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답한 세상에 대해 생각하다> 단행본 에필로그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1. 4. 21:16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책은 여러 매체에 썼던 에세이의 컴필레이션본입니다. <선데이 마이니치>에 몇 년 전부터 비정기적으로 장문을 기고했고, 그렇게 쌓인 글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고 난 뒤 그대로 하드디스크 구석에 잠들고 있던 것들도 함께 모아 책을 완성했습니다.
머리로부터 직접 나온 글부터 인터뷰를 첨삭한 글들까지 혼재되어 있는 탓에 문체나 터치가 각기 달라, 통일감을 결여하고 있는 아쉬움은 있지만, 뭐 그냥 기분전환하는 셈으로 읽힐 수 있을지나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단행본으로 펴내면서 교정지를 통독해봤는데 ‘음, 암울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사적인 주제를 쓰면서 왜 암울해지는 걸까요. 제가 쓴 다른 에세이집이었다면 무도나 종교, 영화나 문화 등의 얘기도 등장해 다소간 ‘커피 타임’을 취할 수 있습니다만, 이 책처럼 정치 얘기만 하게 되면, 끝 모를 암울함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에필로그’에서는 ‘화제 전환’ 차원에서, ‘어째서 현대 일본 정치에 대해 말할 때는 이렇게 암울해지는 걸까?’ 하는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지금부터 할 얘기는 그렇게까지 암울하지는 않습니다. 자세를 바꿔서 읽어주십시오.
일본이 고령화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도 다들 아실 겁니다. 어떤 나라의 고령화 정도를 파악하기 위한 여러 지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중앙 연령’입니다.
‘중앙 연령’이라는 것은, ‘그 연령보다 윗세대, 그리고 아랫세대가 같은 수’의 연령입니다. 일본의 중앙연령은 45.9세입니다. 당당히 세계 1등입니다.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중앙연령이 낮은 나라는 니제르로 15.0세입니다. 이는 ‘젊은 나라’라기보다는, 아마 치안이 너무 나빠 오래 살수 없는 탓일진대, 니제르 사람들에게도 그다지 기분 좋은 숫자는 아닐 겁니다.
이어서 중앙연령이 17세 이하인 다른 나라들은 동티모르, 잠비아, 아프가니스탄, 앙골라, 말리, 소말리아, 우간다, 차드 등이 있습니다. 모두 내전이나 테러가 줄잇고, 통치 기구가 만족스레 기능하지 않으며, 공중 위생의 레벨도 낮은 나라가 ‘젊은 나라’인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45.9세는, 일본이 정말 치안이 좋고, 통치 기구가 확실히 기능하고 있으며, 공중 위생에 대한 관심도 철저한 나라임을 보여주는 ‘선진국 지표’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넉넉하고 안전하지만, 아이 하나만큼은 태어나지 않는 나라.
아무튼 그것이 중앙연령이 높은 나라들의 특성입니다.
다른 나라의 중앙연령을 살펴보면, 프랑스가 40.6세, 영국이 40.2세, 한국이 39.4세, 러시아가 38.3세입니다. 죽 보다 보면 ‘그렇구나’ 하고 납득할 만한 숫자가 이어집니다.
재미있는 점은 미국과 중국이 같은 40위라는 점(37.4세). 세계 패권을 다투는 양대국의 인구 연령 구성이 비슷합니다. 흐음,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장차 미국은 그렇게까지 고령화가 진행되지 않으나, 중국은 한 자녀 정책 탓에 급격히 고령화됩니다. 그 인구 구성의 ‘젊음’의 차가, 언젠가는 국력의 차로 반영되지 않을까... 하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인구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주목해주십시오.
제가 일본의 중앙 연령을 확인하고 있던 때, 순간, ‘2위 독일, 3위 이탈리아’라는 문자열이 눈에 띄었습니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라니? 이 세 나라의 중앙 연령이 차례로 높다고? 어찌 된 영문이지?
그리고, 이어지는 리스트를 보고서 경악할 만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리스트를 봐 주십시오.
1위 일본, 2위 독일, 3위 이탈리아, 4위 불가리아, 5위 그리스, 6위 오스트리아, 7위 크로아티아, 8위 슬로베니아, 9위 핀란드, 10위 포르투갈.
어떻게, 눈치 채셨습니까? 이것이 고령화 국가의 공통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포르투갈을 제외한 9개 나라와 지역은 전부 ‘제 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인 것입니다. 슬로베니아는 나치에 점령되어 독일에 협력한 ‘지역’으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패전국’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포르투갈은 중립국이었습니다(독재자 살라자르의 파시스트 국가였습니다만).
이 리스트를 보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선 첫번째.
그것은 ‘파시즘 체제 하에서 전쟁을 시작해 패배한 나라에서는, 전후 당분간 말고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후 당분간이 지나고 나서라는 얘기입니다. 이 사실에 저는 흥미가 생겼습니다.
일본의 베이비붐은 아시는 바와 같이 ‘단카이 세대’, 1947년부터 49년,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직후에, 와르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연간 260만 명을 넘는 상황이 3년간 이어진 것입니다.
독일에서도 전후에 베이비붐이 시작되어 63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이탈리아도 독일과 거의 비슷하게 65년까지 출생률이 계속 높았습니다. 전쟁 직후에는 패전국에서도 아이들이 족족 태어납니다. 마치 전사자 수만큼 회복하려는 기세로 말입니다.
저는 1950년 생으로, ‘단카이 세대’의 막차입니다. 그 시절에 아이들이 많았다는 점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초등학교 교실이 부족해서 처음에는 ‘오전반 오후반’을 했을 정도니까요.
저는 도쿄 서남부 외곽의 공장 지대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한 반에 50명을 넘었고, 제가 있던 학년은 총 8반이었습니다. 두 학년 위의 학년은 10반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아이들 수가 이렇게나 많았습니다.
근데, 집안들이 모두 가난했던 겁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고무대야에 물을 담아 빨래판에 세탁을 하며, 난방을 화롯불로만 했습니다. 그러한 ‘공화적(共和的)인 가난’ 가운데, 도쿄에서조차 지역의 공동체는 서로 도우며, 비교적 기분 좋게 살았습니다.
기분이 좋았다 함은, 모두 가난했어도 자유로웠기 때문입니다. 긴 전쟁이 지속되고 나서 힘들게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제 징집되지 않아도 되고, 공습도 없어졌으며, 특별고등경찰, 헌병대, 치안유지법, 향촌 감시조직도 없어졌습니다. 1930년대부터 길게 이어진 숨막히는 ‘전쟁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이제는 전쟁으로 죽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강권적이고 억압적인 정치체제에 겁먹을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이 점에 대해 모두 마음 깊이 ‘안심’한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아버지들끼리 술잔을 기울일 때, 어떤 계기로 전쟁 얘기가 나오면, ‘그래도 패배해서 다행이지 않은가’ 하는 말이 몇 번이나 나왔고 그걸 옆에서 몇번 들은 걸로 저는 기억합니다. 그것은 비교적 온화한 어조였는데, 그 문구가 나오고 나면, 그대로 전쟁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 <꽁치의 맛> 얘기는 이 책 서두에도 나오는데요, ‘패배해서 다행이지 않은가’ 하는 말은 전후 어느 시기까지는, 전쟁 경험 세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툭 하고 내면에서 느껴질 정도의 설득력이 있는 어구였습니다. ‘져서 다행이다’라는 말의 의미는, 전쟁에서 죽을 공포, 강권적인 정부에 탄압당할 공포 이렇게 두가지 공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일본의 젊은 인텔리들의 숨기지 못할 실감이었습니다.
즉, 그 시점에서는 일본의 패전은 결코 트라우마적인 경험이라든가 굴욕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패배한 덕분에 자신은 죽지 않고 지나갔으며,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가 실현되었다, 언론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 종교의 자유도 손에 넣었다. 어쨌든 애써 손에 넣은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자.
‘승전국에게 하사받은 자유 따위에 기뻐하지 마라. 강요당한 헌법 따위에 고마워하지 마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그 시절 일본에 없었습니다.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지금 제가 ‘ ’ 괄호로 묶은 투의 말을 꺼낸 것은 60년대 중반의 에토 슌이었습니다만, 에토는 패전 당시 12세였습니다.
패전 직후의 일본을 묘사할 때는, 반드시 ‘사과의 노래’ (전란 직후에 개봉한 영화의 삽입곡 - 옮긴이) 가 흐르는 가운데 폐허 위에 세워진 암시장의 영상이 쓰입니다. 그 화면 속 사람들의 ‘밝은 얼굴’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그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패전이 기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전쟁이 고통스러웠다는 것입니다.
그 밝은 분위기는 제 기억에도 남아있습니다. 패전 이후 잠시 동안은 그랬습니다. 낙관적이고 향일적(向日的)인 분위기가 사회에 있었습니다. 적어도 60년대 말까지는 ‘사과의 노래’ 와 같은 밝음의 잔향이 일본 사회 어딘가에 떠다녔습니다. 70년대 정도면 그러한 온화한 정서가 사라지고, 사회가 살벌해집니다. 하지만 고도성장기로부터 버블 경기에 이르는 기간이었으므로, 모두 얼굴은 살벌한 표정을 지어도 돈만큼은 윤택하게 있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뭐든지 살 수 있다는 기묘한 다행감 가운데, 패전 같은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90년대에 거품이 꺼지고 나서, 문득 정신이 들고 보니 일본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돈이 없어져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거품이 꺼진 뒤 20년 동안, 일본은 줄곧 세계 제 2위의 경제 대국이었기 때문입니다(중국에 GDP를 추월당한 것은 2010년 일입니다). 돈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가 우중충하니 어두워졌습니다.
저는 그 시기부터 ‘패배해서 다행이지 않느냐’ 하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일본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하는 원망하는 듯한 분위기가 사회 전체에 퍼지게 된 탓에 그렇게 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저 말고는 별로 없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중앙 연령 리스트’를 보고서 문득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자학 사관’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 일본이 ‘우중충하니’ 어두워지게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자학 사관’이 사회를 어둡게 만들었다는 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그들은 일본 사회에 뿌리박은 부분에 있는 어떤 종류의 치명적인 ‘취약함’을 감지하여, 그 원인은 ‘패배해서 다행이지 않느냐’ 하는 얼렁뚱땅한 말로 패전 경험을 마무리짓는 것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방식은 자학적이다’라는 말을 꺼낸 것입니다.
역사 수정주의자들 가운데 전쟁을 경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 패전을 맞이한 사람은 있지만, 징병되어 전장에 섰다든가 공습경보를 받고 혼비백산한 경험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전쟁에서 죽을 각오를 했던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서 자신들을 전장으로 보내는 시스템이 없어진 것에 깊이 안도했습니다. 분명히, 조국의 패배는 슬픈 일입니다만, 그보다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는 죽지 않아도 되는 게 더 기뻤습니다. 그래서, 전쟁 체험자에게 있어서 패전은 굴욕이나 트라우마적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전쟁을 실시간으로 경험하지 않은 그 이후 세대에게는, 패전을 단적으로 ‘좋은 일’로 긍정하게 될 개인적 근거가 없습니다. 라디오에서 항복 선언을 듣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죽지 않고 끝났다’ 하고 깊이 한숨쉬었던 것과 같은 경험이 없습니다.
이렇게 ‘패전 소식을 안도감을 갖고 경험’ 했는지의 여부가, 사실 엄청난 세대적 단절을 패전 국민에게 가져다준 것은 아니겠습니까?
우리 전후 세대 입장에서는 ‘경험의 결여’라는 경험을 했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들 사회의 근본적인 모습을 결정지은 역사적 대사건인 패전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패전국 일본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공작이 있었고, 어떤 밀약이 있었는가에 대해, 우리 일본인들은 ‘공식적 역사’란 것을 공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전쟁을 경험한 어른들은, 그것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었습니다.
어째서, 어떤 식으로 패배했는가, 어째서 패전국 일본은 ‘이런 나라’가 되었는가에 관해, 납득이 가는 설명을 들은 적이 없는 채로, 우리는 지금도 ‘승전국’ 미국의 속국 신분을 감수하고, 일미(日美) 지위 협정이라는 ‘불평등조약’을 감수하며, 국토를 외국군이 제 나라인 마냥 활보하는 것을 손가락을 물며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이나 한국, 북한은 사사건건 일본이 전쟁 전과 전쟁 후에 그들의 국토에서 얼마나 심한 짓을 벌였는가, 그에 대한 반성과 배상을 요구합니다. 전쟁을 시작한 것도,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우리 전후 세대가 아님에도, 패전 국민으로서의 도의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만은 ‘시효 없이’ 우리가 짊어지고 있습니다.
이 패전 국민 신세에서 오는 낙담을, 패전을 성인이 되어서 경험했던 세대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패전의 해방감이나 안도감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 이 낙담은 무서우리만치 독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동일한 경험이 세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에 관해 우리는 과소평가하지 않았나, 그런 느낌이 듭니다.
전쟁 경험 세대에게는 실제로 자신들이 전쟁 중에 점령지에서 ‘지독한 짓을 했다’는 실감이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중국과의 국교 회복 후, 일중(日中) 우호 협회에 가입하고, 수많은 중국인 유학생들을 집에 초청하고, 보증인이 되어주며*, 돈을 빌려주었습니다만, 그 이유를 모친이 물으면, ‘우리는 중국인에게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빚이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 일본에서는 외국인이 부동산을 임차하는 등의 활동을 하려면 대개 보증인이 있어야 함. - 옮긴이)
‘자네들에게는 정말로 미안하네. 용서해주기를 바라네’ 하고 중국인에게 고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속죄할 기회를 얻은 것을 고맙게 여기는 것처럼 저에게는 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침략을 했다든지, 지독한 일을 벌인 기억도 없습니다. 전쟁이 끝난 것을 진심으로 다행으로 여겼던 실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전국민으로서의 전쟁 책임만은 무한히 따라다닙니다.
패전에 대해 우리 세대가 취할 스탠스는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전쟁에 관련된 모든 책임을 우리가 계속 받아들여야 한다’고 전쟁 세대와 나란히 계속 고개를 숙이는 것. 미국, 중국, 한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네덜란드, 영국, 오스트리아 등, 가는 곳곳마다 계속 사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알까 보냐, 그따위 것’ 하고 발끈하는 것. ‘그 전쟁은 좋은 전쟁이었다’ 라든가 ‘그 전쟁에 대해 아시아 민중은 일본에게 감사하고 있다’ 든가 ‘그 전쟁에서 일본은 사실 이긴 것이었다’ 와 같은 난센스를 열띠게 주장하며, 전쟁 책임을 전부 방기하는 것. 이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방식입니다.
이 두 가지중 한 가지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패전을 경험했던 세대는 이러한 선택지를 강요당하지 않았습니다. 가벼이 ‘패배해서 다행이지 않느냐’ 로 끝났습니다. 이는 그들 뒤에 등장한 세대에게만 절실한 질문인 것입니다.
가토 노리히로와 다카하시 데츠야 사이의 <패전후론(敗戰後論)>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던 것은, 1995년입니다. 언론을 떠들썩하게 하며 많은 사람이 찬성과 반대의 입장으로 발언한 논쟁이었습니다(제 <망설임의 윤리학>이라는 데뷔작은 <패전후론>의 서평을 핵심으로 짜여져 있었습니다). 그때, 논쟁에 열광해 있던 탓에, ‘어째서 이제 와서 패전이 문제가 된 것인가?’ 하는 물음만은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논쟁이 가지는 또 한 가지의 역사적 의미는, 패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그때까지는 아무 말 없이 일본 국민에게 공유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95년 경에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95년 즈음에, 우리 전후세대는 패전을 상대할 때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인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방식인가,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극히 정형적이고도 스트레스 가득한 선택을 강요당하게 되었습니다. 가토 노리히로는 그에 대해 ‘제 3의 길’이 있지 않을까 제안을 했습니다. ‘제 3의 길’을 찾아내지 않으면, 일본인이 다시 한번 ‘밝아지는’ 일은 불가능한 게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 제게는 보여집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길’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길’도, 모두 일본인을 심각하게 피폐케 하고, 일본인의 사고를 정지시키며, 빠르고 늦음의 차는 있어도, 언젠가 국력을 좀먹어가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가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패전 경험・전후 경험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달성되지 못했습니다(그것을 혼자 힘으로 이루려고 했던 가토 노리히로는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예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이것과 똑같은 일이 모든 옛 추축국들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어느 패전국이라도 어느 시기까지는 ‘패배해서 다행이다’라는 실감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난해도 밝았고, 하루하루는 고되어도 내일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기부터 ‘괴롭지만 윤리적인 책무를 견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파와 ‘시끄럽다. 윤리 같은 것은 상관없다. 나는 절대로 사과하지 않을 테다’ 하는 일파로 국민이 양분되었습니다. 일본의 좌익 리버럴과 우파 넷 우익의 분단은 참으로 그런 양태입니다만,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도 거의 비슷한 국민 분열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떤 길을 가더라도,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만은 동일합니다.
‘사과의 노래’와 암시장 사람들의 웃는 얼굴은 ‘패배한 대신 손에 넣은 것’으로 인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같이 패전 이후 수십 년이 지난 패전 국민에게는 ‘패배한 대신에 손에 넣은 것’이 없습니다. ‘패배한 탓에 더욱 앞으로 잃어버릴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 허무감이 패전으로부터 일정 기간이 지난 뒤의 패전 국민의 ‘어두움’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탓에 패전 국민은 자기 긍정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자기 나라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에 대해 자연스러운 경의나, 망설임 없는 긍지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세공을 가하고, 장식하여, 다른 것으로 가장하지 않으면 ‘자신의 나라’를 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아마 패전 국민이 패전으로부터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앓는 병이 아닐까 합니다.
국민이 구조적으로 ‘자기 긍정감의 결여’로 고통스러워하는 이상, 아이가 태어날 리 없습니다. 그것이 중앙 연령의 병적인 상승으로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닌가... 하는 것을 저는 방금 중앙 연령 리스트를 보면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것이냐,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이냐, 하는 얘기를 딱히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할 뿐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그것이 끝난 지 수십 년, 경우에 따라서는 수백 년 동안, 그에 관련된 사람들과 그 자손들에게 있어서의 일종의 트라우마로서 지속된다고 하는, ‘듣고 보면 그럴 지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어째서 시사적인 얘기를 하게 되면 ‘어두워’ 지는가 그 이유에 대한 개인적인 가설을 세워보았습니다. 가설을 세운다고 해서 곧장 기분이 밝아지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어두워지는 원인’을 이해할 수 있으면, ‘그럼, 다음에 취할 수단을 생각해 볼까’ 하는 기분이 조금이라도 들지 않겠습니까.
예, 긴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출처 각각의 텍스트를 선택 배열하여 리더블(Readable)한 도서로 다듬어주신 마이니치 신문 출판사의 미네 하루코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고마웠습니다.
2019년 6월
우치다 타츠루
(2022-12-12 10:01)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Can’t Buy Me Love (0) 2023.01.06 한국 언론인들의 고민 (1) 2023.01.05 <여명 직전 (이 가장 어둡기 마련) > 에필로그 (1) 2022.12.31 <거리의 미중론(美中論)> 서문: 곤란한 문제를 다루는 곤란한 방법 (0) 2022.12.29 가츠라 니요 씨의 라쿠고 (0) 2022.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