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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으로서의 성행위’ 와 자기결정론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7. 30. 11:10

    20년 전쯤에 성에 대한 윤리를 주제로 한 논집 아래 ‘성노동’에 대한 기고를 요청받았다. 정말로 문외한인 분야의 논건이었지만, 고심하여 썼다. 어떤 책이었는지는 잊어버렸다. 분명히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나온 논집이었기는 한데, 지금까지 갖고 있지는 않다.

    그때 했던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렇게까지 날카롭게 쓰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들어가며


    초장부터 솔직하게 말씀드리는데, 필자 자신은 성노동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한 것도 아니고, 온 힘을 다해 주장하고 싶은 개인적 의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종종 성노동을 다룬 문장을 읽곤 하지만, 몇 쪽(때에 따라서는 몇 줄) 읽기만 해도 기분이 축 처져 책을 덮어버리게 된다. 참 난감하기는 한데, 필자를 좀먹는 이 피로감이 반드시 개인적인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필자가 봤을 때 이 문제는, 어느 쪽 얘기를 들어봐도 ‘일리’가 있다. 단, ‘일리밖에는 없다’. 반대 의견과 타협하며, 더욱 폭넓은 동의의 장을 형성할 수 있는 대화적인 어법으로 자기의 의견을 개진해나가고자 하는 입장에 서고자 할 때, 이 논쟁의 장에 거할 곳이 없다. 거의 모두가 ‘싸울 듯한 기세’다. 필자가 경험으로 아는 바, 이런 종류의 논쟁에서는, 모두가 각자 사활을 걸고 말하는데, 거기에 최종적 해결이나 변증법적 지양 등을 시도해 보아도 별무소득이다.

    필자는 이제 성노동에 관해 논해졌던 이론과 학설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는 삽화들을 소개하고, 그 논리에 대해 비교 고량(考量)할 것인데,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상식’의 영역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것임을 우선 알려드리고자 한다.

    1.

    ‘성노동’라는 말은 가치중립적인 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명확한 주장과 얽혀 있는 술어이다(라고 생각한다. 아닐지도 모른다). 이 말이 일본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매춘 종사자들의 증언을 담은 책인 <섹스 워크>가 1993년에 간행된 이후일 것이다.

    이 책에는 매춘부의 권리를 위한 국제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for Prostitutes’ Rights) 헌장과 세계 매춘부 회의(1986년)의 성명 초안이 수록되어 있다. 성노동론의 기초적인 고상(考想)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그녀들의 주장부터 들어보기로 한다. ‘헌장’은 다음과 같은 문언으로 시작한다.

    “개인적 결단의 결과인 성인에 의한 매춘을 전면적으로 비범죄화하라.” (F. 델라코스테 등 편저, <섹스 워크>, 야마나카 도미코 등 역, 현대서관, 1993년, 386쪽)

    아래로 이어지는 그 주된 논지는,

    (1) ‘대부분의 여성은 경제적인 의존 상태에 있거나,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 그 이유는 여성에게는 교육과 고용의 기회가 부족하고, 말단직 이외의 직업 선택지에 구조상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 “여성에게는 충분한 교육을 받고, 고용의 기회를 얻으며, 매춘을 비롯 다양한 직업을 통해, 정당한 보수와 존경을 받을 권리가 있다.”

    (3) “성에 관한 자기결정권에는, 상대(복수의 경우 포함)나 행위, 목적(임신, 쾌락, 경제적 이익 등), 자기 자신의 성에 관한 조건을 결정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상의 세 항목으로 간추려질 수 있겠다.

    그밖의 ‘강제매춘, 강간의 금지’ ‘미성년자의 보호’ ‘성소수자 차별 폐지’ 등도 거론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의논거리가 될 만한 주제는 이 세 항목이 될 것으로 보아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 열거된 세 항목 중 (1)은 여성 차별을 둘러싼 일반적 상황의 기술, (2)는 ‘매춘할 권리’에 관한 요구, (3)은 ‘성에 관한 자기결정권’의 범위에 관해 규정한 것이다. 각자가 내포하고 있는 조리(條理)에 대해, 아래에서 계량적인 음미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2.

    세계 매춘부 회의의 주장에 대해 우리가 우선 주지해야만 하는 사실은, 그것이 전통적인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비판과는 상당한 불일치가 있다는 점이다.

    성산업 폐지 운동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다음과 같은 전통적 사고방식을 따른다.

    여성이 성을 상품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남성이 모든 가치를 독점하는 동시에, 상품 가치가 있는 것(권력, 재화, 교육, 정보 등)을 여성이 소유하기를 구조적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 아래, 본질적으로 ‘성 이외에는 팔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의 지위에 처해 있다. 매춘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억압의 상징’이다. 그런 고로,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매춘부들을 그 노예적 처지에서 구출하고, 매춘 제도 그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라 윈터는 이 입장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쓴다.


    “남성은 여성의 몸이 성적 이용 목적을 위해 매매될 수 있다는 필요성과, 그 권리조차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도면밀한 시도를 행해왔다. 이는 매춘을 직업으로 완곡히 표현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여성에게 주어진 불평등한 입장이나 매춘부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전제 조건 등은 남성 자신의 편리주의에 입각해 무시하면서, 저임금, 미숙련, 단순 노동 등의 기존 개념을 대신해, 즐겁고 실리적인 직업으로서의 매춘을 여성은 원하는 것이라는 신화를 남성은 널리 퍼뜨렸다. (…)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경제적 종속상태나 강제된 성적 복종 상태(우리는 이를 강간으로 정의해 왔다)를 비판하고 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성적 학대와 불평등한 상거래인 매춘 제도를 비판하고, 폐해야 마땅하다고 결의한다.” (같은 책, 322~4쪽)


    허나, 윈터의 기세 좋은 페미니즘적 성산업 폐지론과 세계 매춘부 회의의 주장 사이에는, 넘기 힘든 차이점이 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세계 매춘부 회의에 결집한 매춘부들은, 그녀들의 ‘생계 수단’이자 ‘어엿한 직업’인 매춘 제도의 폐지가 아닌, 존속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취급되는 게 아니라, 근로자로서 인정받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매춘부들은 페미니스트와 정면 대립하기에 이른다.

    “페미니스트가 매춘을 정당한 노동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매춘부를 일하는 여성으로 인정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거절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매춘부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헌장’은 쓰고 있다. (같은 책, 390쪽)

    이 대립에 대해, 페미니스트의 주장과 매춘부들의 주장을 나란히 비교해 살펴보니, 필자는 매춘부들의 주장에 그만 설득력과 절실함을 느끼게 된다. 아래에 그 이유를 밝히겠다.


    윈터는 이 짧은 인용 가운데 두 가지를 논하고 있다. 하나는, 가부장제 사회에 의하면 모든 여성이 남성에게 경제적인 종속을 강제당하고, 성을 상품화하기를 강제당한다, 는 가부장제 비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매춘 제도는 남성이 행하는 여성 지배의 최악의 형태다, 하는 매춘 제도 비판이다. 각각을 따로 읽어보면, 아무 모순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허나, 두 명제를 동시에 읽어보면 부정합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다 함은, 매춘부를 ‘보다 많이 억압되어 있는 여자’로서 ‘희생자화’ 하는 것은, 매춘부와 일반 여성 사이에 우선 ‘억압의 정도 차이가 있는 서열화’를 도입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인데, 이 서열화에는 논리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다.

    매춘부를 ‘더럽혀진 여자’, 일반 여성을 ‘깨끗한 여자’로 구분하는 차별화는 물론 페미니스트가 채용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매춘부가 ‘더욱 많이’ 억압받고 있으며, 일반 여성들이 ‘보다 적게 억압받고 있다’는 ‘차별’을 가능케 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비 매춘부들의 경우 매춘부들보다도, ‘낭만적 연애’나 ‘백년 해로’, ‘정조 관념’ 등의 근대적 가족 환상의 연명에 공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주부들은 남성에게 성적으로 봉사하고, 남자의 자기 복제 욕망에 응해 자녀를 낳으며, 가사 노동을 통해 남자의 권력 독점 활동을 지원하고, 가부장제의 연명에 깊이 관여하고 있기에, 이 사회에서는 매춘부보다 ‘보다 적게 억압받게’ 된다.

    허나, 페미니스트의 입장이 되고 보면, ‘매춘부에 비해 <높게 쳐주는> 종신 고용제와 마찬가지로 간주되는’ 아내들은, 가부장제의 자각 없는 공범자나 다름 없다. (간노 사토미, <쾌락과 생식 사이에서 흔들리는 섹스 워크-다이쇼 시대 일본을 근거로>, 다카키 히데아키 편저, 『파는 신체/사는 신체-섹스 워크 론의 가늠자』, 세이큐사, 1997년, 120쪽)

    이 아내들을, 그 ‘경제적 종속 상태’와 ‘강제된 성적 복종 상태’(윈터에 의하면, 그것은 ‘강간’이다)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싸움 역시 시급한 정치적 과제였을 터이지 않았는가.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입장으로서, ‘주부의 해방’을 ‘매춘부의 해방’보다 ‘늦출’ 이유는 없다.

    실제로, ‘주부야말로 부끄러워할만한 성적 노예’라는 지적은 이미 다이쇼 시절(1912년~1926년 - 옮긴이)의 요사노 아키코가 주장하고 있다. 간노 사토미는 요사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요사노 아키코는 <현모양처의 자질>이란 <결혼의 기초가 되어야 할 연애를 전부 배척하고 오로지 물질적 결혼에 입각해 처의 행세를 하는 것으로, 그저 남편이라는 남자에게 예속되어 그 성욕에 봉사하는 측실이 되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그 의식주를 매양 돌보는 식모를 겸하는 일이 소위 이 땅의 양처>라고 말한다. 또한 <남자에게 의탁하여 가정 내에 전일제로 기숙하는 부인을 노예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설령 육아 및 부엌 잡용에 있어 근면한 부인이라 할지언정, 모종의 직업적 능력을 결여한 부인은 시대에 뒤처진 부인으로 면구케 하는 습속을 만들고자 한다> 고 서술한다.” (같은 책, 118쪽)


    참으로 명쾌한 논리이다. 그리고 이 담론을 기반으로, ‘남자의 재력을 수단으로’ 하는 생활 방식을 취하는 여성은 모두 ‘남자의 노예’이며, 그러한 생활방식은 부정해야 마땅하다고 하는데,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가부장제 사회에 속한 모든 성 제도의 동시적 철폐이지, 매춘 제도의 선택적 철폐가 아니다.

    윈터와 요사노 아키코의 공통점인 ‘여성=성적 노예’ 론은 ‘총론’으로서는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옳다. 하지만, 그 논리에 기초해 ‘각론’적 과제로서 성산업 폐지 운동을 추진하려고 할 때, 어째서 매춘부가 주부보다 앞서 ‘해방’되어야만 하는가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때 만약, 매춘부가 주부보다 ‘가난하고’ ‘교양이 결여되어 있으며’ ‘찝찝한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우선성의 근거로 둔다면, 그것은 ‘돈’, ‘교양’, ‘처녀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가부장제의 가치관에 적어도 일부 동의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가부장제 비판으로부터 성산업 폐지 운동을 도출해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거의 자명하지만, 동시에 이들 사이의 논리적 가교 형성이 곤란한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우리가 가부장제를 철저히 비판하기 위해서는, 성산업 폐지 운동의 주창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성산업 폐지 운동을 우선하기 원한다면, 가부장제 비판을 톤 다운시킬 수밖에 없다.

    이 제로섬 구조 탓에, 가부장제 비판에 래디컬한 입장을 고수하는 논자는, 거의 구조적으로 매춘 용인의 입장을 택할 수밖에 없으며, 매춘부를 ‘유곽’으로부터 구출시키고자 한다면 지배적인 성 이데올로기에 어느정도 자신의 주의 주장을 양보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 호오와는 상관 없이, 논리의 경제성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3.

    논리의 경제성에 속박된 ‘자유롭지 못한 지식인’에 비하면, ‘현장’의 여러분은 조금은 엉성할지 몰라도, 자유로워 보인다고 필자에게는 느껴진다. 매춘부들 자신의 입장에서는, 극단적 언설, 논리적 정합성 따위 상관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파탄이 나있든 아니든,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그것은 ‘인권을 지키자’ 라는 말이 전부다.

    그녀들은, 매춘부가 ‘모든 여성과 똑같이’ 가부장제 사회에 있어서 불공평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나, ‘다른 여성보다 더욱 많이’ 차별받고 있다는 사고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춘 제도의 즉각 폐지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간호사나 타이피스트, 작가나 의사 등과 동등하게’ (혹은 ‘아내들’과 동등하게), 성적 기술자로서, 안전과 자유를 보장받는 사회적 환경 가운데에서 매춘을 업으로 삼는 ‘노동할 권리’이다.

    탁상공론을 옥신각신하기에 앞서, 훨씬 시급한 일이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 행해지고 있는 인권 침해를 멈추는 일이다. 이러한 성노동론의 근간적 주장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고 필자도 생각한다.

    실제로 매춘부의 과반수는 가난한 집안과 열등한 사회환경에서 자라, 충분한 사회적 훈련이나 교육을 받아오지 못하였고, 현재에도 성구매자에 의한 폭력, 관리자에 의한 수탈, 경찰에 의한 폭행이라는 피해를 받고 있다.

    예를 들어, 매춘부가 재판에서 탄원해도, 성 구매자가 미이행한 지불 계약의 대금을 받아낼 수는 없다. “그녀는 범죄 행위를 행하지는 않았지만, 매춘은 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으므로, 대금 청구의 근거가 되는 매춘 계약은 위법이며, 미풍양속을 해치는 계약으로서 무효로 판단” (가쿠다 유키코, ‘해설’, 델라코스테, 전게서, 421쪽)되기 때문이다.

    매춘부가 상대 남성의 가학적인 행위에 공포감을 느껴 상대의 나이프를 낚아채 찔러 죽인 87년 이케부쿠로 매춘부 남성 살인 사건에서도, 사법부는 매춘부의 정당 방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지방법원 판결에 의하면, ‘일면식 없는 남성이 묵는 호텔방에 홀몸으로 찾아간 이상, … 상당한 위험이 수반된다는 점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을 터이고 … 말하자면 스스로 불러들인 위험이라고 말 못할 것도 아니다’ 라고 하고, 고등법원 판결에 의하면 ‘매춘부와 일반 부녀자 사이에는 성적 자유의 범위가 다르다’라고 단정된다. 콜 걸 같은 일을 하다 보면, 어떤 상대와 마주할지 모른다. 그것을 직업으로 간주하는 이상, 성적 자유의 침해에 저항하는 것은 정당방위로서 인정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와카오 노리코, <어둠 속 여성의 신체>, 가쿠요 쇼보, 1997년, 213쪽)


    하지만, 이를테면 택시 운전사는 ‘일면식 없는 인간’과 ‘밀실’에 갇혀 있는 셈인데, 인기 없는 직업이라 할지라도 ‘단신부임’한 이상, ‘상당한 위험이 수반된다는 점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직업이라든가, 운전기사가 강도와 조우했을 경우에 ‘자신이 스스로 불러들인 위험이라고 말 못하는 것도 아니다’ 와 같은 말을 입에 담는 재판관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에는, 매춘부에게는 다른 직업인과 동등한 인권을 인정하지 않겠다, 하는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투영되어 있다. 일반 시민으로서 확보할 수 있는 모든 권리가 매춘부에게는 인정받지 못한다. 이 무권리 상태, 무보호 상태에 더해 매춘을 생업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여성들에게, 그것을 대신할 생업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도 않으면서, ‘범죄이므로 그만두라’, ‘억압받으며 하는 일이니 그만두라’ ‘찝찝한 일이므로 그만두라’ 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매춘부들의 인권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수긍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매춘을 정규 노동으로 인지하고, ‘매춘은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필자는 여기에 ‘난관’이 있다고 본다.

    지식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자신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올바른 것>이어야만 한다’는 고집이다. ‘논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손 쳐도, 실천적으로는 용인한다’는 길거리 사람들의 생활 감각과의 괴리는 여기서 생겨난다.

    예를 들어, 이와나미 출판사가 펴낸 ‘여성학 사전’에 실려 있는 ‘섹스 워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에는, 지식인의 당혹감이 잘 드러나 있다.


    “일반적으로 성노동자라는 개념은 자기 결정에 기반한 매춘의 옹호에 활용된 경우가 많다. 다시말해, 매춘을 자유 의지에 기반한 것(자유 매춘)과 그렇지 아니한 것(강제매춘)으로 구분하여, 전자의 매춘을 행하는 사람들을 성노동자로 부르고, 이 사람들의 매춘할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매춘자의 권리를 주장함에 있어 역점을 두어야 할 곳은, 이러한 자기결정이나 자유의지에 기반한 매춘의 긍정이라는 점이 아니라, 매춘자가 행한 자기결정권의 존중이라는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매춘은 남자의 본능이고, 성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섹스 산업은 필요하다는 식으로 간주되어, 사회 자체가 매춘하는 여성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즉, 사회적 매춘 필요성이 있고, 애초에 노동으로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도 법적으로도 허용되지 않는 행위로 줄곧 간주되어 왔고, 매춘을 행하는 여성들은 차별받으며, 여러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그러한 차별에 대한 저항이, 성노동자라는 말에는 내포되어 있다.” (아사노 지에, ‘섹스 워커’, <이와나미 여성학 사전>, 2003년, 304쪽)


    알아듣기 쉬운 문장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매춘자의 권리를 주장함에 있어 역점을 두어야 할 곳은, 이러한 자기결정이나 자유의지에 기반한 매춘의 긍정이라는 점이 아니라, 매춘자가 행한 자기결정권의 존중이라는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도무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매춘을 원리적으로 긍정하는 것’과 ‘실제로 매춘을 하고 있는 인간의 인권을 옹호하는 것’은 서로 수준이 다른 문제이므로 따로 다루는 게 좋다는 것이다(애초에 그렇게 쉽게 쓰면 될 일인데 말이다). ‘원리의 문제’와 ‘현실의 문제’는 별개로 다루는 게 좋다. 확실히 작업은 그만큼 께름칙해지고 까다로워지나, 그것은 ‘현실에 끼워 맞추기 위한 비용의 일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재소자의 인권을 지키라’는 말은 ‘범죄를 긍정한다’는 것과는 수준이 다른 문제이다. 재소자에게 쾌적한 의식주가 제공되는 생활 환경을 보증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달리 그 범죄 행위가 면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인권은 인권, 범죄는 범죄라는 것이다. 그와 똑같이, ‘매춘은 범죄이지만, 매춘부의 인권은 적절히 옹호되어야 한다’는 입장은 있을 법하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지식인들은 이렇게 배배 꼬인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인데, 정치가나 학자처럼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매춘은 범죄이므로, 매춘부에게 일반 시민과 동등한 인권을 인정할 수는 없다’라는 경직된 법치주의의 입장에 서든가, ‘매춘부의 인권은 옹호받아야만 한다. 따라서, 매춘을 합법화해야 한다’는 경직된 인권주의의 입장에 서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한다. 하지만 현실이 이렇게 복잡할진대, 무리하게 그것을 단순화시키는 일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4.

    우에노 치즈코는 오구라 치카코와의 대담에서, 매춘은 여성에게 있어 귀중한 자기결정 기회라는 의논을 전개하고 있다.

    “오구라: 그럼 우에노 씨는 원조교제하는 여자아이들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인가요?
    우에노: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보통은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훌륭한 자기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개인적으로 협상을 행할 능력을 갖고 있으며, 제 3자의 관리도 받지 않으니까요. (…) 원조교제를 실제로 하고 있는 여자애들의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장한 발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 남자한테서 돈을 받느냐. '돈을 내지 않는 이상, 나는 당신 것이 아니야'라는 점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다, 라고요. (…) '나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야' 라는 점을 각인시키기 위해 돈을 받는 것이다, 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우에노 치즈코, 오구라 치카코, <더 페미니즘>, 지쿠마 쇼보, 2002년, 231쪽)

    우에노는 지식인이므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을 말하는 것이 의무라고 느끼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해 우에노는 매춘을 단순히 ‘용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단적으로 ‘가부장제 비판’의 ‘장한’ 실천이라는 점을 상찬하게 된다. 자신이 용인하는 것인 이상, 그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우에노 자신의 의사라기보다는, 우에노가 채용한 ‘논리의 경제성’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분명히 매춘이야말로 가부장제 비판에 있어서 모험적 실천의 일부로써 간주될 수 있다면,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는 성산업 폐지론을 사로잡고 있는 모종의 안타까움은 회피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우에노는 매춘을 상당히 ‘단순한’ 프레임 속에 가둬놓은 건 아닐까.

    이 몇 줄 안 되는 문장에서 우에노가 매춘과 관련해 사용하고 있는 키워드를 그대로 나열해보면 그 ‘단순함’의 이유가 드러난다.

    ‘자기결정’ ‘협상능력’ ‘제3자’ ‘관리’ ‘돈’ ‘돈’ ‘소유물’ ‘돈.


    이것이 우에노가 사용하고 있는 키워드이다. 보시는 바와 같이, 여기서 우에노는 비즈니스 용어를 ‘한정적이며 선택적으로’ 구사해 매춘을 논하고 있다. 우에노에게 있어서, 매춘은 일단 ‘돈’의 문제인 것이다. ‘돈’과 ‘상품’을 교환할 적에, ‘판매자’가 ‘구매자’나 ‘갑’에게 수탈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부장제적 수탈 구조로부터의 ‘장한’ 비판적 실천이 되기 충분하다.

    확실히 이야기는 간결해졌다. 허나, ‘너무나’ 간결해져 있지는 않은가.

    이 담론에는 매춘에 대해 우리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다로운 문제가 간과되어 있다.

    그것은 ‘신체’의 문제이다.

    매춘을 하는 인간의 ‘신체’가 여기서는 단순한 ‘상품’으로 간주된다. 허나, 신체를 환금 상품으로 여기고, 그로부터 최대한의 이익을 내는 것이 현명한 삶의 방식이라는 주장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이며, 애시당초 우에노가 비판하고 있는 가부장제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현재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신체관은 ‘신체는 뇌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이다.

    귓불, 입술이나 혀를 뚫어 구멍을 내는 것도, 피부에 바늘로 문신을 새기는 것도, 낯 모르는 인간의 성기를 몸 속에 들이는 일도, 신체적으로는 불쾌한 경험일 터이다. 그러한 행위가 ‘쾌감’으로써,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실천으로서 감지되는 사태가 일어나는 까닭은, 뇌가 그렇게 느끼도록 명령하기 때문이다. 신체를 첨예한 미의식이나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의 표상으로서, 혹은 ‘돈’과 교환할 수 있는 상품으로서 이용할 수 있다고 뇌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원하는 것은 뇌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신체는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가 요구하는 것은 좀 더 물성적인 것이다. 부드럽게 쓰다듬받는 일, 달콤한 말로 속삭임받는 것, 가만히 휴식하는 것, 맛있는 것을 먹는 것, 감촉 좋은 옷을 입는 것…. 신체는 ‘돈’, ‘정치적 올바름’ 그 어느 것과도 상관이 없는 수준으로 그러한 바람을 나지막이 고한다. 허나, 뇌는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현실을 무시하고서, ‘돈’이나 ‘정치’, ‘권력’, ‘정보’, ‘체면’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필자는 이렇듯 뇌에 의한 신체의 중추적 지배를 ‘신체의 정치적 사용’으로 부른다.

    우에노가 원조교제 소녀에게 ‘자기 결정권’이라 이름붙이며 상찬하는 것은, 이 소녀의 뇌가 그 신체를, 그녀의 정치적 의견을 기호적으로 표상하고, 경제적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써 독점적, 배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소녀는 분명히 자신의 성적 신체에 대한 독점 사용권을 ‘남자들’로부터 탈환하였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신체를 배려하고, 그로부터 발신되는 미약한 신체 신호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신체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들어두기 위한 것이 아닌, 신체를 ‘횡령하여’ 100% 이기적으로 착복하기 위함이다. 수탈자가 바뀌었을 뿐, 신체가 뇌에 도구적으로 이용당한다는 구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성노동론은 매춘의 현장에 있어서는 매춘부의 있는 그대로의 신체를 피지컬한 폭력으로부터 어떻게 구체적으로 보호할 것인가 하는 긴급한 과제에 응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전개되는 게 순리였겠지만, 그것을 ‘매춘은 올바르다’는 이론에 접합시키려고 하니, 그 순간 ‘있는 그대로의 신체’는 ‘도구’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돈을 지불하지 않았으면 당신 것이 아니야’ 라고 선언하는 것은, ‘돈을 지불했으면 당신 것이다’ 라는 말이나 다름 없다. 허나, 그것은 세계 창부(娼婦) 회의의 매춘부들이 희망하는 바인, ‘돈을 지불했든, 돈을 지불하지 않았든’, 매춘이 위법이든 합법이든, 인간의 신체에 대해서만큼은 무조건적으로 그것에 깃든 고유한 존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사고상식과는 상당히 초점이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5.

    신체를 도구로 보는 관점에서의 성노동론은, 우에노 뿐만이 아니고, 신체를 정치적인 권력의 투쟁의 장으로 간주하는 푸코Foucault 아류의 지식인들에게 공통되고 있다. 다음 사례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매춘 용인의 입장을 선명히 밝히고 있는 미야다이 신지의 인터뷰를 보면, 도쿄대 생이면서 매춘부인 이 여성은 매춘의 ‘효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열변을 토하고 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자신의 선택은 정당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시작한거긴 하지만, 여러 남자들을 상대해보기도 했고, 지금까지 믿어왔던 체면의 세계와는 다른, 속마음이라는 현실도 알게 되었고요. 게다가, 의사나 상담사를 반 년이나 찾아다녀도 낫지 않았던 게, 매춘으로 낫게 되었으니까요. (…) 적어도 저한테 있어서는, 정신과는 정신에 좋지 않았지만, 매춘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었어요. (…) 저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요. 긍지를 파는 것도 아니거니와,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예요. 오히려 저는 긍지를 회복했으며, 때로는 우월감조차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미야다이 신지 편저 <‘성의 자기결정’ 원론>, 기노쿠니야 쇼텐, 1998년, 279쪽)


    그녀가 말하는 ‘긍지’나 ‘우월감’에는 다소 특수한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대학생 매춘부가 ‘우월감을 느낀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를 거쳤기 때문이다.


    “영감탱이가 엄청 떠받들어줘서요. 내 몸의 부품 같은 걸 보고서 말이죠. 그랬더니 뭔가 기분이 좋아졌어요. 지금까지 계속 ‘나는 틀려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칭찬해주니까요. (…) 요즘에 가까워져서는 우월감을 맛볼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얻고 싶었어요. 영감탱이가 <너를 좋아하게 되었어>라든가, <너는 내가 이제까지 만난 적 없던 멋진 여성이다> 라든가…. 뭐… 이러면 기분이 좋거든요. (…) 영감탱이는 내면 같은 건 상관 없이, 제 몸만 보는 거잖아요. <기분 더럽다, 탈모 영감아>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네가 최고야>라는 식으로 말하니까(웃음).” (같은 책, 276~7쪽)


    우에노가 꼽고 있는 원조교제 소녀와 이 학생 매춘부에 공통되는 점은, 둘 다 자신을 ‘구매한 남자’를 깔봄으로 해서, ‘상대적인’ 긍지나 우월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그녀들의 신체를 사기 위해 돈을 낸 남자들이, 그녀들 자신보다도 천하고 비열한 인간이라는 사실로부터 인격적인 ‘부력浮力’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를 인격의 기초로 삼기에는 퍽 취약하기도 하거니와 퇴폐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적 사례는 니체의 ‘초인’이다. 아시는 바와 같이, 니체의 ‘초인’은 실체가 있다거나 고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옆에 있는 인간이 ‘원숭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정신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초인’은 ‘비웃음 당해도 싼 원숭이’, ‘노예’의 속성을 갖고 있는 ‘천민’을 가까이 두고서, 끊임 없는 조롱과 매도를 일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격하게 증오하면서, 그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을 니체는 ‘거리距離의 파토스’라고 불렀다. 이 혐오감만이 인간 ‘자기 초극의 열정’을 공여한다. 그래서, ‘초인’을 향한 의지를 북돋기 위해, 추악한 ‘원숭이’가 항상 곁에 대기해 있으면서, 혐오감을 휘몰아치게 해주는 일이 꼭 필요하다.

    우에노가 소개하는 ‘장한’ 원조교제 소녀와, 미야다이가 소개하는 ‘긍지 높은’ 매춘부에게 공통되는 것은, 매춘하는 남자들이 여성의 신체를 환금 가능한 ‘소유물’이나 관상용 ‘부품’으로만 바라보는 ‘원숭이’라는 사실로부터 그녀들이 이익을 얻는다는 점이다. 니체의 ‘초인’과 같이, 그녀들도 또한 남자들이 영원히 어리석고 열등한 존재로 남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가부장제 사회와 그 지배적인 성적 이데올로기의 영속을 절실히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이 학생 매춘부는 성을 ‘권력 관계’의 용어로 다루고, 우에노의 ‘원조교제 소녀’는 ‘상거래’의 용어로 성을 다룬다. ‘권력 관계’도 ‘상거래’도 단기적으로는 ‘제로섬 게임’이고, 게임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인 게 게임 주체로서는 바람직한 일이다. 그래서, 그녀들이 상대적 ‘약자’를 게임 파트너로서 줄곧 선택해온 것은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장기적 관점에서 회계장부를 살펴보게 되면, '자신을 상대하는 인간이 항상 자신보다 우둔하며 저열한 경우'에 의해 잃는 것이, 얻는 것보다 많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미야다이에 의하면, ‘작금의 일본에서는, 성 구매 남성의 연령대가 낮으면 낮을수록, 돈을 내지 않는 한 섹스 상대를 찾을 기회가 없는 성적 약자의 비율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이 ‘그냥은 안 해준다’는 식으로 나오고, 그렇게 남성이 ‘돈을 내지 않는 한 섹스 상대를 찾을 수 없다’는 상황이 되고 보면, 확실히 성적 신체라는 ‘투기장’에서의 남자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성교 장면에서 여성에게 자신의 애처로운 성적 환상을 투사하는 ‘영감탱이’의 모습은 단적으로 추악한 존재가 되리라. 당연히 그것으로 인해 ‘지금까지 믿어 왔던 체면의 세계’가 가진 기만성이 폭로되는 기회가 또한 증대되리라. 그래서, 성적 신체를 ‘권력’ 투쟁의 장으로 간주하는 지식인들이, 매춘 기회(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형태의 성교 기회)의 증대에 호의적인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의연히 말하건대, 이 전략적 관점에 그다지 공감할 수 없다. ‘자신보다 비천한 인간’을 경시하고 혐오하는 행위에서 얻을 수 있는 상대적인 ‘부력’은 기대하는 바만큼 수지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혹시나 이번 주 한 번의 매춘으로 인해 학생 매춘부의 우월감이 담보된다 할지라도, 나이를 먹으며 ‘신체 부품’의 심미적 가치가 상각되면서, ‘영감탱이’의 찬사를 얻을 기회가 적어지면, 머지 않아 그녀는 ‘낚시터’를 옮기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을 깔보는 것에서 우월감을 얻기를 바란다면, 항상 ‘자신보다 열등한 인간이 안정적이면서도 대량으로 공급되는 장소’로 이동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도쿄전력 OL 살인 사건’의 피해자 여성이 어째서 최후에는 마루야마초의 길거리에서 1회 2000 엔으로 가격을 낮춰서까지 하루 네 명의 매춘 할당량을 개근했겠는가, 그 이유를 아마 본인도 잘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여성이 ‘학력’과 ‘돈’에 깊은 고착을 갖고 있었다는 것, 다시말해 그 성적 신체의 구석구석까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충만한 ‘신체를 가지지 않은’ 인간이었을 것이라는 점 뿐이다.


    이들 사례로부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매춘을 자기 결정, 혹은 자기 실현, 혹은 자기 구제를 위한 기회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매매의 객체가 되는 그 신체에는 발언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체에는 (그 신체의 ‘소유자’조차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 고유한 존엄이 갖추어져 있으며, 그것을 돈벌이 용으로 쓴다든지, 기호화시킨다든지, 도구화함으로 인해 끊임없이 침범당하고, 더럽혀진다는 사고방식을, 파는 그녀들도 사는 남자들도, 그리고 그녀들의 공리적 신체관을 지지하는 지식인들도 하나같이 결여하고 있다. 성적 신체는 이 사람들에게 있어 거의 무감각적인, 신경이 통하지 않는 ‘부품’의 관념이거니와, 매끈한 플라스틱과도 같은 성적 신체라는 ‘테이블’ 위에서, ‘권력 투쟁’의 카드만이 쉴 새 없이 오간다. 허나, 이 패턴은 우리 사회 속 권력 관계와 상거래의 조야한 축도판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권력 투쟁의 장에서 ‘권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경제 활동의 장에서 ‘화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성적 신체의 매매의 장에서는 ‘신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아무도 꺼내지 않는 것이다.

    6.

    성노동자들이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에 필자는 동의한다.

    다만, 그것은 좌익적 성노동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매춘자가 사회 모순의 집약점이고, 매춘부의 해방이야말로 사회 전체적 해방의 결정적 조건이라는 사고방식을 필자가 갖고 있어서는 아니다. 또한 페미니스트 매춘 용인자가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장한 자기결정’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사회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성적 신체를 투기장으로 보는 ‘권력의 제로섬 게임’에서의 승리가 매춘부들에게 영혼의 구제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도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현실 속 폭력과 수탈에 직면해 있는 신체는 어떠한 위협으로부터도 보호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매춘은 ‘꺼림칙한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필자는 품고 있다.

    다만, 그것은 보수파 매춘 규제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매춘이 ‘반사회적, 반 질서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것이 철저하게 ‘사회적, 질서적’인 것, 현실 사회관계의 ‘왜소한 거울상’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체를 ‘뇌의 도구’로서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신념은, 우리 사회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이데올로기이며, 필자는 그 이데올로기가 ‘꺼림칙’하다.

    신체에는 고유한 존엄이 깃들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신체가 발신하는 미약한 메시지를 들어두는 것은 우리의 생존전략상 필사적일 정도로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매춘은 신체가 발하는 신호의 수신을 정지하고, 자기 자신의 신체와의 대화 회로를 차단하며, ‘뇌’가 분비하는 환상을 온몸에 퍼뜨림으로써 성립하는 행위이다. ‘매춘부는 보호받아야 한다’라는 주장과, ‘매춘은 좋지 않다’는 생각을 어떻게 정합시킬 수 있겠냐며 광분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허나, 다시금 말하지만, 현실이 정합적이지 않은 이상, 그것에 대해 말하는 논리가 정합적일 필요는 없다. ‘이미’ 매춘을 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인권의 보호를, ‘이제부터’ 매춘을 업으로 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지 마시오’라고 충고하는 것, 그것이 이제까지 길거리의 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취해 왔던 ‘애매모호한’ 태도였으며, 필자는 힘주어 이 ‘상식’의 편에 서는 것이다.


    (2022-07-01 09:3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