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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래 시키고 싶어하는 남자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11. 18. 20:49

    극단 니토샤(二兎社)가 나가이 아이 씨의 작품 <노래 시키고 싶어하는 남자들>를 14년만에 다시금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도쿄 도립 고등학교 졸업식의 국가 제창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교사와, 그 교사를 설득하는 교장 사이의 긴장된 의논을 중심으로 한 희곡이다. ‘국기 국가(國歌)에 대해서’ 의견을 요청받았으므로, 아래와 같은 문장을 기고했다.


    얼마전 미션스쿨 행사에서 불러주어 강연하였다. 장소는 성공회 계열 학교였는데, 강연 전에 예배가 있었고, 회중이 함께 오르간 연주에 맞춰 성가를 불렀으며, 주(主)의 기도를 제창했다.

    필자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그날도 아침 일찍 ‘아침 불공’을 드렸다. 축문과 반야심경, 부동명왕의 진언을 읊고, 구지[九字] 주문을 외면서 도장을 영적으로 맑게 하는 것이 합기도 도장주인 필자의 아침 일과이다. 경험을 통해, 어떤 종류의 의례로 말미암아 ‘심신이 합일’되는 것을 리얼하게 실감하고 나서부터, 옛사람의 정진에 존경과 감사를 담아 의례를 지키게 되었다.

    필자 자신은 종교 의례를 지키지만, 문인들에게 강제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도장에 오게 된 동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다르다. 그래서 도장이라는 공간에 필요한 배려는 요구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수련 전후에 인사하는 것 이상을 필자는 문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부탁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하고 말을 하는데, 그것은 가르치는 필자가 먼저 말한다. 필자는 도장이라는 공간을 향해 그리 말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잠시 동안, 합기도 수련을 잘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고, ‘수련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사의(謝意)를 표한다.

    야구 시합이 시작될 때 투수가 모자를 벗고 홈에 가볍게 인사하는 것도 똑같다. 딱히 심판에게 예의를 차리는 게 아니다. 그라운드를 향해 ‘앞으로 잠시 모두가 최고의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지켜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공간에 대한 존경이라는 것은, 집단에 있어서, 어느 개인에게도 속하지 않지만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영역, 즉 ‘공공’을 세우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의례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모두들 이해해 주실 것으로 본다.


    여기까지가 일반론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국기와 국가(國歌)에 존경을 표명하는 것은 결국, 여기서 말한 ‘공간에 대한 존경’에 상응하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가(國歌)를 부르고, 국기에 경례하는 것은 ‘국가(國家)에 대한 존경의 의례’이다. 그래서 국민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할 수 있고, 그것을 위반하면 처벌을 내리는 게 당연하다고 아마 많은 정치가나 관료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필자가 문인에게 요구하는 ‘도장에 대한 존경’과는 질이 다른 것이다. 문인들은 자신의 의사로 이곳 도장에 입문한 것이고, 내킬 때 그만둘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대다수는 일본 국민임을 받아들이는 데 대한 의견을 제시한 적이 없다. 어느샌가 일본 국민이 되어 있었다. 국기와 국가(國歌)에 대해서도 그렇다. 필자는 그것을 제정하는 자리에 입회하지도 않았고, ‘국가(國歌)와 국기는 이걸로 해도 되겠습니까’ 하는 찬성 여부에 의견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이상, 국기와 국가(國歌)에 대해서 ‘수용할 수 없다’고 선언할 권리가 전 국민에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아시는 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미합중국 대법원은 국기 훼손을 시민의 권리로 인정하고 있다. 옛날에는 국기 모독을 금지하는 주(州) 법률이 있었다. 허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미국 대법원은 이들 법률을 위헌으로 보았다. 수정 헌법 제 1조가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는 국기의 상징적 위신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다만, 한 사람의 대법관이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국기는 그것을 폄하하며 손에 드는 자 또한 보호하고 있다’는 보충 의견을 덧붙였다.

    필자는 이 사법관의 갈등을 건전하다고 본다. 그는 미국 국민이 성조기에 존경을 가질 것을 바라고 있으나, 그것을 강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전국민의 존경에 어울리는 국가가 된다면, 국기를 향한 자연스러운 존경이 우러나온다. 현재 국기에 대한 존경을 결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미국이 존경을 받을 만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민에게 국기를 향한 존경을 요구하려면, 우선 존경을 표하기에 합당한 나라를 만들 수밖에 없다. 국기를 훼손하는 시민을 벌한다고 해도 그로 인해 미국이 ‘존경 받을 만한 나라’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존경을 표하지 않으면 처벌받는 국가’가 될 뿐이다.

    국기에 대한 존경을 실현시키기 위해 어떤 사람은 ‘국민에게 국가 권위를 이용해 강제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어떤 사람은 ‘자연스럽게 존경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필자는 후자의 길을 따르고자 한다.


    17세기에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국민국가는 국제 사회의 기본적인 정치 단위가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전에는 동질적인 국민이 고정적인 영토 속에 집주(集住)하고, 종교나 언어, 문화를 공유한다는 게 국가의 표준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국민국가가 ‘기본값’이 되었던 데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그 역사적 이유가 없어지면 또한 다른 정치단위가 국제관계의 당사자가 된다. 국민국가는 본질적으로 잠정적인 제도이다. 그러나, 잠시 동안(어쨌든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시스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 이상, 이 소여(所與)의 제도를 어떻게 ‘보다 바람직한 것’ ‘ 보다 살기 좋은 것’으로 바꾸어 나갈 것인가가 실천적 과제가 된다. ‘국가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원리적으로는 그게 옳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한다고 해도, 자국의 통화가 외화와 교환될 수 있으면 좋고, 자국의 여권이 외국의 세관에서도 통용되기를 바란다. 국민국가란 ‘정상(正常)적으로 기능하는 환상’이기를 바라고는 한다.

    해외에 나가면, ‘일본인으로서 당신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을 곧잘 받는다. 그에 대해 ‘필자 개인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어떠한 의리나 책임도 느끼지 않으므로,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다’라는 대답은 절대 하지 않는다. 해도 되기는 하지만, 상대방은 기분을 상당히 잡칠 것이다. 필자 자신은 그러한 경우에는 ‘일본 국민을 대표해서’ 의견을 말하고, 설명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과한다. ‘일본을 될 수 있는 한 보다 나은 국가로 만드는 일’, 이웃 나라로부터 어느정도는 호의와 신뢰를 얻는 나라로 만드는 일에 관해 필자의 몫에 상응하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필자는 요청받을 시 국기에 대해 경례하고, 국가를 제창한다. 젊었을 때는 안 불렀다. ‘일본은 변변찮은 나라고, 자신은 그것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의 상징에 어떻게 존경을 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느 시기부터는 내키지 않아도 의례를 지키게 되었다. 만약 일본이 ‘변변찮은 나라’라면, 그 책임의 일부는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리고 필자 자신이 이 국기와 국가(國歌)에 존경을 표하는 일이 그다지 고통은 아닌 일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을 ‘조금이나마 나은 나라’로 만드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일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국기 국가(國歌)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것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판단에 맡겨야 마땅하며, 누구도 강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판단을 존중할 만큼의 기량을 갖춘 나라의 국기 국가(國歌)만이, 국민의 진솔한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합당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싫다는 국민에게 존경의 표명을 강제하는 나라의 국기나 국가(國歌)는 결코 자연스러운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말하자면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인 것이다. 앞으로 일본이 점차 ‘변변찮은 나라’가 되어있다면, 어느날 필자는 국기에 경례하지도, 국가를 부르지도 않을지 모른다. ‘어제까지는 불렀는데 어째서 오늘부터는 부르지 않느냐’라고 누군가가 힐문한다면, ‘선을 넘었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제 부르는 게 싫어졌다’고 말할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국가를 부를 수 있는 나라인가, 그렇지 않은 나라인가. 그것을 필자는 날마다 자기 자신에게 묻게 된다. 그 긴장감을 지속하는 편이, ‘항상 부른다’ ‘항상 부르지 않는다’ 하고 먼저 정해놓고서 그 룰을 지키는 것보다도, 필자에게는 나라에 대해 어떤 스탠스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자연스러운 사고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긴장감을 가질 때, 조국은 필자에게 가장 가깝게 느껴진다.


    (2022-11-03 10:2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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