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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인물사 월보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2. 8. 20:19

    강상중 씨가 편집에 관여하고 있는 <아시아 인물사> 라는 시리즈가 나오게 되어, 월보(月報)에 에세이를 부탁받았다.

     

     

    역사의 풍설을 견딘 것만이 살아남고, 역사의 도태압(淘汰押)을 견디지 못한 것은 사라져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러한 명제를 가볍게 수긍해도 좋은가. 필자는 다소 회의적이다.

     

    분명히 ‘개관 사정(盖棺事定)’이라는 고사의 의미라면 필자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얼마만큼의 인물이었는가, 그 사람의 사적(事績)이 얼마나 의의가 있는 것이었는가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확정되지 않는다. 죽은 뒤 나름대로의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진짜 모습을 알 수 없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죽은 뒤 상당한 시간이 흐르면, 그것은 그것대로 알 수가 없게 된다. 죽은 지 50년 정도까지라면 사료도 있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100년 정도 지나면, 문서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산 증인은 절멸한다. 1000년이나 지나면, 일상생활 가운데 그 사람의 이름이 입에 오르는 것은 상당히 예외적인 인물 이외에는 없게 된다.

     

    허나, 그걸로 된 것일까.

     

    역사의 도태압은 항상 옳고, 살아남을 만한 것은 반드시 살아남으며, 사라져야 할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 역사라는 심급(審級)은 틀리는 일 없이 살아남는 것과 사라지는 것을 판별한다는 신빙을 ‘역사주의’라고 편의상 부르기로 하자. ‘역사는 절대 정신의 현현 과정이다’ 라든가 ‘역사는 진리가 불가역적으로 전체화해가는 과정이다’ 라든가 ‘역사는 철의 법칙성에 관통되어 있다’ 라는 사고방식을 하는 사람들을 필자는 ‘역사주의자’라고 부른다. 필자가 멋대로 명명한 것뿐이므로, 딱히 일반성을 청구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이것 역시 개인의 감상이지만, 필자는 역사주의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다.

     

    ‘~의 시대는 끝났다’ 라든가 ‘앞으로는 ~의 시대다’라는 식의 광고대행사가 즐겨 쓰는 말투는 전형적으로 역사주의적인 것이다. 허나, The latest is the best ‘가장 새로운 것이 최고다’ 라는 말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존재할 필연성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은 존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는 타입의 단순한 ‘리얼리즘’과 ‘역사주의’는 동전의 양면에 각각 해당한다.

     

    역사주의는 정치적 스테이터스 쿠오를 정당화하고 싶은 사람들이나, 소비자의 욕망을 항진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매우 안성맞춤인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허나, 다시 한번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눈 앞에 지금 존재하는 것만이 ‘역사의 풍설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 ‘존재할 필연성이 있는 것’이며,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역사의 풍설에 의해 도태된 것’ 혹은 ‘존재할 필연성이 없는 것’ 같은 경우는 없다. 애초에 우리 눈 앞에 지금 존재하는 것의 상당 부분은 조금만 지나면 (경우에 따라서는 수개월 만에) ‘역사의 도태압에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 에 해당한다.

     

    그래서 조금 삐딱하게 말하면 역사가는 ‘역사라는 심급’의 판정력을 순순히 믿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딱히 필자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어쩌면 직업적인 역사가라는 것은 사실 ‘역사의 판정력’을 그다지 믿고 있지 않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역사의 판정력’을 정말로 믿고 있다면, 방치된 고문서를 섭렵한다든지, 누구도 찾지 않는 고적(古蹟)의 유래를 더듬어간다든지 하는 일을 하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할 것이 잊혀지고, 상찬받아야 할 공적이나 규탄받아야 할 악행을 구전해나가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역사가만큼 숙지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함은, 역사가의 본무는 오히려 ‘역사의 도태압’에 저항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가 한 사람 한 사람의 판단에 의해 ‘계속 전해내려가야 할 것’을 사료 가운데 발굴해내어, 오늘날 소생시키는 것이야말로 역사가의 작업이 아닐까.

     

     

    사마천의 ‘열전’ 제 1부는 백이숙제전이다. 백이숙제는 왕위를 물리치고 산 속에 은거하여, 주나라의 녹을 먹는 것을 거부하고 아사한 인자이다. 사마천은 어째서 백이숙제같은 덕자가 아사하고, 도척 같은 악인이 부귀와 천수를 누리는가, 그 부조리에 천착했다. ‘천도(天道)는 선인가 악인가.’ 그리고, 백이숙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남긴 것은 공자의 공적에 의한 것이라고 썼다. 인자 현인의 이름이 다행히 지금까지 기억되고, 기림받는 것은 공자의 사업(事業)이다. ‘천도’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사마천이 ‘열전’을 ‘천도는 누차 언페어하다’는 백이숙제의 일화부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마천은 현인이나 인자를 기억의 아카이브에 남기는 것은 하늘의 작업이 아니라, 인간의 작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역사가는 ‘내가 여기에 써서 남겨두지 않으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사라질지도 모르는 사람’을 가려 뽑아 그 ‘열전’을 남긴다. 사마천은 ‘역사 그 자체’에 인물의 어짊을 판정하는 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의 사적을 써서 남기고, 누구의 덕성이나 예지를 칭할 것인가, 단죄할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 한 사람 한 사람의 견식이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역사가의 자세로서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세계에는 현재 어느 나라를 가든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용약 발호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의 도태압’이 사실은 그다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진실을 부정하는 것도, 꾸며낸 이야기를 정사(正史)에 기재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다. 역사 자체에는 반드시 진실을 그 올바른 지위에 올리고, 허위를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던질 만한 힘은 없다. 이 작업에 대해, 우리는 ‘천도’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그 책무를 다하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역사가인 것이다.

     

    이 <아시아 인물사>의 기도(企圖)는 사마천의 ‘열전’의 그것과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읽은 범위 내에서는, 집필자들이 그 사적을 상세히 말해준 인물의 대부분을 필자는 몰랐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가 모르고 있는 인물’의 사적을 말하고, 집단적 기억에 새겨넣어두는 것이야말로 역사가의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2022년 5월 18일)

     

     

    (2023-01-01 18:4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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