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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전 총리 총격 사건 보도를 접하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7. 8. 21:34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에 기고했던 글의 긴 버전이다.
이곳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의 ‘오늘의 시점’ 코너에 싣고 있는 필자의 연재분은 금요일 정오가 마감인데, 참의원 선거 결과를 모르는 단계에 있다 할지라도, ‘참의원 선거의 역사적 의미’라는 타이틀 아래, 조금 긴 시간 간격에 입각한 이번 선거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생각한 점을 썼다.
원고를 다 쓴 직후에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총격 받아 심폐 정지’라는 뉴스가 날아들었다. 조금 마감을 늦추어 줄 것을 요청하며, 1보 보도가 나온 시점에서 이 사건에 대한 필자의 코멘트를 쓰고자 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다행히도, 신문사는 마감이 늦춰져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아량에 사의를 표한다.
아베 씨의 용태에 대해서도, 범인이 누구인지 어떤 동기로 그런 테러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정보가 없는 단계에서 쓰는 것이므로, 이 원고가 지면에 실릴 시점에서는, 필자가 쓴 것이 사실 오인이 될 수도 있고, 무의미한 것이 될 가능성도 남아있으나, 그럼에도 지금 써야할 것은 써두고자 한다.
여하한 정치적 입장에 있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폭력’에 희생당한 아베 씨에 대해서는, 입장 차이를 넘어 모든 국민이 그의 무사함을 기원하고 있다고 본다. 필자는 아베 씨가 내건 거의 모든 정치적 이슈에 반대해왔지만, 지금은 그저 그의 건강 회복과 정계 복귀를 바란다.
아무리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정치적 대립이라 할지라도, 그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로운 언론’의 심급이 되어야 하며, 그 이외의 수단을 필자는 수용하지 않는다. 그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자 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일본 사회에서 정치를 논하는 말은 해를 거듭할수록 ‘자유로운’ 이라기보다는 ‘절도를 잃은’ 것이 되어 왔었다. 그 점은 모두 느끼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폭력적인 말’은 그저 ‘말’에 지나지 않고, 말이 인간을 깊이 상처입히는 일은 없다, 그렇게 믿는 사람도 많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매도나 거짓말, 프로파간다가 언론의 장을 지배하게 되면, ‘가닿아야 할 말’과 ‘사라져야 할 말’을 판정하는 힘이 언론의 장에는 있다는 확신을 사람들은 잃기 시작한다. 자유로운 언론의 장이 가진 심판력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을 때, 물리적 폭력이 가진 현실 변성력에 대한 기대감이 팽창한다. 언론을 향한 신뢰도가 바닥을 길 때, 물리적인 힘만이 결정력을 갖는다는, 꺼려 마땅한 사상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는다. 이 두 개념은 제로섬 관계에 있다.
정치적 폭력을 억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찰이나 군대의 강화가 아니다. 충분한 신뢰를 가져다줄 수 있을 만큼, 논리적이고, 감정 풍부하며, 절도를 갖춘 자유로운 언론을 다시 한번 고쳐 세워야 한다. 그 작업은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
(2022-07-08 13:4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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