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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직전 (이 가장 어둡기 마련) > 에필로그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12. 31. 11:21
여러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고서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저는 교정지를 통독해보니 ‘비관적인 이야기가 많지만, 그렇게까지 마음이 어두워지지도 않는다’는 인상을 가졌습니다. 자신이 쓴 글을 갖다가 ‘인상을 가졌습니다’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것도 좀 뭣합니다만.
일본의 현상이 상당히 비참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 경제력, 문화력 모두 낮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어떠한 지표를 살펴보더라도 명백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시스템의 전면적인 괴사(壞死)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백주 대낮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상당히 비참한 상황입니다만, 그 이면에서는 새로운 활동이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역사는 ‘다음 단계’에 돌입해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수 훤한 양반들(굳이 표현하자면 ‘사회 지도층’이겠지요)은, 그러한 조류 변화를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느꼈던 건 얼마 전에 지인의 결혼식 피로연에 초청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지인의 결혼 상대는 빵을 만드는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그러한 연고로 제가 앉은 테이블에는 신부 측의 ‘빵을 가르쳐 준 스승’과, 그 밑에서 배웠던 젊은 동기 빵 기능사들이 동석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모두 같은 스승에게서 수업을 받은 후 해외에서 연수를 거듭하며, 일본으로 돌아와 각지에서 빵집을 개업한 분들입니다. 자세한 기술적 사항을 제가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본의 빵은 세계 일류거든요’ 라고 단언할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지금 프랑스 빵 기능장들이 필사적으로 궁구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들이 이미 10년 전에 하던 것들입니다. 일본 빵은 10년 앞서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서는 활짝 웃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타입의 언명(言明)을 듣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분명히, ‘우리들이 세계 일류다’ 라고 마치 ‘오늘 날씨가 좋네’ 정도의 캐주얼한 어조로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종합 상사, 제조업, 언론, 학계, 엔터테인먼트 모두 ‘정신이 들고 보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세계 표준이 된 것 같은데’ 하는 얘기가 곧잘 귀에 들려왔습니다. 확실히 그렇지 않고서야 세계 제 2차대전 패전 이래 단기간에 세계 제 2위의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애잔한 이야기입니다만, 그런 말들이 쑥 들어가고 난지 30년이 흘렀습니다. 따라서 현재 40세 이하 연령대는 ‘일본인이 각종 분야에서 세계를 리드했던 시절’을 리얼하게 상상할 수 없을 거라고 봅니다. 이런 얘기를 기성세대가 해봤자 젊은이들이 ‘노욕’으로밖에는 여기지 않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국운이라는 것은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고희(古稀)를 지나서까지 오래 살아 보니 이를 절절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패전하고 나서 5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해 대단히 가난해진 나라의 국민’이란 게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자기 인식의 초기설정이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모친에게 무언가를 사달라고 조를 때 거의 반드시 ‘안 돼’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고 하니 ‘가난하니까’ 라고 어머니가 답했으며, ‘왜 가난한거야?’ 하니 ‘전쟁에서 졌으니까’라는 말이 나오고서, 그걸로 문답은 끝났습니다. 그런 상황이 196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뭔진 몰라도 ‘이대로만 하면 세계 표준 턱밑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낙관이 사회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타미 주조의 <유럽 굴욕 일기>는 1965년에 나온 책입니다. <북경의 55일>이나 <로드 짐>에 출연했던 국제적 배우가 바로 그 유럽에서의 생활을 쓴 에세이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패전국 소년들은 ‘재규어’의 운전 방법이나 ‘알 덴테’ 삶는 법, ‘루이비통’이라는 구두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것이 그렇게까지 머나먼 존재가 아니라, ‘조금만 더 가면 우리 손에 닿을 지도 모른다’ 라는 것으로써 이타미 씨가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몇 년 뒤 저는 아카사카의 파스타 집에서 ‘볼로네즈, 알 덴테로’ 라고 주문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 오타키 에이이치 씨와 야마시타 타츠로 씨가 NHK FM에서 진행한 ‘신슌 호담(新春放談)’의 옛날 녹음을 들었는데요(1985년 설날 방송이었습니다), 야마시타 씨가 ‘요즘 가요 업계는 뉴욕에서 녹음하지요. 음악적으로 필연성이 있다면 이해하겠지만, 단지 뉴욕에서 하는 게 스튜디오 비용이 저렴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뉴욕에 가서 외국인 엔지니어를 고용하는 게 ‘싸게 먹히는’ 시대가 35년 전쯤에는 있었던 것입니다.
1980년대가 끝날 무렵 거품경제 전성기에는, 일본인이 돈을 너무 많이 가진 나머지 더 이상 살 게 없어져서, 마침내 맨해튼의 마천루, 헐리우드 영화사, 프랑스의 성채, 이탈리아의 와이너리까지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쓸데 없는 탕진을 하면 머지않아 벌을 받겠거니’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만, 역시 예상대로였습니다. 우쭐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벌을 받게 된 지 30년, 일본은 저출생 고령화라는 인구 추세상의 부하도 가중되어, ‘한물 간 나라’가 되었습니다.
현재 일본의 지도층 분들은 유감스럽게도 ‘한물 간 나라에 최적화되어, 가난에 익숙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더이상 일본을 다시 한 번 어떻게 살려보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이제 일본에 장래성은 없지만, 공공 자원은 아직 충분히 넉넉합니다. 그래서 공권력을 사적 목적으로 운용하고, 공공재를 사재로 바꿔치기하는 동안에는, 당분간 ‘짭짤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들만으로 현재 경제계와 언론계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난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란 ‘일본이 가난해짐으로써 실제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현상이 크게 바뀌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대로 일본이 점점 가난해지고, 국민이 어둡고 무력해지며, 새로운 일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사회이기를 개인적으로 바라는 사람들이 지금 일본의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한물 간 나라’라는 환경에 최적화되어 ‘가난함’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로서는, 한정되어 있는 자원을 필사적으로 절취하려고 하므로, 노략질에 참가하려는 인간이 될 수 있는 한 적을 수록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한물 간 나라의 엘리트들’은 차츰 자신들의 머릿수를 줄여나갑니다. 그리고 ‘한물 간 나라의 하층민’ 신분으로 전락한 다수파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조금이나마 자랑스런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강하게 바라는 일은 현실이 됩니다. 이는 살 만큼 산 제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많은’과 ‘강함’이라는 부사의 레벨에 있습니다.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인 것입니다.
왕년에 패전의 쑥대밭에서 시작한 것처럼, 손에 가지고 있는 사소한 자원을 재활용하여, 다시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야말로 의심 없이 세계 최첨단이야’ 라는 대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서 나오는 시대를 맞이하고 싶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AI, 신약, 우주 개발같이 ‘돈이 왕창 들고, 대박이 나면 돈을 버는’ 영역에는 무리겠지만, 식문화, 엔터테인먼트, 예술, 학문같이 일본에 충분히 축적되어 있는 동시에,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데 있어 거액의 초기 투자나 ‘우수 자원 선별’ 등이 필요하지 않는 분야라면, 이미 자부심 넘치는 발언이 가벼이 나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일본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기성 언론이 ‘가난에 익숙’해져서, 그 본래 의미로서의 ‘NEWs’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졌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한 미래를 향한 기대를 담아, 이 책의 제목을 정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강하게 바라’주시길 바랄게요.
2022년 12월
우치다 타츠루
(2022-12-09 09:13)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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