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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공언론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12. 8. 21:04
이번 호는 헌법 특집이므로, 헌법에 대한 사견을 쓴다. 똑같은 말을 여러 군데에다 썼으므로 ‘이미 아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헌법에 대해 필자처럼 말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는 것 같으므로, 이를 납득시키기 위해 끈질기게 말을 잇는다.
헌법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인 정의는 ‘헌법은 공언이다’라는 것이다. ‘공언인 것이 당연’하고, 좀 시비조로 말하면 ‘공언인데 뭐 어쩌라고’인 것이다.
여러가지 종류의 ‘선언’과 똑같이, 헌법도 공언이다. 다만, 그것은 ‘채워야 할 공백을 가시화시키기 위한 공언’, ‘방향성이 있는 공언’, ‘현실을 창출해내기 위한 공언’이다.
헌법과 눈 앞의 현실 사이에는 반드시 모순이 있다. 그것이 헌법의 본래 모습인 것이다. 헌법이란 것은 ‘쓰여져 있는 내용이 실현될 수 있도록 현실을 바꿔 나가기 위한’ 길잡이이지, 눈 앞의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현실에 맞게 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말은, 말하자면 ‘나는 시험을 몇 번이나 쳐도 60점밖에는 못 받으니, 앞으로는 60점을 만점으로 정하겠다’는 식의 열등생적 발언과 다름 없다. 이렇게 함으로써 학습에 들일 노력이 필요 없어졌으므로 당사자는 굉장히 마음이 편하겠지만, 틀림 없이 그의 학력은 이후 1밀리미터도 향상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의 개헌론자들의 지적 퍼포먼스가 그들이 ‘헌법을 현실에 꿰맞춰라’ 하는 주장을 한 이래로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계측해본다면 누구라도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개헌파는 ‘헌법 9조와 현실상 군사적 위협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따라서 군사적 위협이 항상 존재하는 세상을 표준으로 두고 헌법을 바꿔 쓰라’고 주장하고 있다. ‘군사적 위협이 없는 세상 따위는 현실화될 리가 없으므로, 그런 것을 목표로 해봤자 쓸모없다’는 말은, 분명히 하나의 견식이 될 수 있다. ‘평화를 유지하고, 전제와 예종, 압박과 편협을 지상으로부터 영원히 제거’하는 노력 따위 누구도 하지 않는 세상에서 일본 혼자만 착한 척을 하고 있다고 코웃음치는 사람을 보고서 ‘쿨하다’며 착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은 사악하고 우둔하기가 한량 없는 짐승이므로, 앞으로도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언명은 술주정같은 것으로 치부해도 상관없으나, 공문서에 쓰여서는 안된다. 그렇다 함은, 일단 그러한 인간관을 공인해버리면, 향후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보다 선량하고, 보다 현명한 인간이 될’ 자기 도야의 동기를 송두리째 빼앗겨버리기 때문이다.
내심 아무리 인간에 대해 절망하고 있어도, 표면상으로는 전 구성원이 선량하고 현명하며 정직한 사회임을 ‘목표’로 두고 제도 설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것만큼은 집단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양보할 수 없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전 구성원이 사악하고 우둔하며 거짓말쟁이인 사회여도 ‘살아갈 수 있게끔’ 제도설계하는 것은 확실히 현실적일지 모르겠지만, 그 제도가 잘 만들어져 있을수록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선량하고 현명하며 정직’하게 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구성원 전체가 사악하고 우둔하며 거짓말쟁이여도 기능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원리적으로 하나밖에 없다. ‘신이 모든 것을 제어하는 사회’이다. 신이 삼라만상을 조감하고, 구성원의 행동과 내면 구석구석까지 알아차리는 사회라면 전원 사악하고 우둔하며 거짓말쟁이여도 사회는 기능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신이 아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신의 대리자’를 맡은 권력자가 전 구성원을 ‘잠재적인 죄인’으로 간주하고, 그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다.
자민당의 개헌 초안을 읽어보면, 그들이 정말로 그렇게 추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모두 사악하고 우둔하며 거짓말쟁이라면, 전권을 가진 권력자가 전원을 감시할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국가관은 ‘헌법과 현실에 모순이 있을 때는 현실에 꿰맞춰 고쳐 써야 한다’는 헌법관과 참으로 동형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인 것이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인간의 사악함이나 취약함에 대한 ‘개선 불가’적 관점에서 짜여진 제도설계에는 반대한다. 어떠한 인간을 개량 가능한 ‘표준적인 인간’으로 볼 것인가 하는 관점의 선택에 따라 이후 출현할 사회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선언’은 정말로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사회의 모습을 가시화하는 것이 선언의 역할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은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다.
프랑스 인권 선언, 미국 독립 선언, 초현실주의 선언, 다다 선언, 미래파 선언 모두 기초 당시에는 거의 현실적이지 않은 것이 쓰여져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기초자의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하는 강력한 희망이 담겨져 있다. ‘그 강력한 희망’이 부정형적인 미래에 조금이나마 윤곽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 독립선언문에는 ‘만인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다’고 쓰여져 있다. 허나, 그 ‘선언’ 이래로 노예 제도는 86년 간 이어졌고, ‘공민권법’이 시행되기까지는 188년이 소요되었으며, 이번 BLM 운동은 이 선언이 ‘공언’이었음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인은 나면서부터 평등하지 않다’는 독립 시점에서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선언문을 써넣었다면, 미합중국은 지금과 같은 나라가 되어 있지 않았으리라. 미합중국이 조금이나마 차별이 없는 나라로 바뀌어 나간 데에는 이 ‘선언’의 힘이 작용했다. ‘공언에는 방향성이 있다’는 점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국 헌법 제 9조 2항(군대 미보유를 이름 - 옮긴이)과 자위대의 존재 사이의 모순에 관해 우리나라의 개헌파는 곧잘 ‘이러한 비현실적인 조문을 가진 헌법은 일본국 헌법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단적으로 거짓이다. 미합중국 헌법도 또한 조문과 현실 사이에 치명적인 괴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연방 의회의 권한을 규정한 합중국 헌법 8조 12항에는 ‘육군을 소집하고, 유지할 것. 단, 이 목적을 위한 세출의 승인은 2년을 넘는 기간에 걸쳐서는 아니된다’고 되어 있다. 세계 최대의 군사 대국인 합중국 헌법은 지금도 ‘상비군을 가지면 안된다’라고 못박아두고 있는 것이다.
이 조항은 건국 당시의 ‘연방파’와 ‘주권(州權)파’ 사이에 맺어진 타협의 산물이다. 연방파는 상비군을 연방 정부의 관할 하에 두려고 했으며, 주(州)는 연방정부가 군사력을 독점하는 데에 저항했다. 군인은 손쉽게 그때그때 정부의 사병이 되어 시민에게 총구를 들이댄다는 것을 미국 시민은 독립전쟁을 통해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 시점에서 많은 주는 ‘상비군을 가져서는 안된다’라는 주 헌법을 채택했다. 전쟁은 직업군인이 아니라 무장한 시민(militia)이 수행하여야만 한다. 시민은 싸울 필요가 있을 때 소집에 응하여 총을 쥐고 싸운다. 전쟁이 끝나면 시민 생활로 돌아간다. 물론 그런 사항들은 건국자의 이상에 불과하며, 21세기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현실과 괴리되어 있으니 개헌하자’는 미국 시민이 있었다는 사례를 필자는 알지 못한다. 헌법을 고칠 필요가 없음은, 헌법을 읽을 때마다, 독립 시점에서 건국의 아버지들이 어떤 이상적인 나라를 미래에 투영했었는가, 그 원점으로 되돌아가 ‘지향해야 할 나라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리라. 이 헌법을 유지하고 있는 까닭에 미국은 아직까지도 ‘상비군을 갖지 않은 나라’를 (그것이 언제 현실화될지는 모르지만)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사 표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은 그런 것이다.
(2022-11-13 10:45)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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