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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클럽 활동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7. 9. 17:26
<주간 금요일>에 동아리 활동의 지역 이관에 대해 썼다.
문부성과 스포츠 청(廳)의 주도로, 공립 중학교에서 행해지는 동아리 활동에 대한 ‘지역 이관’이 추진되고 있다. 우선 내년도부터 운동부의 지역 이관이 시작되고, 인문계 동아리 활동에 대해서도 다음 달께 제언이 다 마무리지어질 것이라 한다.
승리 지상주의에 중독된 지도자가 학생의 인격을 모독하는 폭언을 내뱉는다든가, 몸이 망가질 정도의 장시간 속박을 강요하는 ‘혹사형 동아리 활동’은 사라지는 편이 좋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교원 입장에서도 과도한 부담이 되고 있다. 동아리 활동 고문교사가 되고 나서 휴일을 반납하고 학생을 지도하던 교원의 심신에 무리가 왔다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학생도 힘들고, 교원도 힘드니, 그런 동아리 활동은 아웃소싱하면 된다는 것이 이번 ‘지역 이관’의 목적이다(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물론 문부성은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지역 이관은 ‘학령 인구 감소로 인한 동아리 폐지 탓에 학생들의 선택지가 줄어들고 있으므로 더욱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전문가에 의한 지도를 받을 수 있다’ 는 둥 ‘수익자 우선’ 시책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웃소싱을 수용하는 지역 측에게도 불안요소는 있다. 동아리 지도에 임하는 사람은 그 분야의 전문가일지는 몰라도, 교육자는 아니다. 과연 동아리 활동의 ‘교육적인 의미’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동아리 활동이라는 것은 전 세계 어딜 가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프랑스 청년이 ‘선생님은 아이키도를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하고 물어보아서 ‘대학 클럽 활동’이라고 대답했더니, 혼란스러워하며 ‘그게 대체 뭡니까?’ 라고 하는지라, ‘방과후에 학생이 캠퍼스에 남아 스포츠나 밴드, 연극 활동 하는 그런 거, 알고 있잖나’ 라고 설명하니, ‘그런 제도는 프랑스에 없습니다’ 라고 했다.
프랑스에서 학교란 공부만 하는 곳으로,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을 다 내보내고 학교 문을 걸어잠근다. 축구나 수영 클럽은 있는데, 그것은 일단 집에 돌아간 뒤 개인적으로 다니는 것이어서, 자가용으로 클럽까지 부모가 픽업해줄 수 있다거나, 비싼 요금을 부담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집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다. 얘기를 듣고 보니 과연 프랑스 영화에 등장하는 중고등학생이 동아리 활동을 즐기는 장면을 본 기억이 없다.
파리에는 ‘벙리외Banlieues’라고 불리는 슬럼가가 있는데, 그곳에는 도서관이나 미술관, 콘서트 홀, 영화관 등, 소위 문화적 시설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를, 중학교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는 프랑스인으로부터 들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그곳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책을 읽는다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미술품을 감상한다든지 하는 기회 그 자체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과연, 그런 과정을 거쳐 문화자본의 양극화가 제도화되고, 계층 사회가 재생산되는구나 하고 납득이 가는 바가 있었다.
일본의 동아리 활동에는 ‘문화 자본의 민주적 분배’라는 측면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잊고 있었던 게 아닐까. 동아리 제도 덕분에 집안이 가난하더라도, 운동기구나 악기 등 다양한 기자재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그렇게 아이들은 운동 능력, 예술적 재능 등, 자신의 ‘숨겨진 자질’을 발견할 기회와 만나게 된다. 동아리란 본래, 그런 식으로 아이들 가운데 잠재되어 있는 재능을 발견하고, 그 능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제도였던 게 아닐까. 허나, 어느 순간부터 교사와 보호자 모두 동아리 활동이 갖고 있던 애초의 취지를 망각하고 말았다.
아이들의 잠재 가능성을 꽃피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동아리 활동의 교육적 의의를 잊고서 ‘지역 이관’한다손 쳐도, ‘승리 지상주의’ 전문가가 학생들을 매도한다든가, 경제력 있는 집 아이들에게만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게 된다면, 그것은 이제 더이상 ‘동아리 활동’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게 되는 게 아닐까.
(2022-06-27 09:3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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