 있는 내용은 근대 일본인에게 있어서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밀이 설파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당연한 것’이다. 단, ‘성숙한 어른에게 있어서’ 라는 한정 조건이 붙는다.
서구의 사상가에는 ‘과격한 사람’과 ‘온후한 사람’이 있다. 과격과 온후를 나누는 것은 기질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사람이 택하고 있는 전제의 차이다. ‘과격한 사상가’는 ‘이 세상은 (나같은) 똑똑한 인간과, 압도적 다수의 무지한 자로 양분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온후한 사상가’는 ‘세상 사람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나름대로 똑똑하고, 누구나 나름대로 우둔하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과격한 사상가’는 대체로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대단히 좋으므로, ‘어떻게 하면 똑똑해질 수 있는가’ 라는 실리적인 물음을 자신에게 던진 적이 없다. 그에 비해, ‘온후한 사상가’는 자신의 뇌가 원활하게 기능할 때와, 약간 잘 안 돌아가는 경우 사이의 차이에 대해 자각적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내 머리는 잘 기능하는가’에 대해 젊은 시절부터 진지하게 궁구하고 있다. 그리고, 대개 ‘온후한 사상가’들이 그러한 역정을 거쳐 내리는 실천적 결론은 ‘심플한 해답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갈등 가운데 갈팡질팡하는 것이 지성의 활성화에 있어서 가장 유효한 방법’ 이라는 지견에 이른다.
밀은 부친으로부터 일종의 천재교육을 받았다. 부친 자신은 정통적이고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았지만, 아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어떻게 하면 인간의 지성은 그 능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자식을 통해 실험해본 것이 아닐까. 실험은 성공했고, 그로부터 밀은 몇 가지 경험칙을 습득했다. (이런 소개 방식을 취하는 사람이 필자 말고는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유론>은 밀이 ‘어째서 나는 똑똑해졌는가’라는 경험칙을 공개한 책이다.
따라서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공리주의자는 자유라는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라는 ‘학적(學的)’ 관심으로 손에 든 경우에 얻을 수 있는 지견은, 세계사 교과서에 쓰여져 있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인간의 지성은 그 능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가?’ 라는 자신의 리얼한 관심에 의해 손에 든 경우에는, 그로부터 길어올릴 수 있는 지견이 상당히 다를 것이라고 본다.
나카무라 나오마사가 이 책을 일본 근대화에 있어 필수적인 문헌이라고 간주한 것은, 일독하고 나서 그러한 까닭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메이지 5년으로 말할라치면, 그 전해부터 키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의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이 정부 수뇌의 과반을 수반하여 구미(歐美) 시찰단으로 나갔다 온 바로 그 시점이다. 당연히, 이 <자유론> 또한 서구의 첨단적 학지(學知)를 채용하기 위해 읽혔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쓰여져 있는 바와 같은 영미의 민주주의 사회가 조우한 난문은, 메이지 시대 일본에 있어서는 조금도 긴급성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은 애초에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었고, 민주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도 없었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아마 이 책을 ‘정치 체제와 상관 없이, 사람이 집단적으로 살아가는 경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술지(技術知)’를 얻기 위한 서책으로서 메이지 시대 일본인에게 선보인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 시대의 일본은 단기간에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국가가 될 필요가 있었다. 허나, 국가 유위(有爲)의 인재를 기르기 위한 수단으로서 수중에 갖고 있던 것은 유학(儒學)이나 불교, 무사도 정도밖에는 없었다.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자는 모조리 악이다(그래서 죽여버린다)’ 라는 미토학(水戶學)적 단순주의를 ‘성공 체험’으로서 내면화한 사람들에게 정치를 맡겨서는 근대 국가의 건설은 불완전해진다. 근대화에 필요한 것은 반대자를 가차없이 논파해 침묵케 하는 타입의 공격적인 지성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퍼포먼스를 최대화하도록 하는 견실한 지적 기술(技術)이다. 그것에 대해 나카무라는 아마 이해하고 있는 구석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지견은 근대 일본에 정착하여 개화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사람은 언제든지 성숙한 어른이 되고자 한다면 될 수 있다.
[참고문헌]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이와나미 문고)
해밀턴, 매디슨, 제이 <더 페더럴리스트> (이와나미 문고)
오르테가 이 가세트 <대중의 반역> (이와나미 문고)
모두 근대 시민 사회에 있어서의 <정치적 성숙>이란 무엇인가를 중심적 논건으로 한 저작이다. 정치에 대해 ‘어른’들이 말을 하면 이런 글이 나오는구나 하는 ‘문장의 모범’으로서 읽어주셨으면 한다.
(2023-01-01 18:3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옮긴이 주석
<자유론>의 국역본(서병훈 역, 책세상 간, 2판) 일부도 함께 수록합니다.
… 항상 오역이 두렵습니다. 중역은 항상 콤플렉스입니다.
부디 아래 인용도 꼭 참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더보기“게다가 인민의 의지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또는 인민들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일부 사람들, 다시 말해 다수파 또는 자신을 다수파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사람들의 의지를 뜻한다. 따라서 인민이 자신들 가운데 일부를 억누르고 싶은 욕망을 가질 수도 있으므로 다른 권력 남용 못지않게 이에 대한 주의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내리는 판단의 힘과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잘못된 판단을 시정할 수단을 언제나 손쉽게 구할 수 있을때, 비로소 그 판단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실제 그런 생각을 하고 있고 온 힘을 다해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강조하는 내용 가운데 가장 그럴듯하고 가장 설득력 있는 부분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안이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면서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악습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의 절반은 그런 버릇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대립하는 두 주장 가운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으로 확연히 구분되기보다는, 각각 어느 정도씩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이럴 때 통설이 채우지 못하는 진리의 빈 곳을 채울 수 있도록 그 통설에 도전하는 이설(異說)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부분적인 진리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것보다 진리의 절반에 대해 소리 없이 억압하는 것이 사실은 더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모든 주장 속에 진리가 어느 정도는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대립하는 모든 주장에 대해 변론을 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 주장도 경청하도록 훈련되어야 진리에 이를 가능성이 커진다.”
“논쟁이 진행되면서 통설에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은 사악하고 비도덕적인 인물로 공격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최악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이 적절하지 못한 사람, 즉 눈에 띄게 솔직하지 못하거나 악의나 비방의 정도가 너무 심한 사람이나 타인의 감정에 관용적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이고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가차없이 비판을 가해야 한다. 그러나 비록 우리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되더라도 그에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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