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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공약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7. 4. 21:33
<주간 금요일>에 6월 8일 기고한 글.
위정자가 자신들에게 명백한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정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많은 지식인이나 언론인은 그러한 사람들이 ‘정보 비대칭 상태’라든가 ‘왜곡된 정보 노출’에 처해 있는 탓에, 그들을 ‘계몽’시키면 정치적 태도는 개선될 수 있다고 말한다. 허나, 정말로 그럴까. 필자는 최근 점점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정당을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아마 (무의식적으로라도)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본다. 어떤 정책이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지, 어떤 정책이 불이익을 가져다줄지 정도는 알 것이다. 외교, 안보, 경제정책에 대한 적합성 여부를 판단내릴 수는 없어도, 임금, 급여, 사회보장, 교육비 등에 관해서는 자신들에게 무엇이 유리한지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차원에서, 자신들을 더욱 고통받게 하는 정당에 표를 던진다. 그러한 도착(倒錯)이 국민적 규모로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현대 일본, 혹은 러시아나 중국의 정치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다.
<후퇴론>이라는 책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 씨는, 책에서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연구팀이 실시한 일본 유권자들의 정당 지지와 정책 지지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고 있다. 직전의 중의원 선거 결과를 분석했는데, 그에 따르면 자민당이 압승한 이 선거에서, 자민당의 정책은 다른 당에 비해 높은 지지를 얻지 않고 있다. 자민당의 정책별 지지도를 살펴보면 원전 및 에너지 정책은 최하위, 경제정책과 젠더 정책은 밑에서 두 번째, 코로나 대응과 외교 안보는 근소한 차이로 1등이다.
하지만 어째서 정책이 지지받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민당은 계속 이겼을까. 그 문제의식에 의거해 연구팀은 정당명을 가리고서 정책의 찬반을 판단하게 한 경우와, 정당명을 표시한 경우를 비교한 것이다. 놀랄 만한 결과가 나왔다. 자민당 이외의 정당이 내건 정책일지라도, ‘자민당의 정책’이라는 딱지를 붙이면 지지율이 급상승하는 것이다. 미일 안보조약 폐기를 주장하는 일본공산당의 외교 안보 정책은 지지율이 한참 낮으나, 이 또한 ‘자민당의 정책’으로 제시해놓으면 급격히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즉, 유권자는 어느 정당이 어떤 정책을 내거는가를 투표 행동의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당이 권좌에 앉았는가’를 기준으로 투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정당의 정책은 옳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룰을 이미 많은 유권자들이 깊이 내면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유권자들은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정책이 아니라, ‘옳은 정책’의 지지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책 본래의 타당성과는 상관 없이 ‘어느 정당이 이길 것 같은가?’ 가 최우선 관심사가 된다. 그 정당에 투표하기만 하면, 그들은 ‘올바른 정치적 선택을 하였다’고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다.
선거에서 얻은 정당 득표수의 숫자와, 정당이 내건 공약의 타당성 사이에는 관계가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역사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정당이 나라를 망치고, 올바른 정책을 내건 정당이 조명받지 못한 채 사라진 사례…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허나 현재 일본 유권자의 대다수는 득표 수와 정책의 타당성 사이에는 상관이 있다고 믿고 있다. ‘선거에 이긴 정당은 <올바른 정책>을 내걸었기에 이긴 것이고, 패배한 정당은 <틀린 정책>을 내걸었기에 졌다’는 명제가 승인받고 있다. 실제로 정치가 뿐만이 아니고, 평론가들이나 저널리스트들도 다들 짠 듯이 이 거짓말을 질리지도 않게 되풀이한다. 야당 지도자까지 ‘선거에서 진 것은 정책이 틀렸기 때문이다’라고 굳게 믿으며, 이긴 정당에 정책적으로 영합하게 된다. 유감스럽지만, 당신네들이 선거에서 진 것은 정책이 부적절해서가 아니다. ‘선거에서 이길 것 같지도 않았기에’ 진 것이다.
끈질기게 한번 더 반복해 말하는데, 선거에서 이긴 정당은 정책이 옳았기에 이긴 것이 아니다. ‘이길 것 같은 정당’이었기에 이긴 것이다. 선거에서 진 정당은 정책이 잘못되어서 진 게 아니다. ‘질 것 같’으니 진 것이다.
유권자들은 ‘이기는 마권을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투표 행동을 행하고 있다. 그 ‘말’이 대체 국민을 어디로 몰고 가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자신이 투표한 정당이 이겨 권좌에 앉으면, 투표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이 나라의 지배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는 지배당하고, 관리당하고, 수탈당하는 쪽에 있지만, 환상적으로는 ‘지배하고, 관리하고, 수탈하는 쪽’이라는 입장에 선다.
다음 참의원 선거에서는 누구든지 ‘야당은 쫄딱 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래서 아마 야당은 쫄딱 망할 것이라고 필자도 생각한다. 모두가 그렇게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질 것 같은 정당’이 애초에 밝혀져 있는 마당에 ‘이기는 마권 사기’를 투표행동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유권자가 ‘질 것 같은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2009년에 정권 교체가 일어났던 건 ‘민주당이 이길 것 같다’고 언론이 난리를 쳐댔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당의 정책을 잘 모르는 유권자들도 ‘이길 것 같은 정당에 투표한다’는, 그때까지 자민당에 대입해 온 그대로의 이유로 민주당에 투표했던 것이다. 심플한 이야기다. 반대로, 2012년 선거 때 ‘민주당이 질 것 같다’고 언론이 한목소리로 예측했었으므로, 유권자는 ‘질 것 같은 정당’에 자신의 한 표를 던지는 일을 삼갔다.
오사카 도(都) 구상이 주민 투표에서 근소한 차이로 엎어졌을 때, 당시 시장 하시모토 도루는 기자회견에서 패인과 관련해 ‘도 구상이 틀린 정책이기 때문이겠지요’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듣고서 경탄했다. 투표 결과는 그 자리에서 논해졌던 정책의 타당성과는 상관 없다. 올바른 정책이 부결되고, 틀린 정책이 채택된 경우가 많이 있다. 정책 그 자체의 타당성과 양자택일성의 투표 결과는 관계가 없다. 그건 그저 ‘유권자의 과반이 그 정책의 실시를 바라지 않았다’는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시모토 시장은 자신이 추진해왔던 정책을 ‘틀렸으므로 부결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극히 위험한 발언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올바른 정책을 내건 정당은 선거에서 이긴다’는 거짓 명제가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해버리면, 이제 우리는 권력자에게 저항할 논리적 근거를 잃고 만다. 그래서, ‘올바름’이라는 말은 선거에 대해 써서는 안 되는 형용사인 것이다. 선거라는 것은, 승리한 정당이 내건 정책이 우선적으로 실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단지 그것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를 선거에 부여해서는 안된다.
‘올바른 정책 고르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 답을 모르는 유권자는 기권한다. 그래서, 이렇게 투표율이 낮은 것이다. 유권자는 ‘올바른’ 선택을 종용받는 게 아니다. ‘자기가 살기 편한 사회’에 대해 상상하기를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2022-06-19 13:11)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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