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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대라는 것에 관해: 모테 나시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12. 20. 21:42

    다도에 대해 한 마디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필자는 다도에 관해서는 참으로 깜깜한 처지에 있으므로, 차에 대해 갖고 있는 특단의 지견이 없다. 그 대신에 ‘모테나시’에 대한 사견을 쓰고자 한다.

     

    ‘모테나시もてなし’의 기본은 상대방에 따라 응대의 내용을 바꾸지 않는 것이다. 환대의 본의 또한, 아마 그것이 전부일 것이다. 상대의 겉모습을 보고서 일단 환대해 두면 자신에게 이익이 있으리라고 보는 상대에게는 예를 다하면서, 꾀죄죄한 상대에게는 차를 내지 않는 사람은 ‘환대’라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환대의 가장 이해하기 쉬운 모습은, 황야를 터벅터벅 걷다 온 이방인이 물 한잔을 요청할 때, 장막의 주인이 활짝 웃는 얼굴로 받아들이며,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는 데에 있다. 유목민들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절대적인 법칙이다. 당연한 일이다. 황야를 돌아다니는 자인 이상, 장막 주인인 자기 자신도, 다른 지방을 떠돌며 굶주림과 목마름에 신음하고 있을 때, 낯선 장막의 불빛을 향해 걷는 처지가 될 가능성이 높은 확률로 있다. 그때 주인이 박애주의적인 사람이면 환대를 받아 연명하고, 협량한 사람이면 닫힌 문을 뒤로한 채 궁사(窮死)하는 일이 있어서는 난감하다. 자기 자신이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유목민들은 언제 어떠한 경우에도 ‘이방인을 환대해야 한다’를 일반적인 규칙으로 정해놓은 것이다. 유대교나 그리스도교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런 절실한 집단적 경험이 뒷받침되어 있다.

     

    동일한 규칙이 의료 세계에도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의 의성(醫聖) 히포크라테스는 의료인들이 직업적으로 자립할 때, 그들에게 ‘상대가 자유인이든 노예이든 진료 내용을 바꾸지 말 것’을 선서하게 했다. 의료 행위는 상품이나 서비스가 아니다. 그것은 요구하는 사람이 있는 한, 상대가 부자이든, 빈자이든, 권력자이든, 서민이든 대응을 바꾸지 않고 제공해야만 한다.

     

    히포크라테스가 그러한 선서를 요구한 것은, 물론 그가 활동했던 당대에도 ‘상대가 돈이 있으면 진료하지만 가난한 사람이면 진료하지 않겠다’는 의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때 ‘세상은 원래 그러한 법’ 이라며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이후 의학의 진보는 없었을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아마 그 사실을 통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양질의 의료를 베풂’이라는 불가능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후 2500년 간 의학은 저렴하고도 간단한 검사법이나 치료법을 찾아나섰고, 가난한 이도 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험 체계를 연구해 왔다. 실행하기 곤란한 ‘선서’의 문구가 이러한 노력에 동기를 부여하였다.

     

    ‘너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환대하라’는 태고적부터의 규칙이 우리들에게 실현하기를 요구하는 효과도 이 히포크라테스 선언과 유사하다. 가령 그것이 지금 여기서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끊임 없이 노력을 겨냥해야 하는 ‘무한 소실점’으로서 오랫동안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간단하거니와, 리얼리스틱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현 불가능한 목표’는 ‘실현 불가능하므로 목표가 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이성적인 말을 입에 담는 순간에, 그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진화’를 멈춰버리고 만 것이다. 불가능한 목표를 내걸고 조금씩이나마 계속 걸어나간 덕분에 인간은 긴 시간에 걸쳐 ‘보다 인간적인 존재’가 되어온 것이다.

     

    ‘모테나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은 맞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수준의 환대를 하며 응하는 것이다. 상대방에 따라 응대를 바꿔서는 안된다. 그래서 제공하는 것은 ‘변변찮은 차[粗茶]’여도 괜찮고, 오히려 변변찮은 차여야 하는 것이다. ‘차가 변변찮다’는 것은 ‘저는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그때그때 내는 차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는 선언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취지를 많은 현대인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외려 환대의 방식에 세밀한 등급 차이를 설정해 놓고, ‘당신은 예외적으로 높은 환대를 받고 있습니다’ 하는 말을 고하면, 내객(來客)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허나, 그것은 잘못된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저는 당신 본인이 아니라,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권력, 재화, 위신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잃게 된다면, 당신은 저로부터의 환대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라고 고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가 환대하고 있는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닙니다’ 하는 말을 듣고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지금 일본 사회에서는 다수파를 점하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일본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환대’의 본의를 잊어버리는 듯하다.

     

     

    (2022-11-24 08:46)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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