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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키 문학이 갖는 의의에 관해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11. 14. 22:25

    매년 이맘때가 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예정 글’을 쓴다. 첫 의뢰는 15년 전쯤에 받았다. 이 세상에 ‘예정 원고’라는 것이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확실히 뉴스가 예고 없이 날아들게 되면 긴 원고를 쓸 여유가 없다. 그래서 언론은 예정 원고를 준비해 놓는다. 예정 글이 실릴 일이 없어져도 글쓴이는 원고료를 고스란히 받는다. ‘작년과 똑같아도 상관 없어요’라고 담당 기자는 말하지만, 그건 좀 멋쩍으므로 매년 조금씩 버전업을 해 써보낸다.

     

    일전에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라는 책을 냈을 때, 출간 1년 전에 썼던 예정 글을 그대로 게재한 적이 있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글을 활자로 내보냈다고 문예평론가에게 호되게 야단맞았다. 하지만 ‘일어난 일’에 관해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해석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일어날 법한 일이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에 대해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또한 사고 훈련 차원에서 유용하다. 그렇다면 ‘실리지 않은 예정 글’도 역시 쓸모 없는 것은 아닐 터이다.

     

    하루키가 문단에 처음 등장했을 무렵 그의 작품은 70~80년대의 ‘팝’적이고 경쾌한 도시 생활자들이 읽는 문학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한 평가는 지금 와서 보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전 세계의 ‘’팝’하지도 않고, 경쾌하지도 않으며, 도시적이지도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수의 독자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일본 작가 중 이만큼 많이 외국어로 번역되고, 인종이나 종교, 계층이 다른 독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사람은 예외적이다. 어째서 하루키 문학은 이렇게까지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필자의 가설로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교섭(交涉)을 줄곧 써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눈 앞에 리얼하게 존재하는 것’에 관해 쓰여진 작품의 경우에는, 일독하고 나서 ‘이 작품은 자신을 독자로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 때가 종종 있다. 그 글 속에서 횡행하는 젠체하는 전문용어들[jargon], 그럴싸한 행동거지 모두 참으로 이해 못할 작품을 읽는 경우, 우리는 곧장 책을 덮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가령 머나먼 나라, 머나먼 시대의 글이라 할지라도, 등장인물들이 ‘있을 수 없는 장소’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만나고, 상처입고, 치유받으며,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모하는 이야기는 어떤 종류의 보편성을 확보한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 어느 시대의 어떤 나라 사람이라도 (인연이 없는 정도에 따라) 그것과 등거리(等距離)에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의 리얼리티는 역사적, 지리적 한계를 초월한다.

     

    하루키 문학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사람의 앎으로는 헤아리기 한량 없는 것이 우리 세상 속에 끊임없이 침입해 온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가고, 사람을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상처입힌다. 허나 이는 유사 이래로 전 세계 사람들이 경험해온 것의 실감(實感)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피지컬하게, 신체적으로 절박(切迫)해 온다. ‘존재할 리가 없는 것’이 현실에 리얼하게, 탠저블[tangible]하게 그곳에 존재할 때, 그것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물음에 관한 몇가지 유용한 경험지를 인류는 후세에 전해 왔다. 루틴을 지킬 것, 예의 바를 것, ‘수중에 있는 것’으로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할 것, 억제적일 것, 세상에 존재하는 중요한 일들의 많은 것은 ‘원리의 문제’보다도 ‘정도의 문제’라는 점을 알 것 등등. 우리가 ‘성숙’의 지표로 하고 있는 것들의 상당수를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은 품고 있다. 그러한 실천적 지혜의 의미가 몸에 밴 사람들은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다. 그들이 하루키의 전 세계적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필자는 본다.

     

     

    (슈칸킨요비 10월 13일호)

     

     

    (2022-10-19 14:5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번역 노트】

     

    死は生の極としてではなく、その一部として存在している。

     

    Death is not the opposite of life, but a part of it.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 <노르웨이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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